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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단상] : 다시 한해를 꿈꾸다
[세밑단상] : 다시 한해를 꿈꾸다
  • 교수신문
  • 승인 2001.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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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26 09:40:55
김성곤/서울대·영문학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그리고 머지않아 또다시 새해가 밝아올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왜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을 막아 시작과 종말을 만들었을까? 문학은 사계의 변화로부터, 태어남과 젊음, 그리고 늙음과 죽음이라는 삶의 본질과, 영원히 반복되는 세대교체의 주기를 본다. 그래서 시인은 봄의 희망과 가을의 우수를 노래하며, 단풍과 낙엽을 보며 삶의 덧없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과학은 문학의 그러한 신비화 작업을 간단명료하게 해체한다. 예컨대 과학이 보는 사계절의 변화는 다만 태양과 지구의 거리 변화 때문이고, 오색 단풍과 쓸쓸한 낙엽 역시 추운 날씨와 잎의 수분부족 현상에 불과할 뿐이다.
또 문학에서 그토록 심각하게 다루는 사랑과 이별도, 과학적으로 보면 종족보존 본능에 의한 짝짓기 현상과 짝짓기의 실패일 뿐이다. 연인들이 만난 지 3개월 째부터 시들해지는 이유도, 사실은 연인들을 흥분시키는 러브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과 항체가 몸 속에 생성되기 때문이라는 이론이나, 그렇게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꿈과 기억도 사실은 우리 두뇌가 해석하는 전기신호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재미있으면서도 우리를 허망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사랑과 기억과 꿈은 때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인간에게 살아갈 희망을 주고 삶을 지탱해주는 정신적 지주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과학과 테크놀로지도 중요하지만, 문학과 예술, 그리고 문화와 인문학이 소중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사실 꿈이 없는 현실, 또는 상상이 없는 실제는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또 오묘한 감정의 변화인 사랑을 과학적으로만 설명해버리면 얼마나 살벌하고 재미없을 것인가. 신이 인간에게 태양과 달, 낮과 밤, 또는 현실과 꿈을 동시에 준 것도 바로 그런 섭리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과학과 인문학은 비록 늘 반대편을 바라보고 또 서로 만나기도 어렵지만, 사실은 공존해야 비로소 그 가치가 발휘되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그럼에도 과학기술 만능주의로 치닫는 작금의 상황은 문학과 인문학을 점점 더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 다. 예컨대 학생들은 취직이 안 되는 인문학을 외면하고 있으며, 사회는 인문학 전공자들을 잉여인간으로 만들고 있고, 교육행정가들은 아예 인문학의 효용성 자체를 회의하고 있다.
책임은 물론 변화에 둔감하거나 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문학자들과 인문학자들에게도 있다. 최근 세계 각 국의 인문대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본적인 변화를 전혀 모르고 있거나, 알면서도 일체의 변화를 거부하는 경직된 태도는 그 자체가 곧 인문학 위기의 근본 요인이 되기도 한다. 문학이나 인문학이 문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 최근의 ‘문화이론’을 무조건 폄하하거나, 인문학의 위기타개를 위해 새로운 대안을 탐구하고 제안하는 동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태도 역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또 만일 인문학자들 자신이 고결한 품성과 인성을 보여주지 못한 채 서로 비방하고 싸우면서 인문학이 대학생들의 인성교육과 교양교육을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그 역시 별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행정 당국에서는 구조조정을 통해 대학의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문대학의 경우, 시장논리에 의한 기구 축소보다는 방향 전환이 훨씬 더 바람직하며, 전통적인 어문학과(부)로부터 문화학부나, 문화학 전공으로의 전환은 그 한 가능성이 된다. 외국문학이나 외국어 연구의 목적 중 하나는 분명 그 나라의 문화를 잘 아는 데 있기 때문이다. 과연 최근 미국대학들의 외국문학 교수모집 공고의 전공분야는 ‘한국문학과 문화’ 식으로 공고되고 있으며, 교수들의 명함에도 학과나 전공이 그렇게 인쇄되어 있다.
구조조정은 모름지기 필요한 분야는 확대하고 불필요한 분야를 축소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지금 현실은, 세계화를 표방하면서도 재정난으로 국제지역원이나 국제대학원을 해체해야만 하거나, 절실하게 필요한 국제교류처의 설치를 교육부의 기구축소 방침 때문에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또 학제간 연구를 장려한다면서, 우리의 학문 분야 분류표에는 아직도 ‘학제간 연구’라는 항목이 없고, 관광대국을 부르짖으면서도 전국의 안내표지판의 영문표기들은 아직도 오류로 가득 차 있다.
이 모든 모순들은 우리가 아직도 실용주의보다는 형식주의를 택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대학의 진정한 발전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제도에 얽매이지 말고, 과감히 필요한 분야를 확대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야만 한다. 축소만이 능사는 아니다. 통제보다 자율을 허용하라. 쏘로가 말했듯이, “가장 적게 통제하는 정부가 가장 좋은 정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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