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抽象, 그 자유롭고 매혹적인 線의 미학
抽象, 그 자유롭고 매혹적인 線의 미학
  • 배원정 기자
  • 승인 2008.05.26 15: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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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시] 이상남展이 남긴 것

미술에는 그 지역의 문화와 사회가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미술을 ‘사회의 窓’이라고들 한다. 작가 생활 30년 가운데 22년 가량을 뉴욕에서 보낸 이상남 화백(55)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그의 그림에서 더 이상 ‘한국적인 소재’, ‘우리 다움’을 찾기란 ‘억지’로 느껴질 따름이다. 스스로도 그는 “자신의 생존 장소는 뉴욕이며 자신은 뉴요커”라고 말한다. 그의 작품이 뉴욕 화단에서 일찍 주목 받은 탓에 뉴욕의 엘가 위머 PCC에서 정기적으로 2년마다 전시회를 열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그의 작품에 대해 “세밀한 선의 건축 구조와 색조의 원은 자유롭고 매혹적이다”는 평을 싣기도 했다. 

이상남 화백의 ‘풍경의 알고리듬전’이 지난 23일 PKM 트리니티 갤러리에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1997년 이후 11년만의 귀국전은 관객들의 높은 호응을 받으며, 전시되자마자 솔드 아웃 됐다. 예전 그의 작품들이 긴밀하게 연결된 원과 타원, 호형을 그려 넣어 정밀한 느낌을 줬다면, 이번 서울 전시에서는 문양들이 좀 더 직관적이고 화려한 컬러로 바뀐 모습이었다. 작품의 주된 이미지는 선과 원으로 이뤄진 기호들로 구성됐다.
“나의 작품은 자연이 아닌 인간의 상상 속에서 형성된 형태들에서부터 시작한다. 아이콘의 근본적 구조는 선과 원으로 이뤄져 있고, 모든 형태는 이 근본적 구조를 바탕에 두고 있다. 직선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며, 원은 삶을 뜻한다”고 이 화백은 말한다. 따라서 그가 바라보는 삶과 죽음은 선과 원이 사라지는 지점에서 시작되며, 그것이 바로 그의 영원을 향한 깨달음 또는 해방을 의미한다. 정신영 미술평론가는 “그에게 회화란 초기 르네상스의 아득한 수평선과 로코코적 화려함, 모더니티의 엄격함이라는 회화의 매체로서의 과제를 푸는 치밀한 계산의 연산법(알고리듬)이자, 한 획 한 획을 모아 숨이 멎을 듯한 디테일을 구축하면서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아레나(arana)다”고 설명한다.

기하학적, 추상적 기호를 활용해 수작업을 반복한 그의 작품들은 극도로 평면적이다. 나무판에 옻과 아크릴 물감을 수십 번 칠한 뒤 표면의 미세한 굴곡을 사포로 곱게 갈아내 만들었다. 붓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겉에 바른 물감을 갈아내서 속에 바른 물감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미술평론가 강수미는 <월간미술>(5월호)에서 “그의 그림은 ‘그림 그 자체’인 회화를 추구한다”고 지적했다. “이미지의 지지대가 되는 바탕 화면과 그 위에 올라가는 알고리듬 이미지 간 물리적인 높이 차를 극단적으로 제거해 버림으로써, 감상자가 그 이차원 평면에서 삼차원 공간을 접하는 일을 저지한다. 작품과 마주한 우리가 보는 것은 ‘그림 그 자체’지 ‘그림 저 너머 어떤 것’이 아니란 사실을, 강박적으로 표면 처리된 그의 회화가 강요하는 것”이란 설명이다.

그는 그의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직접적인 작품설명을 피한다. 제목도 알파벳과 숫자들로만 구성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은 ‘추상을 주제로 한 추상화’라고 정의 내린다. 그래서인지 느끼고 평가하는 관객 역시 저마다 다 다르게 받아들이고 해석한다. 그는 요즘 하루에도 2~3건씩 밀려드는 인터뷰를 하고 있다. “미술도 스포츠처럼 스타가 나올 수 있는 풍토가 한국에도 조성됐다고 보여진다. 현 한국미술계의 달라진 풍토에 놀랐다”고 말한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의 귀국전은 조국을 떠나 오랫동안 해외에 체류한 작가의 향수병을 대변이라도 하듯, ‘기억’이란 코드로 비평의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작가의 태생 운운하며, 작품에서 한국적인 그 무엇을 찾고자 분주했었던 것이다. 이제 관객들은 더 이상 한국을 빛낸 아티스트란 말에 열광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 뉴욕에서 ‘잘 팔리는’ 그림을 보고 싶어 한다. 뉴욕화단에서 주목받고 있는 이상남 화백의 이번 전시에 대중들이 높은 관심을 보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미술평론가 하계훈은 “팝아트적인 그의 그림이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섰다고 보여진다”고 진단했다.

그의 전시는 고국을 찾은 작가의 전시가 아니라 뉴욕의 아티스트 전시로 바라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국 미술시장의 확대와 인프라 구축, 전시의 양적 확대에 따른 장르의 다양화로 인해 한국미술계는 글로벌화된 미술시장에서 관객과 자유롭게 소통하고자 한다. 이런 면에서 “뉴욕에서 회자되지 않으면 한국 컬렉터들의 입맛에 맞출 수 없다”는 그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김영나 서울대 교수(고고미술사학과)는 “뉴욕 화단의 경우 한국보다 경쟁이 더욱 치열한 까닭에 그곳에서 치열하게 경쟁한 작가의 작품을 한국에서 감상하는 것은 한국 미술계에도 일정 부분 자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뉴욕화단에 다시 한번 크게 도약하려는 이상남 화백의 작품이 미술 시장에서만 각광받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바람대로 현대 미술사에 큰 획을 긋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한다.

배원정 기자 wjbae@kyosu.net

□ 이상남은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81년 도미, 뉴욕에 거주하며 작업을 해왔다. 엘가 위머 PCC(뉴욕), 갤러리 현대(서울), 갤러리 아페르(암스테르담), 더글라스 우델 갤러리(뱅쿠버)등에서 14회에 걸쳐 개인전을 가졌다.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평론과 기사는 <뉴욕타임즈>를 비롯, <아트인아메리카>, <아트아시아퍼시픽>등 유수한 아트 매거진에 수십회 걸쳐 게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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