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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대중과 정치를 탐색하는 두 권의 책
[책들의 풍경] 대중과 정치를 탐색하는 두 권의 책
  • 권희철 기자
  • 승인 2001.12.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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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26 13:25:08
『제국』(네그리·하트 지음, 윤수종 옮김, 이학사刊), 『한국의 아나키즘』(이호룡 지음, 지식산업사刊)

대중은 대개 지식인과 대칭적으로 사용된다. 지식인이 현실에 대해 이성적이라면 대중은 주관적 감상에 휩쓸린다고, 지식인이 사회제도를 비판하는 독립적 존재라면 대중은 자신도 모르게 얽매여 살아가는 존재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대중이란 말은 대체로 부정적 함의를 띈다. 정치인들만이 대중을 치켜세울 뿐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대중으로 칭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중을 무시하거나 간과하고서는 어떠한 정치도 기획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대중을 해방의 정치에 핵심으로 놓는 논의들도 있다. 하나는 대중을 현실에 존재하지만 잡히지 않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대중은 애매모호한 형태로, 단지 개념으로만 포착되는 미래형으로 보이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어떠한 질서에도 포섭되지 않으려 했던 자들의 역사를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제국’의 저자들은 핵심 개념으로 제국과 대중을 꼽는다. 먼저 제국에 대해서 “우리는 제국(Empire)이라는 용어를 현재의 전지구적 질서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며, 제국주의(imperialism)라는 용어와 대비하기 위해 사용한다. … 제국주의는 더 이상 전지구적 권력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적합한 개념이 아니”라고 말한다.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면 더 이상 낯선 말이 아니다. 현대인의 생활은 충분히 전지구적이고 자본주의적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사회구조에 억압받으며 벗어날 길을 찾지 못한다. 그런데 제국주의는 아니라고 한다. 도대체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 이행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저자들이 사용하는 대중 개념을 이해할 때 겨우 닿을 듯하다.

“대중(multitude) 개념은 인민(people) 개념과 대조돼야 한다. 인민은 하나의 통일체로서 주민의 대표이지만, 대중은 축소할 수 없으며 복수성으로 남아 있다. 다른 한편 대중 개념은 민중(the mob), 군중(the crowd), ‘대중’(the mass) 관념들과 대비돼야 한다.”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욕망을 발산하는 무리들을 가리키는 말로 들린다. 다소 구별하기 어려워지는데, 이 때문에 어감이 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중’으로 번역하는 시도도 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제국이 대중을 만드는 게 아니라 대중의 능동적 힘이 제국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제국’의 논리에 따르면 계급투쟁이 세계화를 촉진시켰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문제설정은 세계화를 자본의 주도적 선택으로 판단하는 우리의 상식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더 나아가 그렇게 구성된 제국이 다시 대중을 억압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세계화, 신자유주의는 불변하는 구조로 남고 변화의 가능성은 모두 차단되고 마는 것일까.

이에 대해 번역자인 윤수종 전남대 교수(사회학)는 이렇게 설명한다. “대중의 횡단적 이동은 제국 권력의 포획장치에서 항상 미끄러져 나간다. 또한 대중은 항상 어느 곳에서나 제국 권력의 훈육에 저항한다. 대중은 자신들의 자율적인 삶의 형태를 찾아 무한 여행에 나선다.” 한때 대안이념의 표상처럼 여겨졌던 ‘탈주’와 유사한 의미로 들린다.

세계화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하고 ‘대중’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르게 설정하는 그들의 논의가 목표하는 바는 충분히 이해되지만, 그런 대중의 모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사파티스타, 68혁명, 아우토노미아 등의 예를 제시하더라도 고개를 절래 젓게 되는 것은 대중의 능동적 힘이 발휘되기는커녕 갈수록 수동의 나락으로 빠지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아나키즘’의 저자 이호룡 서울대 강사(역사학)는 먼저 아나키즘의 의미부터 바로 잡는다. “아나키즘의 어원인 아나키(anarchie)는 그리스어 an과 arche의 합성어로서, ‘통치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사태’를 가리킨다. 크로포트킨은 아나키라는 용어를 ‘정부 없는 사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아나키즘은 대체로 무정부주의로 번역되곤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한자문화권에서는 明治10년대 말 西天通徹이 ‘虛無黨事情’에서 무정부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후, 대체적으로 아나키즘 무정부주의라 번역 사용해 왔다. 그러나 1936년 스페인 아니키스트들이 인민전선정부에 참가한 이후부터 정치에 관여하는 아나키스트들이 나타남에 따라, 아나키가 곧바로 무정부를 의미할 수 없게 됐다”고 밝힌다. 때문에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자유사회주의, 자유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는 것이다.

올해 한국아나키즘학회가 창립된 데서 알 수 있듯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간다. 저자는 이런 관심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광범위한 사료수집을 통해 한국의 아나키즘사를 재구성했다. 이 책이 돋보이는 부분은 다음 대목. 중국이나 일본이 19세기말부터 아나키즘을 비롯한 사회주의를 수용한 데 비해, 한국은 1920년대에 와서야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아나키즘은 공산주의에 대한 대항으로서 받아들여졌다는 게 학계의 통설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문제삼으며 한국의 아나키즘이 1880년대부터 시작됐음을 밝히고 있다. 자동적으로 이후의 역사도 새롭게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1920년대 이전까지는 아나키즘이 한국에서 주류 사회주의 노선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렇게 활발했던 제3의 사상으로서 아나키즘이 단절된 이유는 무엇일까. 냉전체제 형성이라는 외부 요인 이외에 내적 요인이 있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아나키즘이 지닌 바의 관념성이다. 아나키즘은 개인의 해방되고자 하는 욕구를 역사발전의 동력으로 파악하고,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관념상의 자유에 불과하다.” 여기서 ‘제국’의 핵심 개념들이 모호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드러난다. ‘자본’과 ‘천 개의 고원’을 섞은 듯한 ‘제국’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메시지를 담고있는데, 그 바탕 개념이 관념성을 채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 고민을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겠다. 대중의 능동성을 주장하고 그 결과를 손쉽게 예측하기 이전에, 어떻게 대중의 욕망을 능동적인 힘으로 변환시킬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찾는 것 말이다.

권희철 기자 khc@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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