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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말의 분열된 정신 상태 보여주는 사건들
17세기말의 분열된 정신 상태 보여주는 사건들
  • 교수신문
  • 승인 2008.05.13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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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재의 ‘오페라로 읽는 서양 근대의 편린’] 『프린키피아』, ‘명예혁명’, 「디도와 에네아스」

역사를 읽다 보면 때로 같은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사건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해 질 때가 있다. 지난 글에서 소개한 륄리의 「아르미데」가 초연된 다음 해인 1687년 바다 건너 영국에서는 아이작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발표했고, 1688년에는 ‘명예혁명’이 일어났으며, 1689년에는 이 글의 중심이 될 헨리 퍼셀의 「디도와 에네아스」가 초연됐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역사의 난점 가운데 하나인 동시성과 인과성의 문제를 야기하는데, 이들의 직간접적 연관성을 간략하게 짚어보기로 하자.

「디도와 에네아스」는 17세기 영국의 유일한 진정한 오페라라고 평가되고 있다. 륄리의 「아르미데」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서곡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마지막도 역시 륄리의 작품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은 심정을 절절하게 표출하는 애가로 마무리된다. 극도의 슬픔 앞에서도 여왕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는 디도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퍼셀은 애절하면서도 안정된 반음계적인 고집저음 위에 애가를 펼쳐나간다. 몬테베르디의 「아리아나의 애가」와 더불어 17세기 오페라의 백미를 이루는 이 애가는 두고두고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왔다. 그러나 영국과 오페라와의 인연은 17세기 전반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역사는 동시성과 인과성의 무대

엘리자베스 여왕 서거 후 대가 끊긴 튜더 왕조를 대신한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의 궁정에서는 프랑스의 궁정 발레와 마찬가지로 연극이 발레를 추기 위한 빌미를 마련해 주는 ‘마스크’가 성행했다. 왕정복고 이후 『실락원』을 쓰게 될 존 밀턴도 1634년 후에 『코무스』로 알려지게 될 마스크를 쓴 바 있다. 밀턴은 당시의 관례대로 1638년에서 1639년에 걸쳐 이태리로 그랜드 투어를 떠났는데, 피렌체를 방문했을 당시 연금 상태에 있던 갈릴레오를 만났을 뿐만 아니라 「성 알레시오」의 대본을 쓴 로스필리오지의 희극 오페라 「고통 받는 자, 희망을 가져라」를 당시 안토니오 바르베리니 추기경 휘하에 있었던 미래의 마자랭 추기경과 더불어 관람하기도 했다.

「성 알레시오」에 대한 글에서 언급했듯 뉴턴은 갈릴레오가 죽은 1642년에 태어났는데, 이는 또한 스튜어트 왕가의 찰스 1세를 지지하는 왕당파와 ‘원두당원(Roundhead)’이라 불리던 청교도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기 시작한 해이기도 했다. 같은 해 청교도들에 의해 잉글랜드의 모든 극장들에 대한 폐쇄 명령이 내려졌는데, 이러한 혁명의 여파는 1649년 처형된 찰스 1세의 맏아들 찰스 2세가 1660년 왕정복고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됐다.

찰스 2세의 어머니 헨리에타 마리아는 프랑스의 앙리 4세의 딸이자 루이 13세의 누이였기에, 크롬웰의 박해를 피해 두 아들과 프랑스로 망명했다. 처음에는 프롱드의 난의 여파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점차 왕권을 회복한 루이 14세와 마자랭의 도움으로 빈궁에서 벗어나게 됐다. 런던으로 돌아온 찰스 2세는 여러 면에서 프랑스를 본받으려 노력했다. 음악적으로도 공화정 이전의 영국 마스크나 비올 콘소트를 멀리하고 프랑스 궁정을 본보기로 24 바이올린을 조직하는 등 대륙의 새로운 조류를 받아들이는 데 앞장섰다.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기 바로 전 해인 1659년 음악가의 아들로 태어난 헨리 퍼셀은, 처음에는 아버지와 삼촌이 소속됐던 복원된 궁정 성가대에 소년합창대원으로 참여했다가 1673년 변성기를 맞은 후로는 왕의 악기를 관리하는 무급 조수가 됐다. 1677년 자신의 스승 매튜 로크의 뒤를 이어 궁정 바이올린 작곡가로 임명됐고, 1679년에는 역시 스승이었던 존 블로우의 후임으로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오르간 주자가 돼 죽을 때까지 봉직했다. 1680년부터 찰스 2세가 서거한 1685년까지 퍼셀의 주된 역할은 궁정 작곡가였다. 찰스 2세의 뒤를 이어 동생 제임스 2세의 등극한 이후에도 퍼셀의 직책은 이름만 바뀐 채 그대로 유지됐으나, 가톨릭 신자였던 국왕 치하에서 영국국교회 오르간 주자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무대 음악 작곡에 힘을 쏟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1688년의 명예혁명이었다. 제임스 2세가 등극한 1685년에 있었던 루이 14세의 낭트 칙령 취소로 많은 위그노들이 영국을 비롯한 외국으로 피신해 개신교도들의 위기감이 고조됐고, 모데나의 메어리와 재혼한 제임스 2세에게서 1688년 왕위를 계승받을 아들이 태어나자 영국이 다시 가톨릭화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오게 됐다. 이를 우려한 샤프스베리 백작을 필두로 한 반대 세력의 준동으로 대두된 내란의 위협에 직면한 제임스 2세는, 처형된 자신의 아버지 찰스 1세의 전례를 피하려고 프랑스로 도주했다. 개신교도였던 제임스 2세의 맏딸 메리와 결혼한 네덜란드의 오랑예 공 빌렘이 의회의 청원을 받아들여 다음 해 초 윌리엄 3세로 왕위에 오르게 됐으며, 뒤이어 선포된 ‘권리장전’은 십년 전 발효됐던 ‘인신구속률 개정법’과 더불어 향후 영국 민주주의 발전의 기초가 됐다. 칼뱅교도였던 윌리엄 3세가 즉위 후 궁정예배당 축소 조치로 교회 음악 활동에 제약을 받았던 퍼셀은 「디도와 에네아스」이후 극장 음악에 집중해 1695년 서른여섯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50여편의 작품을 남기게 됐던 것이다.

계관시인 네이험 테이트가 베르길리우스의 원작을 변형시킨 근본적인 원인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혹자는 극도의 어려움에 부딪쳐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디도에 비해 초라하기만 한 에네아스의 역할 축소를 이 작품이 발레 교사였던 조시아스 프리스트의 젊은 숙녀들을 위한 기숙학교에서 초연됐다는 이유로 돌린다. 뛰어난 남자 성악가를 초빙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현실적 이유를 든 것이다. 그러나 테이트가 에네아스의 야반도주의 원인을 비너스의 현몽 대신 헤르메스로 변신한 마녀의 속임수로 바꾼 것은 명예혁명으로 도피한 제임스 2세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 찰스 2세가 “루이 14세의 ‘연금, 애첩, 시범’을 받고 있었다”는 말을 들을 만큼 스스로의 통치력이 모자랐던 허울뿐인 왕이었으며, 이런 점에서 제임스 2세도 전혀 나을 것이 없었다는 정황을 고려할 때 이러한 해석은 더욱 개연성이 높아진다.

특히 디도의 거센 항의에 직면한 에네아스가 그렇다면 머물겠노라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늘어놓다가 끝내 자기 말을 지키지 못하는 영웅답지 못한 처신을 하는 꼴은, 왕권신수설에 기반한 절대왕정을 내세우다가도 정작 어려움에 직면하자 맞서볼 용기조차 발휘하지 못한 채 꽁무니를 뺀 제임스 2세의 비겁한 모습과 쉽게 중첩된다. 결국 륄리의 영웅적 서정 비극을 본받고 싶었던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왕들은 공공의 의무를 저버리고 개인적인 정념에 사로잡힌 부끄러운 뒷모습을 남겨야 했던 것이다.

마녀사냥과 오페라 듣다 뛰쳐나간 뉴턴


17세기 무대에서 대중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던 마녀들의 등장은 얼핏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몇 년 후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뉴잉글랜드 세일럼에서 있었던 1692년의 마녀 사냥을 떠오르게 한다. 호오손의 「칠박공의 집」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이러한 마녀 사냥의 저변에 깔린 사고방식과 「프린키피아」의 정신을 대조시켜 보면 극도로 분열된 17세기 말의 정신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뉴턴의 전기 작가 윌리엄 스터컬리가 “오페라를 한 번 밖에 본 적이 없고, 첫 막은 즐겁게 들었으나, 2막에서는 참을성이 없어졌고, 3막에서는 뛰쳐나가 버렸다”고 일기에 썼을 정도로 뉴턴 자신은 음악에 그리 큰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음악의 콰드리비움적인 측면에는 관심이 많아 음 높이의 분할을 계산했던 기록이 남아 있으며, 「프린키피아」에도 음파의 분석이 담겨 있다. 이처럼 「프린키피아」가 추구했던 우주적 원리, 명예혁명이 보여주는 사회적 역동, 그리고 오페라와 마녀로 표출된 인간 내면이 서로 다른 차원을 이루면서도 꼭 집어 말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서로 연계되어 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인간사의 세 차원으로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퍼셀의 때 이른 죽음은 밤늦은 귀가로 화가 난 아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아 걸린 감기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이러한 일화의 진위 여부는 밝힐 길이 없지만, 그의 죽음이 스튜어트 왕조의 몰락과 더불어 영국 태생 작곡가의 오페라 활동의 종지부를 뜻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차후 하노버 왕조 하에서 펼쳐질 영국에서의 오페라 역사는 헨델을 비롯한 외국 출신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살펴보기 전 우선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로 대표되는 나폴리 악파가 이룩한 오페라 세리아의 확립에 대해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 한국교원대·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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