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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걸쳐 원고지 13만장 집필 … 學者는 떠나도 집념은 빛난다
25년 걸쳐 원고지 13만장 집필 … 學者는 떠나도 집념은 빛난다
  • 김혜진 기자
  • 승인 2008.05.13 13:2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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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 故 신기철 교수의 『한국문화대사전』(전 10권, 한울터 刊) 출간 사연

한국의 민족문화를 집대성한 사전이 또 하나 출간됐다. 한 국어학자의 일생이 오롯이 바쳐진 결과물이다. 故 松山 신기철 전 성균관대 교수(1922~2003)의 『한국문화대사전』(한울터 刊)이 그의 사후 5년 만에 겨우 빛을 발하게 됐다. 어떤 외부 지원도 없이 홀로 준비한 25년의 집필기간과 7년의 제작기간을 거쳐 말 그대로 ‘천신만고 끝에’ 10권의 장정으로 나왔다. 일생을 들인 노력인 만큼 한국학 분야의 연구 성과도 깊이 담겼다.

“사전 편찬 작업이란 외부와 격리된 고되고 외로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점 하나 획 하나에 이르기까지 신경을 쓰면서 일에 열중하다 보면 점심도 거르고 화장실에도 제때 못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새로운 항목을 발굴하고, 다른 사전에서의 오류를 바로잡을 때에는 희열을 느끼곤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토·일요일이 없이 일을 합니다. 이 땅에 위대한 사상과 문화가 꽃피어 온 누리에 찬연히 빛나기를 바랍니다.”

고인이 1998년 사전의 간행추진위원회를 처음으로 구성하는 자리에서 전한 말이다. 이 사전은 한국을 보여줄 만한 삶과 문화를 남겨, 한국학 연구의 전반에 자료를 제공하는 한편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뜻으로 출간됐다.

14개분야 6만5천여 표제어 수록

고인은 이 사전으로 한국학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자 했다. ①정치 ②경제 ③교육 ④종교 ⑤예술 ⑥철학 ⑦풍속 ⑧고고학 ⑨국문학 ⑩국어학 ⑪서지 ⑫인물 ⑬제도 ⑭동식물 등 14개 분야의 6만5천여 표제어를 수록했다. 집필된 원고 분량만 해도 200자 원고지 13만장에 이른다.

한국의 문화유산을 다룬 백과사전으로는 1978년 대통령령으로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간행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있다. 1980년에 착수해서 1991년 총27권으로 발간된 이 사전은 한국학 전문연구자 3천8백명이 참여해 총 6만5천 항목, 42만매의 원고를 집필했다. 국내외적으로 7만부 이상이 보급돼 국민사전의 역할도 해냈다.

비슷한 시기 집필을 시작해 10년이나 늦게 완성된 고인의 사전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아쉬움으로 지적된 북한 분야 항목의 부족을 보완하고자 했다. 북한 행정구역 지명을 수록하고, 1945년까지의 행정구역 명칭을 병기해 독자들의 이해도 도왔다. 미망인인 이용월 여사의 전언에 따르면 미국 내 북한 전문 서점 등을 전전하며 자료 찾는데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정신문화연구원의 사전 또한 개정·증보를 통해 많은 부분을 수정했지만, 당시로서는 官學이 가질 수 있는 한계에서 자유로운 民學의 장점을 살린 셈이다.


고인은 정신문화연구원의 사전을 보고 여러 사람이 참여함으로써 가질 수밖에 없는 체계의 비일관성 문제도 고심했다. 사전의 감수를 맡은 박갑수 서울대 명예교수(국문학)는 “종전의 백과사전은 사전식 해설을 했기에 이해하기 쉬운 점은 있으나, 일관성이 부족했다”며, “본 대사전은 집필자가 한 사람이어서 필자의 일관된 견해가 논설식으로 기술됐다”고 사전의 장점을 지적했다. ‘산’은 실었는데, ‘강’은 누락되는 등의 실수를 보완하는 식이다.

문화인물을 많이 수록해 한국의 인물들을 찾을 수 있게 하고, 구체적 예시문이 들어간 것도 사전의 장점이다. 문학작품이나 시문 관련된 경우 그 대목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건조한 해설보다는 재미를 맛보게 했다. ‘누룩’항의 경우 누룩을 딛는 한국의 문화를 보여주는 ‘농가월령가’를 수록했다. 또 대항목을 지양하고 중항목과 소항목 형태로 표제어를 선정해, 독자들의 이해를 쉽게 했다.

고인 일생의 생업이라고는 1954년부터 6년 반을 재직했던 성균관대 교수직이 전부였다. 1959년 출판한 『표준국어사전』(을유문화사)과 1975년에 펴낸 『새우리말큰사전』(삼성출판사) 집필을 포함해 온 일생을 사전작업에만 바친 셈이다. 물론 경제적 곤궁함이 가장 큰 문제였다. 고교시절 항일비밀결사단체인 상록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러 나오는 국가유공자 보상금으로 집안 살림을 꾸리고, 한글학회의 사전이 나오기까지 국민사전으로 사용된 『새 우리말 큰사전』의 수입을 사전편찬에 보탰다. 물론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사전발간을 위해 차린 ‘한국학연구소’ 연구원 10여명(총 1300여명이 연구소를 지나갔다)의 월급과 사무실 유지비 등을 위해 빚내기를 여러 번이었다. 한국 유산을 남기기 위해 10억 원에 이르는 자비를 혼자 감당해야 했다.

우여곡절 출판사연 … 탈고까지 10억 자비로

출판이 더 큰 문제였다. 수익성을 바랄 수 없는 저작이면서, 엄청난 제작비용이 들어가는데 선뜻 나서는 출판사를 찾을 수도 없었고, 후원자도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1998년 간행추진위원회에서 3000질 제작을 기준으로 산정한 비용만 해도 9억 원에 달했다.

고인은 고심 끝에 83년 당시 흥사단 이사장이면서 자신의 형제들과 친분을 맺고 있던 서영훈 한우리공동선실천연대 이사장을 찾았다. 고인이 타계한 뒤 하마터면 묻혀버릴 뻔했던 업적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간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서영훈 이사장의 덕분이었다.

첫 번째 출판의 좌절은 KBS의 지원이 무산된 것이었다. 서영훈 이사장이 KBS사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KBS문화사업단에서 사전을 펴내기로 했으나 사업단이 90년 EBS로 분리되면서 좌초됐다. 정신문화연구원의 사전이 그즈음 출간된 것도 한 이유다. 두 번째 좌절은 출판사의 운영난에서 왔다. 예산 확보로 결실을 보는듯 싶었으나, 출간을 맡은 출판사의 운영난으로 실패했다. 원고가 마무리 되던 1998년 본격적으로 간행위원회를 꾸리고 2000년 4억3천만원에 달하는 부영건설의 후원으로 출간이 추진될 수 있었다. 당시 시민운동기금의 이사장이었던 이중근 부영건설 회장의 도움이었다. 그러나 계약 6년 만에 출판이 취소됐고, 그러던 사이 고인은 완간을 보지 못하고 2003년 세상을 떠났다.

서 이사장이 사전의 출간을 마쳐달라는 것이 고인의 유언이었고, 각고의 노력으로 서 이사장이 답했다. 문화관광부로부터 7천만원 지원이 확정된 이후 500질이라도 출간하겠다고 하던 차에, 고인의 셋째 아들이 근무하던 STX의 지원 소식이 들려왔다. STX장학회 이사장인 강덕수 회장이 3000질 출판을 제의하며 3억5천만원을 내놓은 끝에 출간까지 이르는 여정이었다.

박갑수 교수는 이번 책을 내놓으면서 “흩어지고 그늘에 가려졌던 우리 문화가 『한국문화대사전』이란 새 그릇에 오롯이 담겨 우리 앞에 선을 보이게 됐다”며 고인의 발간사를 대신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를 담당하고 있는 임동규 백과사전편찬연구실 연구실장은 “항목이나 내용에 대한 평가는 더 들여다 봐야할 일이지만, 단독 편찬인 만큼 일관성을 기대할 수 있다”고 전했다. 덧붙여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사전이 한국학 연구에 초점을 맞춘 전문적 성격이 강하다면, 고인의 사전은 보다 대중적 성격을 가졌을 것”이라며 사전의 유용성을 기대했다.

사전은 많을수록 좋고, 새로울수록 좋다. 이미 출간된 것을 참고해 갱신하고, 그간의 학문발전을 반영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평생을 사전학자로 살아온 인물의 결실이자, 또 사반세기동안의 투혼의 결실인 만큼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김혜진 기자 khj@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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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명미 2008-05-15 08:53:02
정말 훌륭한 업적을 남기셨습니다.새우리말 큰사전은 제가 생명의 말씀사 편집부에 근무할 때 매일매일 손때를 묻힌 사전입니다.제가 한일어 비교연구를 하면서 학문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가 하고 느꼈는데, 선생님의 길은 가시밭길 그 자체였네요.그렇지만 그 가시밭길을 선생님께서 닦어 놓으신 덕분에 저희 후진들은 아스팔트길을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정말 감사합니다.아무토록 한국문화대사전이 이 세상에 빛을 볼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