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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正本 구축에 기여 … 리라이팅에서 ‘라이팅’으로 전환해야
고전 正本 구축에 기여 … 리라이팅에서 ‘라이팅’으로 전환해야
  • 김혜진 기자
  • 승인 2008.05.06 12: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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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담론시장 달구고 있는 출판사의 힘

김언호 한길사 대표
대형출판사에서부터 소규모출판사에 이르기까지 각종 기획물들이 담론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학계가 생산한 우수한 결과를 발굴해 책을 출간하던 전통적인 기능을 넘어 적극적으로 기획의 방향을 설정하고, 실행하는 주도력을 보여주는 기획들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인류의 지적 사유가 올곧이 담긴 동서고금의 고전들을 우리말로 남긴 일이야 말로 출판계의 가장 큰 기여가 아닐까. 물론 인류의 지적 사유를 ‘제대로’ 소개하고 전달하는 일은 연구자들의 몫이지만, 양서를 발굴하고 필진을 찾아 헤매는 출판사의 노력은 고전의 출간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나 고전번역은 ‘품은 많이 들고, 돈은 안 되는’ 일이다. 또 논문에 비해 높은 연구 실적이 되지 않아 저자나 역자를 발굴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출판사의 기획은 더욱 값지다.

 

한길 그레이트북스 100권 발간의 의미

지난 2일 『일상적인 것의 변용』(아서 단토 지음, 김혜련 옮김) 출간으로 100권 째를 맞은 ‘한길그레이트북스(이하 그레이트북스)’ 시리즈의 기여야말로 빠져서는 안 될 주역이다. 지난 1996년 인문학의 부활과 사상의 대중화를 도모한다는 출간 이념을 내걸고 사상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한 그레이트북스는 묻혀 있던 사유들을 복원하고 전파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임효선·박지동 옮김), 아렌트의 주저 『인간의 조건』(이진우·태정호 옮김)·『혁명론』(홍원표 옮김)·『예루살렘의 아이히만』(김선욱 옮김), 엘리야스의 『문명화 과정』(박미애 옮김)·『궁정사회』(박여성 옮김), 에릭 홉스봄의 역사 3부작 등 생소했던 사상가들을 본격적으로 데뷔시킨 작품이 여럿이다.

동양고전과 한국고전의 발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인도철학사』(S. 라다크리슈난 지음, 이거룡 옮김) 4권, 『중국사상사론』 고대·근대·현대편(리쩌허우 지음, 임춘성 옮김)을 완역하는가하면, 정약용의 『경세유표』(이익성 옮김)와 『삼국사기』도 그레이트북스의 이름을 달고 나왔다. 앞선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20세기 말에 나온 ‘신고전’들을 포함시켜 고전에 대한 인식을 확대시키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출판 경력 40년의 관록이라면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는 기획을 만들기에 족하다는 걸 보여준 사례기도 하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레이트북스가 ‘고급’ 번역으로 획을 그어왔다면, 신예 출판사들의 시리즈물도 후발 주자로 손색이 없다. 대표적인 경우가 2003년 박우정 대표와 이승우 기획실장이 출간한 도서출판 길의 ‘코기토 총서’다. ‘세계사상의 고전’이라는 부제를 단 이 기획물은 원전 번역과 전공자에 의한 책임 번역이라는 출간 이념을 내걸었다.

철학전공자인 이강수 연세대 교수의 『장자1』가 2005년 출간된 이래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김유동 옮김), 바흐친의 『말의 미학』(김희숙·박종소 옮김), 키케로의 『수사학』(안재원 편역) 등을 선보였으며 『자본』(강신준 옮김)의 독어본 완역,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김 헌 옮김), 칼 슈미트의 『헌법이론』(나종석 옮김), 칼 폴라니의 『거대한 변환』(홍기빈 옮김) 등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이승우 기획실장은 “희랍, 라틴어 고전 번역에도 힘을 기울여 서양 인문정신의 토대를 온전히 소개할 것”이라는 다부진 포부를 밝힌다.

이들 출판사의 고전번역물들은 결정판 구축을 목적으로 인류 역사의 기록적인 사유들을 차곡차곡 소개해 나가고 있다. 상업성에 치중했다면 결코 나오지 못했을 책들을 소개함으로써 학계의 연구 토대를 강고하게 만들고 있다. 물론 그만큼 많은 국내 연구자들을 학계에 소개한 것도 크나큰 성과다.

유재건 그린비 대표(왼쪽부터), 박혜숙 푸른역사 대표.
新사유의 소개와 개척


앞선 기획물들이 사유의 먼 기원까지 섭렵한다면, ‘신고전’의 소개에 방점을 찍은 기획물들은 흙 속의 진주를 캐내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린비의 ‘크리티컬 컬렉션’은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남경태 옮김), 라이히의 『오르가즘의 기능』(윤수종 옮김) 등 20세기의 사유들을 소개하는데 방점을 찍었다. 페리 앤더슨, 테리 이글턴, 울리히 벡 등 21세기 최신 사유들을 주목한 도서출판 길의 ‘프런티어21’ 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으며, 최근 아감벤의 『호모사케르』(박진우 옮김), 바디우의 『사도바울』(현성환 옮김),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쨋다구』(한보희 옮김)를 한꺼번에 내놓은 새물결의 ‘what’s up’ 총서도 연구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앞선 기획물들이 사유의 먼 기원까지 섭렵한다면, ‘신고전’의 소개에 방점을 찍은 기획물들은 흙 속의 진주를 캐내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린비의 ‘크리티컬 컬렉션’은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남경태 옮김), 라이히의 『오르가즘의 기능』(윤수종 옮김) 등 20세기의 사유들을 소개하는데 방점을 찍었다. 페리 앤더슨, 테리 이글턴, 울리히 벡 등 21세기 최신 사유들을 주목한 도서출판 길의 ‘프런티어21’ 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으며, 최근 아감벤의 『호모사케르』(박진우 옮김), 바디우의 『사도바울』(현성환 옮김),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쨋다구』(한보희 옮김)를 한꺼번에 내놓은 새물결의 ‘what’s up’ 총서도 연구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갈무리는 ‘자율주의’ 사상에 포커스를 맞추고 아우또노미아 총서를 내고 있으며, 그린비의 ‘리좀총서’는 들뢰즈 사상 발전사 컬렉션이다. 기획물의 형태는 아니지만 초끈이론의 고전인 『엘러건트 유니버스』(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베리 마즈루 하버드대 교수의 『허수』 등 수학과 물리학 분야의 소개에 힘쓰고 있는 승산의 기획들도 눈에 띈다.

검증된 고전들이 사유의 밑바탕을 다지고 있다면, 이들 기획물들은 국내 학계에 새로운 자극을 주며 사상적 풍요로움을 더한다. 새로운 학문들을 소개하는 만큼 은막에 가려져 있던 신진연구자들의 소개에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국내연구 진척에 활력도
국내의 연구 성과들을 이끌어내기 위해 곳곳에서 발품을 판 기획들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프로젝트에 제출한 논문들을 모아 내놓는 책들이 쏟아지는 한편에서 긴 호흡으로 학술적 성과들을 펼쳐놓는 이런 책들이 반갑게 보인다. 연구자들의 노력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출판사의 자극이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할 때도 적지 않다. 출판사들은 각기 특화된 분야를 두고, 학계의 결과물들을 소통시키는데 적극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다.

후마니타스는 사회과학을 전문 분야로, 특히 현실문제에 깊게 파고들어 학술적 논의를 확장시킨다고 지목되는 출판사다. 『법률사무소 김앤장』(임종인 외 지음), 『재벌개혁의 현실과 대안 찾기』(송원근 지음),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등은 학술적 탐색을 뒷받침하면서 한국사회의 당면 문제를 천착해 주목받은 바 있다. 안중철 편집부장은 사회문제에 정면 도전하는 후마니타스의 기획을 ‘틈새전략’이라고 칭한다. 학계가 현실의 문제보다는 이론적 정합성에 치중한 것에 대한 비판의 차원이다. 그는 “사회비판적 문제의식을 정면으로 드러낼 수 있게 편집진과 필자가 문체와 편집방향에 대한 논의를 많이 하고 있다”고 전한다.

역사분야에서는 ‘한국학총서’와 ‘20세기한국사시리즈’를 꾸준히 발간하고 있는 역사비평사 외에도 푸른역사의 결과물들이 최근 각광받고 있다. 푸른숲에서 2000년 독립한 푸른역사는 강명관 부산대 교수의 『조선의 책벌레들』, 정민 한양대 교수의 『미쳐야 미친다』 등을 출간하면서 학술출판의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대중서의 성격이 짙지만, 깊이 있는 이론적 탐색으로 관련 연구자들에게도 좋은 호응을 얻고 있다. 실제로 이 두 책은 대중과 연구자들을 함께 사로잡은 인기저작으로 평가된다. 서양사 분야에서는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한정숙 지음), 『서양 금서의 문화사』(주명철 지음) 등을 선보인 길의 ‘역사도서관’ 시리즈의 기획이 주목을 받았다.

해외 번역물 일변도 극복해야

그러나 아쉬움을 전하는 지적들도 많다. 무엇보다 해외의 사유들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소장학자들이 연구성과들을 책으로 출간하길 기피한다”는 것이 출판계의 한결같은 항변이지만, ‘명성’에 의존해 인기 있는 책들이 줄지어 나오는 현실에 대한 지탄의 목소리도 높다.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좀 더 비판적이다.“그린비의 리라이팅 클래식은 의미있는 시도지만, 한국에 원전 텍스트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길사의 업적은 위대하지만, 40년이 넘도록 인문출판시장을 주도한 만큼 그 역량과 자본을 가지고 그레이트북스에 못지않은 ‘현대 한국의 그레이트북스’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출판사들의 담론시장 주도에는 ‘학문연구의 관학화’에 따른 무게추의 이동도 작용한다. 출판평론가 표정훈 씨는 “업적평가를 위한 프로젝트 때문에 자유롭고 창의적인 작업들을 하기 어렵다”며, “학계의 제약이 많기 때문에 연구자와 출판계가 만나는 접점이 더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편집자들은 학진 프로젝트의 결과물에 대해 “출판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연구의 기동성이 떨어 진다”고 입을 모은다. 국내 연구에서 아이디어를 참조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임지현 한양대 교수(사학)는 학진 프로젝트가 연구자들의 저술을 위축시킨 것에 동의한다. “강명관 교수의 역작은 그가 학진 연구비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가능했다. 학진 연구비 없이도 역작 내겠다는 각오와 끈기, 뚝심에다 아이디어가 결합한 성공 사례다”고 말한다.

그러나 좋은 기획은 입도선매식의 외서 번역에 있지 않고, 학자들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모아 기획해냄으로써 승부수를 띄우는 데 있기 때문에 ‘학진 연구는 출판 아이디어로 쓰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출판사측의 진단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창조는 깊은 안목을 필요로 한다. “안목있는 기획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모처럼 담론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출판사들의 고공행진이 바람빠진 풍선처럼 쭈그러드는 건 시간문제”라고 지적하는 한 연구자의 비판은 그래서 더욱 음미할 만하다.  

김혜진 기자 khj@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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