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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의 자서전에 그려진 사유의 길
철학자들의 자서전에 그려진 사유의 길
  • 교수신문
  • 승인 2008.05.06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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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나는 이렇게 철학을 하였다』 B. 러셀 지음 | 곽강제 옮김 | 서광사 ·『끝없는 탐구』 K. 포퍼 지음 | 박중서 옮김 | 갈라파고스

자크 데리다는 한 강연장에서 “철학자의 삶에 대해 말해 달라”란 질문에 하이데거의 말을 빌려 간명하게 응답한 적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태어났다, 그는 사유했다, 그리고 죽었다.” 최근 한 달 간격으로 연달아 철학자의 자서전 두 권이 출판됐다. 분석철학의 ‘마중물’이자 참여 지식인의 전범이었던 러셀의 『나는 이렇게 철학을 하였다』와 비판적 합리주의로 열린 사회를 지향했던 포퍼의 『끝없는 탐구』는 철학자의 삶은 곧 사유의 연대기라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러셀의 이번 자서전은 이전에 출판된 또 다른 그의 자서전인 『러셀 자서전』(전2권,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2003)에 비해 개인적 삶의 이력 보다 자신의 철학 사상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서술했다. 특히, 마지막 장에서는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추종자들의 비판에 대해 반박하는 4가지 논문들을 소개하고 있어 그의 철학적 입장을 보다 명확히 파악하는 데 요긴하다. 포퍼의 자서전은 그의 과학, 정치 철학에서 보여준 비판적 합리주의의 면모뿐만 아니라 양자 역학에 대한 비판이나 엔트로피와 진화론을 고찰한 대목까지 수록돼 있어 포퍼의 사상 전반을 폭넓게 개괄할 수 있다.

두 철학자 평생의 화두는 인식론


   러셀과 포퍼, 이들 두 철학자의 사유를 점화시키고 평생을 궁구하게 했던 화두는 인식론의 문제였다. 러셀은 “내가 평생 동안 계속 열심히 탐구했던 관심사는 오직 한 가지였다. … 우리가 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되며, … 어느 정도나 확실할 수 있고 어느 정도나 의심할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20대에 목수의 도제 생활을 했던 포퍼는 인식론의 문제에 골몰하다 마호가니 앉은뱅이 책상 서른 개를 만들어 달라는 큰 주문을 망쳐 목수일을 접어야 했다. 그는 전업 철학자가 된 것에 대해 “나이 서른다섯이 되어서야, 책상 앞에 앉아 인식론의 문제에 정신이 팔려 있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 없는, 그야말로 최고의 직업을 얻게 된 셈이었다”고 회상한다.

 
확실한 앎에 심취했던 러셀의 지적 탐구의 시발점은 수학이었다. 스스로 고백했듯이, 감각으로 타락된 현실 세계를 벗어나 변화와 쇠퇴라는 혼돈이 없는 초시간적 세계 속에서 피난처를 얻고자 했던 그의 기질은 수도자의 금욕주의를 닮아 있었다. 그는 “한번은 정구장 선을 내 손으로 그린 적이 있는데, 선들이 정확하게 직각을 이루도록 하려고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이용 했었”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수학에 매료됐다. 이후 이러한 그의 수학에 대한 관심은 화이트 헤드와 공동 집필한 『수학 원리』(1930)라는 책으로 결실을 맺는다.

비록 러셀에 비할 바 아니지만, 포퍼 또한 대학 초년생부터 수학과 이론 물리학에 매력을 느꼈다. 허나, 러셀이 수학적 추론에서 느꼈던 미적 쾌감을, 포퍼는 음악을 통해 보다 절실하게 감응할 수 있었고, 스스로 “음악은 내 삶에 있어 주된 테마였다”고 고백한다. 특히 베토벤과 바흐의 음악을 비교하면서, 음악을 자기표현의 도구로 사용한 베토벤보다 기꺼이 자기 작품의 하인이 되고자 했던 바흐에게 더 큰 호감을 밝히는 대목은 그의 엄밀한 학문적 기질을 드러내는 부분으로 읽힌다.

러셀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풍 탓에 칸트와 헤겔 관념론의 세례를 받았으나, 1898년 무어와 함께 지적 반란을 일으키고, 일원주의 이론과의 대결을 시작한다. “일원주의는 진리성을 정합성에 의해서만 정의한다. … 다른 진리와 독립되어 있는 진리는 전혀 없으며 개개의 진리는 그 표현에 잘못된 추상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완전하게 진술되면 결국 우주 전체에 관한 완전한 진리로 밝혀진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스스로 ‘논리 원자주의’라고 이름 붙인 러셀의 철학적 입장에서 보면 옳거나 그르다는 속성을 갖는 것은 일차적으로 신념들이고 파생적인 문장들이었다. 그리고 신념은 ‘사실들’과의 대응을 통해 검증돼야만 진위를 판가름할 수 있는 것이었다.

러셀은 또한 실용주의와도 대립각을 형성했다. “내 생각과 실용주의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 즉 실용주의는 신념이 어떤 종류의 ‘결과’를 일으키면 옳다고 판정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나는 경험적 신념이 어떤 종류의 ‘원인’을 가진다면 옳다고 판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러셀이 보기에 실용주의는 진리를 단지 ‘믿어서 수지맞는 모든 것’으로 정의한 것에 불과했다. 이를 테면 독일이 만약 승리했다면, 실용주의자들은 나치당의 신조를 실용적으로 ‘옳다’고 큰 소리로 환호하며 받아들여야 할 거라고 러셀은 반박한다.

‘정열의 회의론자’와 ‘닫힌 사회의 천적’


이처럼 러셀이 헤겔로부터 연원한 일원주의와 대결했다면, 포퍼 역시 헤겔의 역사철학을 도입한 마르크스를 비롯해 프로이트, 아들러 등을 진정한 과학적 태도를 결여한 독단적인 ‘본질주의’ 혹은 사이비 과학으로 규정하고 거부했다. 그 대신 포퍼는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나누는 기준으로 ‘반증가능성’을 제시했다. 러셀을 정신적 아버지로 둔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경험적 관찰을 통한 검증가능성은 포퍼가 보기에 여전히 흄의 귀납의 문제를 떠안고 있는 이론에 불과했다. 즉 귀납을 통한 검증은 단칭적 진술과 보편적 이론 간의 논리적 관계를 성립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러셀과 포퍼 둘 다 비록 건조한 인식론의 문제에 매진했지만, 그들이 현실과 괴리된 추상의 세계 안에서만 떠돈 것은 아니었다. 러셀은 멍청한 장군들 탓에 솜므 전투에서 학살당하기 위해 군대 수송열차를 타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쑤시듯 아플 정도로 동정심을 느끼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내가 관념들의 추상 세계에 관해 가졌던 모든 야심에 찬 생각들은 힘없는 것으로 보였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엄청난 고통에 비추어 볼 때 오히려 하찮은 것으로 보였다”고 회고한다. 그 후 그는 반전, 반핵을 비롯한 활발한 실천 활동을 통해 인간의 구체적 고통을 줄여가는 데 앞장선다.

포퍼 또한 열일곱 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직전 경찰의 총에 의해 젊은 사회주의자들이 빈에서 피살되는 사건을 계기로 유토피아주의 아래 희생되는 개인들의 고통으로 충격과 두려움에 부딪치게 된다. 그 후 그는 평생을 反마르크스주의자로 살면서 점진적인 사회공학을 정치철학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포퍼는 “추상적인 선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자신의 충고를 이론적으로 스스로 구현하고자 했던 셈이다.

그들은 이사야 벌린의 분류대로라면, ‘하나의 큰 것-앎의 문제-을 알고 있는 고슴도치’형 지식인에 속할 테지만 그보다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여우’의 피를 타고난 고슴도치들이였다. ‘러셀의 철학’이라는 미완의 원고를 남긴 알랜 우드는 러셀을 ‘철학이 없는 철학자’라고 부르면서 사상사에 남긴 그의 광범위한 지적 영향력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포퍼의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한 인물 중 한 사람인 브라이언 매기는 “인간의 주요 사유 가운데 포퍼의 저술에서 미처 다루지 않은 것을 찾기가 오히려 힘들 정도다”고 말한다. ‘정열에 찬 회의론자’ 러셀과 ‘닫힌 사회의 천적’ 포퍼, 그들의 사유의 걸음을 복기해보자.        

김창한 객원기자 ha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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