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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번역·소개된 마르크스 원전은 ‘유물사관요령기’”
“‘최초로 번역·소개된 마르크스 원전은 ‘유물사관요령기’”
  • 교수신문
  • 승인 2008.04.14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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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_ <역사와 현실> 기획-21세기 초 서구사상의 수용과 변용

한국역사연구회(회장 도면회 대전대 교수)가 최근 내놓은 <역사와 현실> 제67호의 흥미로운 기획이 눈길을 끌고 있다. ‘21세기 초 서구사상의 수용과 변용’을 주제로 이태훈 연세대 강사의 「1920년대 초 신지식인층의 민주주의론과 그 성격」(이하 ‘민주주의론’), 허수 동덕여대 연구교수의 「1920년대 초 <개벽> 주도층의 근대사상 소개양상」(이하 ‘근대사상’), 박종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의 「1920년대 초 공산주의 그룹의 맑스주의 수용과 ‘유물사관요령기’」(이하 ‘요령기’)를 한데 묶은 기획이다.

이번 기획이 흥미로운 것은 일제의 지배방식이 ‘문화정치’로 전환하면서, 이 합법공간에서 당대 지식인이 현실의 간극을 넘어설 수 있는 사상의 지도를 제국 ‘일본’을 통해 가져와 자기화하는 ‘방식’에 방점을 쳐서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실증적 접근이 거둘 수 있는 성과 측면에서 마르크스 원전의 국내 최초 소개 저작을 확정한 것도 시선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하다.

<역사와 현실>의 이번 기획의 전체상은 이태훈 강사의 ‘민주주의론’에서 읽어낼 수 있다. 그는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신지식인층이 대정 데모크라시의 민주주의론을 호흡하고, 이를 조선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구체적 현실과의 접점을 찾지 못해 결국 사상적 분화를 경험하게 되는 과정을 복기해냈다.

그에 의하면, 이들 신지식인층이 들고 나온 대정 데모크라시 민주주의론은 역설적이게도 일제 지배권력에 대항하며, 조선인 사회도 통합하겠다는 자신들의 야심찬 기획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였다. 이 시기의 데모크라시론은 “국가에 대한 사회의 일차성을 확인하면서, 자산계급 이기주의 억제와 사회적 덕성의 함양을 통해 사회의 조화와 통합을 추구한다는 사회민주주의적 성격이 강한 것”이었는데, 바로 여기서 일본 유학생들은 국가와 개인을 매개하는 단위로서 ‘사회의 독자성’에 주목함으로써, 조선인 사회가 독자성을 가진다는 논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들은 개조론의 유행 속에 민주주의를 국제, 국내 문제를 아우르는 새로운 미래사회의 총체적 논리로 이해했으며, 이러한 총체적 논리 속에 내적으로 조선사회를 통합하고 외적으로 식민지 지배를 원리적으로 비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東亞日報>, <開闢>, <靑年>, <新韓民報> 등에 민주주론과 관련된 글을 게재한 것이나, 루소와 같은 민주주의의 고전사상에서 링컨의 민주주의론, 영국노동당의 사회민주주의론 등을 소개한 것도 이런 인식 위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민주주의를 단순히 인민의 정치참여론이 아닌 자유와 평등을 아우르는 사회체제론임을 강하게 강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신지식인층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무기였던 민주주의론 수용은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논자인 이태훈 강사는 두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 실천 주체를 ‘우리’라고 모호하게 설정함으로써, 조선사람 내부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했고, 둘째, 더 근본적으로 조선의 현실이 사회적 평등이 제기될 만한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전제했다는 것. 이런 한계는 1910년대 이래 신지식인층이 강조해온 국가 대 ‘사회’라는 구도가 갖는 한계의 노출이기도 하다. 

이러한 약점 속에 민주주의론은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목표로 한 현실적 실천론으로 발전되지 못한 채, 현실 정치 운동의 분화 속에서 부르주아 정치세력의 정치참여를 주장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론으로 성격이 변화했다는 것이 논자가 읽어낸 1920년대 초 신지식인층의 민주주의론의 요체다.

“<개벽>주도층, 능동적 개입, 합리적 선택해”
반면 허수 교수와 박종린 교수의 논문은 디테일한 접근으로, 기획의 세부 밑그림이랄 수 있다. 허수 교수는 ‘근대사상’에서 <개벽>지에 소개된 서구근대사상의 흔적을 실증했다. 그는 <개벽> 1920년 6월 창간호부터 1921년 하반기까지를 대상으로 인용처를 확인할 수 있었던 6인의 인물, 9편의 글을 중심으로 분석함으로써, <개벽> 주도층이 니체, 루소, 제임스의 소개에는 『近代思想十六講』[나카자와 린센(中澤臨川:1878~1920)과 이쿠타 초코(生田長江: 1882~1936)가 공동편자]을, 엘렌 케이, 러셀, 카펜터의 소개에는 『社會改造の八大思想家』[이쿠타 초코, 혼마 히사오(本間久雄:1886~1981)가 편집]를 저본으로 활용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개조론을 포함한 서구 근대사상을 일본 사회에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요약과 정리에 있었던 앞의 두 책을 저본으로 삼았지만, <개벽> 주도층은 ‘기계적 번역과 추종’으로 흐르지 않았다. 허 교수의 평가는 이렇다. “주어진 조건의 제약 위에서나마 <개벽> 주도층은 서구 근대사상 소개과정에서 식민지 조선의 제반 상황, 소개자 자신들의 처지 등에 비추어 ‘능동적인 개입’과 ‘합리적 선택’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종린 교수의 ‘요령기’ 역시 매우 구체적인 독법을 제시한다. 그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비판을 위하여』서문이 어째서 빈번하게 소개됐는지를 확인해냄으로써, 1920년대 초의 제한적이나마 완화된 공간에서 사상의 호흡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됐는지를 복원해냈다. 박 교수의 문제의식은 ‘1920년대 초 조선에 수용된 사회주의 사상 특히 마르크스주의가 언제 누구에 의해 왜 수용됐는가 하는 문제와 그 수용과정에서 무엇이 강조됐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된다.

박 교수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정치경제학비판을 위하여』 서문의 일부가 국내에 최초로 소개된 것은 1921년 3월과 4월이다. 사회혁명당의 윤자영과, ‘조선공산당’의 신백우가 번역 소개했다. 저본은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1870~1933)가 『정치경제학비판을 위하여』 서문을 소개하고 해설을 붙인 글이다. 그는 일본 사회주의운동의 여명기부터 헤이민샤(平民社)와 일본사회당 등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번역은 서문 전체를 완역한 것은 아니고, 일부만을 ‘유물사관요령기’라는 이름으로 발표했을 뿐이다.

사카이 저본으로 윤자영·신백우가 번역

그렇다면, 왜 마르크스주의 원전 가운데 유독 ‘유물사관요령기’만이 여러 차례 번역돼 여러 매체를 통해 집중적으로 소개됐을까. 박 교수는 이를 “이들이 ‘유물사관요령기’를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며, 그 진행은 사회구성체의 계기적 발전에 의해 결국 인류의 前史인 자본주의가 극복되고 사회주의가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것으로 독해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그의 말을 더 인용해보자.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이러한 ‘유물사관요령기’는 식민지 조선에서 제국주의 일본을 驅逐하는 민족해방과 사회주의 건설을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로 인식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윤자영과 신백우가 『정치경제학비판을 위하여』 서문의 ‘유물사관요령기’를 번역한 이유인 것이다.”

<역사와 현실>의 이번 기획은 지난 2005년 역사학대회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심화한 것이다. 그동안 역사학계에서 한국의 근대화를 보는 시각은 내적 조건과 동력에 주목한 것이었다. 이번 기획은 ‘외부의 자극’을 좀 더 구체적으로, 실증적으로 이해하려했다는 점, 또 1920년대가 총독부의 문화정치가 시작된 시기라는 점, 일본을 통해 서구 근대가 우리에게 어떻게 투영됐는가를 조망했다는 점에서 논의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으로 읽힌다.            

김혜진 기자 khj@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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