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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으로서의 독서’가 유행하는 시대
‘방법으로서의 독서’가 유행하는 시대
  • 교수신문
  • 승인 2008.04.14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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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서평_ 독서법 다룬 저작들 읽기

책에 관해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이런 규칙을 누구나 지켜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읽지 않은 책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말하지 말아야 하고, 글 한 줄도 써서는 안 된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침묵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예컨대 고교 시절 『죄와 벌』을 읽다가, 쏟아져 나오는 러시아 사람들 이름에 기가 질려 책을 덮은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죄와 벌』을 읽지 않은 필자 같은 사람은 『죄와 벌』에 관해 침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파리 8대학교 문학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 피에르 바야르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여름언덕)에서, 반드시 어떤 책을 읽어야만 그 책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잘 알지 못하거나 얘기조차 들어보지 못한 책에 대해서도 견해를 제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없다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을 할 수밖에 없으며, 중요한 것은 “책의 개별성을 넘어 그 책이 다른 책들과 맺는 관계들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요컨대 특정의 책 한 권 한 권이 아니라 책들 사이의 소통과 연결선이 중요하다는 것.


사실 책과 독서에서 ‘소통과 연결선’이란 한 권의 책을 읽는 가운데에서도 매우 중요하며, 이미 모든 독서인이 어느 정도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책 속 단 한 줄의 문장이라도 그 문장은 무수히 다른 책들 및 문장들과 差延하며 交織돼 있는 게 아니던가. 이러한 책과 독서의 진실은 이른바 하이퍼링크에서 더욱 분명하게 구현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피에르 바야르의 독서론은 이른바 정보 리터러시(information literacy)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셈이다. 예컨대 노우웨어(know-where), 즉 유의미한 지식과 정보를 어디에서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아는 것이 곧 ‘아는 것’이기도 하다는 정보사회의 새로운 지식론과 바야르의 독서론은 일맥상통한다.


한편 독일 작가 마틴 발저는 『어느 책 읽는 사람의 이력서』(미래의 창)에서 “글이 남긴 인상을 기억하는 것이 그 글의 의미를 해석하고 뜻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욱 값지다”고 말한다. 예컨대 발저는 젊은 시절 바이런을 읽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가 떠올리는 것은 당시 읽었던 바이런의 詩句가 아니다. 오히려 시를 읽을 때, 그늘을 드리워주었던 마당의 나무, 머리 위의 하늘, 마음에 차 있던 생각, 요컨대 시를 읽는 한 순간을 둘러 싼 모든 것들이다.


그러한 발저가 자신의 작품을 읽고 그 의미를 묻거나 나름의 해석이 맞는지 물어오는 학생들의 편지에 이렇게 답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나는 특별한 뜻을 두지 않았다. 독자 개개인이 스스로 느끼고 독서를 경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권리이다.” 발저는 선생님들에게도 이렇게 부탁했다. “선생님이 두고 있는 의미에 얼마나 근접했는가에 따라 점수를 주지 말고, 학생 자신의 독서 경험을 전달하는 능력을 점수에 포함시켜 주십시오.”


발저는 계속해서 독서의 주관성 혹은 주체성을 강조한다. “책읽기는 음악을 듣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 같다. 거기에서 악기는 우리 자신이다. 우린 연주한다.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횔덜린의 악보에 맞춰 연주하는 것이다.” “책이 우리의 내면에서 활동할 때 우리는 조금도 수동적이지 않다. 책에서 아픔과 불안이 나타날 경우, 그것이 우리가 경험했던 아픔과 불안과 더불어 인생에 자극을 주지 못하면 책은 단지 종이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피에르 바야르의 독서론을 ‘사이와 연결의 독서론’, 마틴 발저의 독서론을 ‘주체성의 독서론’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두 입장은 서로 배척하기보다는 오히려 깊이 상통한다. 역시 단순화의 위험을 감수하고 말하면 독서에서 사이를 연결하는 주체는 독서인 자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바야르와 발저의 독서론이 각각 프랑스와 독일의 지적 풍토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하다는 점이다. 요컨대 두 입장이 깊은 지점에서는 근본적으로 상통하면서도, 바야르의 입장이 이른바 상호텍스트성에 보다 주안점을 두는 데 비해, 발저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주체성을 보다 강조한다.


다음으로 일본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문학동네)이다. 이 책은 앞의 두 책에 비해 훨씬 더 실용적이다. 작가 자신의 독서 경험을 바탕으로 이른바 슬로 리딩, 즉 단 한 권을 읽더라도 책 속에 숨겨진 수수께끼와 비밀을 속속들이 발견하고 즐기기 위한 방법을 안내한다. 히라노의 슬로 리딩이 추구하는 바는 저자의 의도 그 이상의 흥미 깊은 내용을 독자 스스로 자유롭게 발견해내는 誤讀力을 기르는 것이다. 독자 나름의 이른바 창조적 오독이야말로 독자의 내면을 진정으로 성장시킨다는 것.


그렇다면 히라노가 말하는 슬로 리딩이란 단순히 책을 천천히 읽는 시간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책을 읽는 속도, 즉 시간 요소에 구애받지 않는 독서라고 하는 편이 낫다. 구체적인 방법을 보면, 책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때 주저 없이 이미 읽은 앞부분으로 되돌아가는 것, 밑줄을 긋고 표시를 하는 것 등이 있다. 이러한 슬로 리딩은 작자의 의도를 완전히 무시하고 언제나 오독력에만 의지하는 것과도 다르다. 무슨 책을 어떻게 읽어도 늘 독선적인 결론만 이끌어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독선적인 책읽기는 창조적 오독과 거리가 멀며, 독자로서의 가능성을 스스로 편협하게 만들 뿐이다.


 한편 책 읽기와 책 쓰기에서 공히 달인이라 할 만한 사람, 바꿔 말하면 지식정보의 입력과 산출에서 공히 달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으로 다치바나 다카시가 있다. 그는 이른바 논픽션 분야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머리와 발로 함께 쓰는 책, 다시 말해서 현실 문제에 착안해 직접 발로 뛰며 취재와 인터뷰를 하고 관련 도서 자료를 광범위하게 섭렵해 쓰는 책에서 뛰어난 저자다. 그런 다치바나가 논픽션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계기를 그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 되는 100권』(청어람미디어)에서 엿볼 수 있다.


“문춘(문예춘추)에 입사하자 한 선배로부터 ‘자네는 어떤 책을 읽나’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이것저것 답변을 하고 보니 그게 온통 소설뿐이지 뭡니까. 그러자 그 선배가 ‘그런 것만 읽어선 안 되지. 논픽션도 읽게’라고 했어요. 엄청난 양의 문학서를 읽음으로써 남 못지않은 문화인입네 하고 있었지만, 실상 나 같은 문학 편식자는 이 세상에 무수히 존재하는 가치 있는 책의 태반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지요.”


저널리스트로서의 직업적 필요성과 광범위한 지식에 대한 호기심 및 지식욕이 결합된 결과가 바로 다치바나의 지금까지의 지적 행로였다. 그런 다치바나의 독서 편력이 기록된 이 책을 읽어보면, 문필가적 상상력이나 창조성이라는 게 결코 골방에서 홀로 피워 문 담배 개피 수효에 비례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 수 있다. 다치바나의 말을 빌리면 ‘인간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환영 같은 창작물의 세계는 시시하고 밑바닥이 너무 얕다.’ 물론 다치바나의 이러한 입장을 문학적 상상력 일반에 대한 질타라고 보기는 힘들며, 오히려 진정한 상상력이란 딱딱한 현실과 광범위한 지식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바꿔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저자인 히라노와 다치바나의 독서론은 매우 실용적이어서 ‘방법으로서의 독서’에 보다 충실한 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견강부회의 위험을 감수하고 말하면, 유달리 다양한 실용서가 발달한 일본의 출판 및 독서 풍토를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히라노와 다치바나의 독서론에서도 우리는 일종의 독서인간학 같은 걸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다치바나의 경우, 독서하는 인간은 결국 좀 더 많이 좀 더 정확하게 인간과 세계를 알고 싶다는 지적 호기심을 지닌 인간이다. 책의 우주가 있다면 그것은 결국 호기심을 동력으로 삼는 우주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정확하게 독서론으로 보기는 힘들 것 같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매우 진지한 독서론의 범주에 드는 책이 있다. 미국 문학비평계의 거장 헤럴드 블룸의 『지혜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루비박스)다. 2003년 9월 스티븐 킹이 전미도서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블룸은 이렇게 말했다. “싸구려 모험 소설이나 쓰는 작가가 이 상을 받게 된 것은 우리 문화 수준이 낮아지고 있다는 증거다.” 이 말에서 블룸이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 그는 서양 ‘주류 정통’ 문학 및 사상 전통의 가치와 의미를 매우 중시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책을 읽고 가르치는 이유에 관해 단지 세 가지 기준만을 설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미학적 훌륭함, 지적 능력, 그리고 지혜다. 사회적 압박이나 저널리스트 사이의 유행 때문에 한동안 이런 기준이 별로 주목받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단순한 시대물들은 오래가지 않는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아름다움과 진리와 통찰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블룸의 책 차림표가 플라톤과 호메로스,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 몽테뉴와 프랜시스 베이컨, 새뮤얼 존슨과 괴테, 에머슨과 니체, 프로이드와 프루스트, 토마스 복음서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성경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고전과 철학 속에 담겨 있는 깊은 지혜를 천착하는 것이 블룸의 독서 목표인 것이다. 浮薄한 대중문화의 시대에 이러한 전통적인 正典의 가치와 의미를 재확인하고자 하는 불룸의 태도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독서라는 행위가 지녔던 진정성과 어떤 숭고함 같은 것을 회복시킨다는 측면에서 보면, 블룸의 진지함은 시대착오적이기보다는 고전 르네상스라는 차원에서 인정할 수 있을지 모른다.


최근 들어와 독서에 관한 책들이 전에 없이 자주 출간되는 현상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독서의 목적과 방법이 예전보다 훨씬 더 다양해지고, 책이라는 오래된 매체의 의미와 위상이 흔들리는 현실과 상관있는 게 아닐까. 요컨대,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셈이다.

표정훈 / 출판평론가

필자는 서강대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출판평론가·번역가·작가로 활동 중이다. 『탐서주의자의 책』, 『나의 천년』,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등의 저서가 있다.


■ 『어느 책 읽는 사람의 이력서』 마틴 발저 지음, 독일, 안인길 옮김, 미래의 창, 2002
“책을 읽는 사람은 언제나 책을 통해 책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프루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책은 시각적으로 확대하는 도구여서 독자는 이 도구의 도움으로 자신의 인생을 읽을 수 있다.’ … 우리는 책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가지고 뭘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 지음, 프랑스, 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2008
“교양을 쌓은 많은 이들이 비독서자라면, 역으로 말해 많은 비독서자들이 교양인이라면, 그것은 곧 비독서가 독서의 부재가 아님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수히 많은 책들 속에 침몰당하지 않기 위해 그 책들과 체계적으로 관계를 맺고자 하는 하나의 진정한 활동이다.”

■ 『지혜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해럴드 블룸 지음, 미국, 하계훈, 루비박스, 2008
“나는 책을 읽고 가르치는 이유에 관해 단지 세 가지 기준만을 설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미학적 훌륭함, 지적 능력, 그리고 지혜다. 사회적 압박이나 저널리스트 사이의 유행 때문에 한동안 이러한 기준이 별로 주목받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단순한 시대물들은 오래가지 않는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아름다움과 진리와 통찰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되돌아 온다.”

■ 『책을 읽는 방법』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일본, 김효순 옮김, 문학동네, 2008
“이 책에서 말하는 독서란, 단순히 피상적인 지식으로 인간을 꾸며주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그 사람을 바꾸어 사려 깊고 현명하게 만들며 인간성에 깊이를 더해주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천히 시간을 들이면 독서는 즐거워진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라고 할 수 있다.”

■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일본, 박성관 옮김, 청어람미디어, 2008
“인간이 살아가는 한 그리고 인간이 지적인 욕망을 상실하지 않는 한, 인간은 ‘더 책을 읽고 싶다’, ‘새로운 책과 더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더 읽고 싶은 책이 계속해서 나타난다면 바로 그 사실 자체가 지적인 인간에게 있어서는 살아 있음의 증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일 그 욕망이 사라진다면 그 사람은 이미 지적으로 죽었다고 해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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