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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의 운용법칙 깨져”…“폭력의 후원자는 서구 자신”
“국제관계의 운용법칙 깨져”…“폭력의 후원자는 서구 자신”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1.1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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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13 11:17:30
9·11 미국테러사건을 두고 국제정치학자와 문화인류학자가 한자리에 머리를 맞대고 의미를 캐물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했지만, 둘은 이윽고 결론에서 함께 만났다.

국제정치학자는 “‘9·11 뉴욕’은 문명충돌이란 시각에서 해석할 사건이 못되”며,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서는 강대국의 절제와 관용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럼 문화인류학자는? “소수의 폭력적인 성향의 배경에도 다른 저항의 수단을 앗아가버린 서구 자신의 책임이 엄연히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며 특히 우리의 경우, “13억 55개국에 달하는 아랍-이슬람권을 끌어 안지 못하는 세계화란 결국 허구이고 반쪽 세계화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지난달 14일 이화여대 인문대학 교수포럼, 조용한 자리에서 나온 주장이다. 조명이 휘황찬란한 학술대회장도, 더구나 세미나 자리도 아니었다. 현상을 본질의 측면에서 탐색해가는 이 호기심많은 학자들이 모인 곳은 고즈넉한 포럼 자리였다. 오히려 신선해보인다.

판도라의 상자, 최후의 심판

9·11 미국테러사건을 두고 국제정치학자인 구대열 이화여대 교수(정치외교학과)는 발제문 ‘9·11-뉴욕, 문명충돌론?’을 통해 저널리즘이 부풀린 ‘문명충돌론’의 거품을 걷어내고 사건의 본질을 명료하게 이해하려 했다. 구 교수는 이 사건을 두고 ‘9·11 뉴욕’이라고 명명했다. 이 순간 구 교수는 1901년에 죽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을 연상했다고 한다. “한 세기 이상 국제정치의 지배세력이었던 대영제국의 쇠퇴와 이에 따른 국제질서의 변화를 상징”하는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세기를 뛰어넘어, 21세기 11월 “미국의 힘과 자본주의적 세계질서를 상징하는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고 미국의 ‘최후의 심판일’(doomsday)을 연상”하는 것에는 어떤 함의가 깃들어 있을까.

구 교수는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을 가차없이 비판했다. 한마디로 학문적인 엄격한 기준이 없고 자의적이라는 지적이다. 국가들간의 충돌은 대부분 국가이익의 충돌인데 이를 애써 ‘문명의 충돌’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개념의 불명료함과 애매성을 증대했다는 것이다. 국제정치학적 측면에서 볼 때, 헌팅턴의 문명충돌 이론은 새로운 것도 아니라고 꼬집었다. 구 교수의 논지에 따르면 헌팅턴은 너무 쉽게 대외정책의 기초가 국가이익에 있음을 간과했고, 그의 말처럼 국가의 상징성이 줄어들고 있지도 않다. “결론적으로 국제적 갈등은 문명이라는 요소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각국이 처한 사회·경제적, 정치적 상황에서 야기되는 것이며 이것이 국제적 환경과 합치면서 확대되는 것이다.” ‘9·11 뉴욕’은 이와 같은 맥락에 서 있다.

이제 구 교수가 던진 물음, 즉 “9·11이 과연 세계사에서 ‘애노우-다머니’(Anno Domini)와 같이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수 있을까”로 되돌아가보자. 그는 “9·11 뉴욕은 새롭고 밝은 미래상이 아니라 암울한 인류의 장래를 예견케 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 같은 사건”이라고 호명한다. 이 사건은 국제사회의 게임의 법칙을 파괴했으며(생물학 무기인 탄저균 공세), 국제관계의 운용방식(mode of operation)에서 상상의 영역에 속하는 믿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게 했다. “지금까지의 국제관계는 세력 균형 체제이건, 양극체제이건, 최근의 미국의 단일 헤게모니 체제이건 관계없이 ‘국가들’ 간에 다른 국가의 행위는 저지할 있는 수단을 보유한 가운데 서로 견제하고 협력하고 양보하면서 운용돼 왔다. 이것이 곧 외교다.” 그런데 이 운용방식에 틈이 벌어졌다. “‘9·11 뉴욕’을 계기로 국가가 아닌 개인이 이 능력을 갖추어 국가를 설득하고 나아가서 ‘협박’할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

강대국의 책임 그리고 절제

구 교수는 ‘9·11 뉴욕’ 이후 시작된 미국과 아프카니스탄의 전쟁을 더 언급했지만, 현실의 변화는 구 교수의 예측보다 앞섰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론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9·11 뉴욕’은 문명충돌이란 시각에서 해석할 사건이 못된다. 과거 강대국들은 문명이란 이름아래 제멋대로 행동해 왔는데, 오늘날에도 이러한 행태는 변하지 않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국제사회에서 정의니 평화니 하는 추상적인 용어들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국제정치에서 강대국이란 권리와 책임을 동시에 갖는다.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서는 강대국의 절제와 관용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현실주의자의 모습을 한 국제정치학자가 관용과 자비에 의한 분쟁의 해결, 강대국의 절제와 관용을 주문하는 광경이란 다소 예외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슬람문화에 밝은 문화인류학자는 9·11테러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이희수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는 ‘미국과 아랍 50년 갈등의 응어리’라는 발제문에서 미국 편향적인 우리 인식의 근원적 수정을 주문하는 한편, 이슬람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의 투시도를 제시했다.

이 교수는 먼저 두 가지 측면에서 9·11 미국테러사건이 “참으로 다행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며 그 의미를 찾았다. 첫째, 이번 사건으로 무소불위에 가까운 미국의 패권주의 정책이 다문화존중과 세계를 끌어안는 방식으로 변하지 않으면, 그동안 미국에게 눌려 고통받아 온 지구촌 빼앗긴 자들의 응징이 본격화 될 것이라는 위험을 미국 국민들이 분명히 인식하게 됐다는 것. 둘째, 우리 사회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반쪽 세계화의 실상을 파악하고, 또 다른 반쪽의 세계에 진지하게 눈을 돌리게 됐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거대한 이슬람세계, 연구인력 태부족

사실 이 교수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지난 50년간 이슬람세계에 눈 어두웠던 우리 인식 그 자체였다. “세계 4대 고대문명권의 3개(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가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고, 기독교나 힌두교, 불교보다도 많은 13억이라는 세계 최대의 종교인구를 갖고 있는 세계, 유엔에 가입하고 있는 정회원국만 55개에 달하는 거대한 문화권을 우리는 지난 50년간 무지 속에 방치해 왔다”는 것. 그러니 이슬람세계에 무지할 수밖에. “그 거대한 문화권에 대한 국가 전략차원의 인재풀의 수준이 겨우 몇사람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결과가 나타나게 됐을까.”

이 교수는 그 까닭을 다섯 가지로 요약해냈다. 첫째, 이슬람사회를 들여다볼 우리 시각을 갖지 못했다. 둘째, 미국중심의 언론과 정보를 통해 이슬람을 인식해 오는 과정에서 오류와 편견이 구조적으로 양산됐다. 셋째, 일부 급진 이슬람 과격분자들의 테러와 폭력행위를 전체 이슬람의 모습으로 이미지 메이킹해 가는 서구의 홍보전략을 거의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있는 문제.(급진조직들은 이슬람권내에서 거의 대중적 지지기반을 상실하면서 집권가능성이 희박한 5% 미만의 극소수다.) 넷째, 이슬람과 아랍을 동일시하는 초보적인 상식의 오류가 지식사회에까지 만연해 있다. 다섯째, 이슬람은 서구가치체계와는 달리 정교일치 사회구조를 갖고 있다. 종교가 삶에 완전히 녹아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정교분리의 서구적 시각으로 보면 답답하고, 전근대적이고 후진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어떻게 아랍사회, 이슬람 세계와 다시 함께 살 수 있을까. 이 교수가 궁극적으로 고민하는 부분은 바로 이 점이다. 이슬람이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변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그렇게 쉽게 이슬람의 관습이 변질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는 진단했다. “서구가 과대포장하는 폭력적이고 급진적인 이슬람 원리주의는 이슬람 세계에서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게 이 교수의 지적이다. “소수의 폭력적인 성향의 배경에도 다른 저항의 수단을 앗아가 버린 서구 자신의 책임이 엄연히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보전에만 급급하는, 한 공동체의 고유한 사상과 가치틀을 짓밟고 자신의 것만이 지고선이라 생각하는 독선이 바로 이슬람 급진주의의 최대 후원자인 셈”이라는게 이 교수의 진단.

이제 더불어 살 때가 됐다. 이 교수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제 서구 강대국이 양보해라, 빼앗긴 자들을 위해 그들의 돌파구를 마련해 줘라, 이것이 바로 공존의 기틀을 형성하는 것이다.

아랍, 미국에게 던지는 절규

“극단적인 저항에서 상대적인 비판과 절충의 단계로 진전할 수 있는 모티브”는 이미 미국사회에서 폭넓게 감지되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미국이 테러의 원인이 됐던 팔레스타인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라든가, 대규모의 경제지원을 통해 극심한 실업율과 경제난에 고통받고 있는 팔레스타인 아랍인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 주는 일에 매달릴 것 같다는 분석이 그렇다.

과연 “세계를 일방적으로 호령하고 위협하는 외교에서 빼앗긴 지구촌의 다양한 약자를 끌어안는 진정한 정책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 교수가 포럼의 끝에 던진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힌다. “이 시점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풍토와 시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세계화라는 절대절명의 명제를 강조하면서 언제까지 서구언론이 자기들 구미에 맞게 양념된 정보만을 취하면서 우리 바깥의 문제들과 때로는 우리 자신의 문제까지도 그들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수용하고 있는 무지와 위험상태를 계속할 것인가.” 포럼이 남긴 무거운 문제의식이었다.
최익현 기자 ihchoi@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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