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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술은 가늠할 수 없는 도덕적 힘을 발휘한다
역사서술은 가늠할 수 없는 도덕적 힘을 발휘한다
  • 김기윤 / 한양대 강사·과학기술사
  • 승인 2008.03.31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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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제국주의』 앨프리드 W.크로스비 지음 | 안효상·정범진 옮김 | 지식의 풍경 | 2000 | 절판
『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 정병선 옮김 | 이후 | 2008 | 2만3천원

작년 가을에 시작된 생태학연구회의 회원들이 지난겨울에는 남대문 옆 상공회의소 건물 지하 회의실에서 모였다. 계획했던 내용 외에 회원들을 사로잡은 화제는 태안 해안의 기름유출 사고였다. 하지만 바로 옆 숭례문 화재 현장에 들렀던 사람들은 그곳에서 목격한 사건으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화재 현장 주변에서 말을 잃고 서성이는 사람들 뒤쪽에서 노숙자로 보이는 두 남자가 술에 취해 쉴 새 없이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타 버린 숭례문을 위해 굿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 “꼴값하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사람이 굶어 죽어가도 본체만체 할 놈들이 무슨 불탄 대문을 놓고 굿을 하느냐는 이야기였다.

아무도 이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려 애쓰는 듯 싶었으며, 나 역시 이들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이들이 입고 있던 울긋불긋한 점퍼와 주말 저녁 늦은 시간에 서울역 지하도를 십열종대로 가득 채우며 쪼그려 앉은 채 저녁밥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번쩍이는 상공회의소 건물 쪽으로 길을 건넜다. 그런데 그 옆 마당에서 역시 울긋불긋한 점퍼 차림을 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20열종대로 앉거나 누워서 농성 중이었다. 비정규직 보호법으로 인해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크로스비라면 우선 자신의 집을 잃고 공공건물에 방화를 하는 노인, 그에게 동정을 느끼는 노숙인, 그리고 비정규직 직장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그리고 역사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생물학적 시각에서 설명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을 것이다. 데이비스라면 이들이 도태된다고 해서 가난이 사라지지는 않으리라고, 아니 이들이 도태되는 사회제도는 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만들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칠백억 값이 나가는 아파트를 지어 부를 창출할 수 있다면, 그 곳에서 텃밭을 가꾸며 여생을 보내고 싶어 하는 한 노인을 칠천만원의 보상금으로 몰아내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태안 해안의 수산업 총생산량이 한 회사 매출액의 수백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적시하는 입장과 맥을 함께한다. 크로스비는 그러한 유럽식의 즉 자본주의적 자유주의에 따르는 삶의 방식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것은 마치 귀화동식물이 새 터를 잡아가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데이비스는 그 과정에서 기후와 같은 자연이 일역을 담당하기는 하지만 결국 원 동인은 인간의 선택인데, 그 결과는 인류의 삶을 점차 더 비참한 것으로 만들어 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러 역사학자들이 1971년 출판된 『콜럼버스의 교환』을 전 지구적 자연환경의 변화상으로서의 구체적인 물질문화의 변화가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 주는 이정표를 만든 저서라고 평가했다. 그 책에서 크로스비는 콜럼버스 그리고 이어 유럽인들이 본격적으로 아메리카를 방문하면서 지구상에 살아가는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겪는 변화를 그렸다. 15세기 말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를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아메리카는 유럽인들 외에도 소·말·돼지 등 수많은 동물들, 그리고 천연두 등의 질병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유럽인들은 감자·옥수수·고구마 등의 식물들, 그리고 만연하게 될 성병을 만난다. 그 만남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 올바른 정치적 관점이 강조되던 분위기가 미만해 있던 1960년대에 대학에서 공부했던 크로스비는 콜럼버스 도착 당시 역사 속의 주변부였던 아메리카가 그리고 그 주민들이 중심부 유럽에 무엇인가 능동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정치적으로 올곧은’ 사회사학자였다. 그는 구세계가 아메리카에 남긴 어둡고 깊은 상흔에 비해 아메리카가 구세계에 전해 준 흔적이 비교적 미미하다는 자신의 결론을 아쉬워하면서, 구세계와 아메리카 사이의 교류가 전체적으로 보아 인류의 미래를 위해 그리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은 듯 하다고 진단하며 책을 마무리했다. 1971년 크로스비는 데이비스와 상당히 비슷한 시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1986년에 출판된 이 책 『생태 제국주의』에서 크로스비의 목소리는 15년 전에 출판된 『콜럼버스의 교환』에서와는 상당히 달라 보인다. 이제 그는 아메리카와 같은 주변부 인간이나 동식물이 역사 속에서 어떤 능동적인 역할을 해 왔는가를 살피지 않는다. 아메리카보다 작아서일까,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의 원주민들은 물론 동식물상은 유럽 문명권과의 조우를 통해 훨씬 더 완벽하게 파괴돼 버렸음을 그는 그 동안 확인했다. 그 지역은 현재 문자 그대로 새로운 유럽이 돼 있다. 이제 크로스비는 주변부 세계의 능동적인 역할을 찾는 시도를 포기하고, 어떻게 유럽인, 유럽문명과 유럽 동식물이 결국 세계로 퍼져 나가 여러 지역을 일종의 ‘네오유럽’으로 만들며 점유해 나갔는가를 살피는 데 주목한다. 따라서 두 세계 사이에서 일어났던 사건은 ‘교환’이 아니라 ‘제국주의’라는 표현을 통해 기술된다.

『콜럼버스의 교환』에서 크로스비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쇠락이 구세계로부터의 질병이었다는 결정론적 독해를 피하려 매우 애썼다. 이베리아인들의 거친 식민지 경영이 아메리카 여러 지역에서 원주민들을 말살하게 됐는데, 그 과정에서 구세계 질병의 상승작용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당시 그 책의 요지였다. 이제 『생태제국주의』에서 크로스비는 아메리카보다 더 작고 완벽하게 격리돼 있던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의 경우 이들 원주민의 절멸상태를 거의 전적으로 생물학적인 도태로 설명한다. 유럽인들의 진출에 기후나 그 지역 사회의 특징 역시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질병만큼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우리는 제국주의의 시대에 세계 각지의 황무지를 점유하려 각축을 벌이는 열강의 병사들, 선교사들 그리고 상인들의 모습을 익히 읽어 왔다. 하지만 한 세기가 지나도록 제 3세계의 거대한 빈곤층이라는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긴 후기 빅토리아 시대 제국주의의 무자비한 힘을 그리는 『빈곤의 역사』 서술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전율을 안겨준다. 이 책에서 데이비스는 백여 년 전 제국 특히 영국이 어떻게 인도를 지배하며 주민들을 수탈했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불공정한 협정과 정치적 요구를 통해 중국을 헤어날 수 없는 빈곤의 나락으로 몰아넣었는지를 극적인 사건들을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보여준다. 제국의 수탈과 부당한 협정은 그 자체로서 혐오스러운 역사적 사건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인도와 중국은 오랫동안 유지돼 왔던 사회경제 조직, 특히 빈곤을 견디어 낼 수 있는 도덕경제 체제를 상실했다. 물론 사유재산제도에 기반한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나 ‘근대적인’ 치수제도 역시 인도나 중국이 가뭄이나 기근에 대처해 오는데 필요했던 공유지를 없애고 유사시 서로를 돕는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 결과는 19세기 말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식량난과 집단 아사였으며 다음 세기로 이어질 거대한 빈곤집단의 확산이었다. 데이비스가 제시하고 있는 수많은 사례들, 기록들, 통계수치들은 빅토리아 시대 제국주의 정치와 경제가 세계의 주요 지역들을 초토화하고 만성적인 빈곤을 남기며 문자 그대로 제 3세계를 창조했다는 결론으로 독자들을 이끌어 간다.

데이비스가 이렇게 끈질기게 제국의 어두운 족적을 추적했던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1990년대에 많은 역사학자들은 제국이, 특히 영국제국이 참으로 세계를 초토화하려는 야만적인 의제를 가지고 있었는지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또 제국의 문명화사업이 진정 주변부 주민들을 불행으로 몰아넣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졌다. 제국의 정책 입안자들이 식민지를 착취해 빈곤의 나락으로 몰아넣을 것이 분명한 구체적인 정치적 의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가. 제국의 정책 수행자들, 예를 들어 인도에 근무하던 영국 관리들이 정말 대부분의 지역 농민들이 파산에 이르는 사태 속에서, 그리고 나아가 기아로 주민의 절반이 아사하는 사태 속에서 세금 징수와 식량 반출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는가. 아편전쟁 이후 쇠락의 징후가 분명해 보이던 청 왕조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것이 과연 제국의 의제였는가. 상당수의 역사학자들, 특히 경제사학자들이나 환경사학자들이 좀 더 세밀한 과거의 모습을 들추어내기 시작하면서, 의외의 결론들이 쏟아져 나왔다. 영국이나 프랑스 식민지 지역 주민들의 삶이 유럽인들과 접촉을 시작하기 전에 비해 결코 악화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식민지의 본국 관리들은 결코 세금을 짜 내고 자원을 수탈해 식민지를 황무지로 변화시켜 버리려는 의제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식민지 환경이나 자연자원이 너무도 급격히 피폐해지고 고갈돼 가는 모습을 살피면서 근대적인 의미의 환경 및 자연보호론을 설파하는 선구자가 되기도 했다. 이들 식민지에서 근무하던 관리나 의료인들이 열악한 상황을 개선하고자하는 노력 속에서 근대적인 공중위생 제도가 구체적인 모습을 갖춘 뒤 오히려 제국으로 역수입되기도 했다. 중국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의들이 이어졌다. 청 왕조는 이미 유럽인들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부터 왕조 초기의 왕성한 기운을 잃고 있었다. 19세기 후반 외세가 개입했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삶이 곤궁해 졌다거나 중국의 발전이 저해됐다는 통상적인 시각도 서양과의 비교를 통한 착시현상이다. 예를 들어, 청일전쟁 당시 청의 군사력 기술력은 아편전쟁 이후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일본을 앞선 정도였다. 이런 종류의 수정주의적 시각의 홍수 속에서 데이비스의 책은 제국주의적 의제의 부당함을 분명하게 확인해 주는 극적인 서술이 될 것이었다.

캘리포니아 남부 도시지역의 역사와 사회구조가 만들어 내는 계급과 인종관이 지역 사람들의 삶에 투영돼 있는 방식이나 이들이 제 3세계를 읽는 방식 등을 주의깊이 살폈던 그가 세계의 도시들로 시야를 확장했을 때, 데이비스는 세계 경제의 오랜 호경기를 마감하는 기근이 19세기 후반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진행됐음에 주목했다. 역사학계에서는 한동안 논란의 대상이 됐던 ‘17세기 위기이론’이 그 즈음에는 거부할 수 없었던 사실로 받아들여지며 회자되고 있었다. 17세기 유럽에서 종교 갈등, 국가 간 분쟁이 만연하게 되는 배경에는 17세기 ‘소빙하기’의 추운 기후와 그로 인한 농작물 소출의 감소 등 물질문화의 충격이 큰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으리라는 이야기에 많은 학자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17세기 위기이론은 다른 시대의 역사 그리고 다른 분야의 역사학에도 신선한 시각을 제공하면서 일련의 새로운 역사서술을 낳았다. 역사학자들은 17세기 과학혁명을 회의주의를 극복해 분명한 지식을 갈구하는 유럽인들의 노력 속에서 그려낼 수 있었으며, 자연철학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그리스 황금기나 혁명적인 과학, 사회, 예술이론들이 출현하는 20세기 초반 유럽 역시 위기상황이었음을 깨달았다. 그 위기의 원인이 언제나 기후는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대두되는 위기의 원인은 흔히 기후 또는 기후나 역병으로 인한 사회, 정치상의 위기였다. 17세기 위기 이론의 배경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활발해지기 시작한 고기후학과 기상학 분야의 새로운 과학적 연구 결과들이 있었는데, 1980년대부터는 기후학자들이 19세기 후반 세계 곳곳에서 기록된 가뭄의 원인으로 해수의 흐름과 기압배치의 동요에 따라 일정치는 않지만 주기적으로 특정 지역의 강우를 가로막는 엘니뇨라는 기후현상을 상당히 정밀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데이비스는 엘니뇨현상에 대한 기상학자들의 논의를 특유의 끈질김을 동원해 정리하면서 역사상 기록된 중요한 기근들이 대체로 엘니뇨현상으로 인한 가뭄과 일치한다는 결론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거대한 서사를 위한 빗장이 열렸다. 후기 빅토리아 시대에 여러 지역에서 수백만 인도인들이 기근으로 아사했다. 기근의 원인은 물론 가뭄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백만의 인도인들이 아사하는 와중에도 인도는 엄청난 양의 양곡을 수출하고 있었으니, 기근의 주원인은 영국 정부의 식민지 정책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데이비스의 관심도 기후나 질병은 아니었다. 데이비스는 사실 엘니뇨가 제국의 사회조직 제도, 상업, 정치제도와 함께 인도를 질곡으로 몰아넣는 또 하나의 악역이었음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인도는 이전에도 엘니뇨를 겪었다. 하지만 후기 빅토리아시대의 엘니뇨는 인도에 전례 없는 기근을 유발했고, 인도는 그 참화로부터 회복하지 못하고 거대한 기아인구를 지닌 빈곤국이 됐다. 영국의 식민지 정책이 인도의 사회구조를 붕괴시키기 전 인도의 전통사회는 자급농업의 경향, 기아에 대비하는 전통, 그리고 식량에 대한 주민들의 도덕경제 등을 통해 엘니뇨로 인한 위기를 견뎌낼 수 있었음을 데이비스는 강조했다. 결국 회복할 수 없는 빈곤이란 우리가 근대적인 제도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자유주의 무역체제의 산물임을 말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많은 독자들은 저자의 의도대로 책을 이해하지 않는다. 이 책의 주제가 마치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기근의 주요 원인이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 엘니뇨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고 읽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사람들이 이 책을 후기 빅토리아 시대 참화의 책임을 영국 제국주의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로 읽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서술은 가늠하기 어려운 도덕적 힘을 발휘한다. 특히 과학 연구를 통해 알게 된 질병이나 기후와 같은 자연현상을 사회, 정치사에 도입할 때 뜻밖의 힘이 작동된다. 과학의 권위를 빌린 서사의 힘은 독자들에게만 요술처럼 작동하는 게 아니다. 저자 자신이 그 힘에 끌려가는 모습을 우리는 크로스비에게서 볼 수 있었다. 질병이나 기후라는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 낼 때 역사학자는 그에 대한 과학적 연구물에 기대게 되는데, 과학이 얼마나 다양한 이론들과 활동들과 제도들이 혼효돼 있는 복잡한 존재인지를 함께 고려하기는 어렵다. 많은 독자들이 크로스비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말살되는데 유럽인들의 도덕적 책임을 면해 주는 글을 썼다고 그의 초기 작품을 오독했다. 그런데 크로스비는 결국 그의 독자들이 오독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엘니뇨현상에 대한 데이비스의 흥미로부터도 비슷한 독자들의 오독이 있다. 데이비스는 역사의 선형적인 발전모델을 벗어나 도시나 사회 또는 세계의 다양한 공간들에 정의와 부가 어떻게 배분되고 있는지를 살펴야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엘니뇨를 이용했다. 그런데 엘니뇨를 통해서 19세기 말 세계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일어났던 대 기근이 제국주의 수탈의 결과만은 아니었음을 읽는 독자들이 생긴다.

크로스비나 데이비스가 제시하는 자료나 통계들이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들도 제기된다. 크로스비가 서양문명이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게 됐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데이비스는 그 지배 과정에서 파괴된 타 문명권이 얼마나 부정적인 방식으로 변화해 갔는지를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결국 크로스비는 어느 문명권에서나 작동할 수 있는 변인들이 유독 서양에서만 작동한 것으로 그리는 경향을 갖게 된다. 더구나 서양 문명이라는 게 어디 단일체로 그려질 수 있는 단순한 존재란 말인가. 사실 서양문명이란 끊임없이 주변부 문명과 접촉, 변용되면서 형성된 존재가 아닌가. 데이비스는 또 어떤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 자유주의와 동일시하는 그의 가정은 정당한가. 무굴제국 시절의 인도인들이 영국 지배하의 인도인들보다 과연 행복했을까. 그리고 정말로 좀 더 여유 있게 먹고 살았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전혀 다른 추정 통계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참 그리고 보니 두 사람 모두 마치 오늘날 미 제국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 과거를 보는 듯 느껴지지는 않는가. 하지만 이러한 의문들이 있다고 해서 대륙 간 동식물의 교류가 역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감성을 일깨워 준 크로스비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상승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기상의 영향에 대한 데이비스의 지적 역시 소중한 역사적 성찰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인간사는 중층적으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사학자라는 국외자의 눈으로 미국 역사학계를 분석하는 『그 고상한 꿈』에서 피터 노빅은 객관적인 서술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꿈이 학문분야로서의 방법론과 위상을 확립하려는 역사학자들의 시도를 통해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형성됐다고 주장했다. 두 차례 세계 대전 사이에는 역사란 사료와 학자 사이의 대화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역사 서술의 상대적인 성격이 강조됐으며, 냉전 시대에는 다시 있는 그대로의 서술이 강조되는 모습을 노빅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후 언어적 전회에서 문화적 전회 그리고 이제 크로스비와 데이비스의 책에서 볼 수 있는 생물학적 그리고 기후학적 전회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많은 역사학자들이 상대주의적 담론이 난무하면서 갈수록 파편화 돼가는 역사학의 미래에 두려움을 느낀다. 다양한 시각과 층위를 읽는 시도들의 등장이 마치 혁명적인 패러다임의 전환, 또는 패러다임의 상실로 느껴지면서 불안해 지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과거는 층층이 우리에게 익숙해 질 수 있는 옛 글들의 흔적이 박혀있는 오래된 양피지 같은 연구대상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지난 연말 독일 막스 플랑크 과학사 연구소 소장 로렌 대스턴은 이십여 년 간 구상해 오던 『객관성』을 마무리 지어 출판했다. 대스턴은 과학에서의 객관적이라는 개념 역시 역사성을 띤다고 말한다. 과학이 자연을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기계적 객관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19세기 후반에야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 간 과학사학자들은 17세기 실험철학이 등장하던 시기에 보일이나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등 자연학자들이 신기하고 경이로운 자연현상이나 인공물에 집착했던 반면, 18세기 계몽철학자들은 전혀 반대되는 인식론적 시각을 보이면서 기적이나 비정상적인 현상에 대한 호기심을 거부했음을 살펴왔다. 계몽철학자들 역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봐야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에게 자연 그대로를 본다는 것은 기계적인 객관성이 아니라 자연이 지니고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본질이나 규칙성, 그리고 아름다움을 봐야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17세기 자연학자들이 모두 신기한 자연현상만을 찾아다니지는 않았다. 계몽철학자들 역시 전형적인 자연의 패턴만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19세기 말 이후 현대 과학자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그리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이들은 여전히 새롭고 신기한 자연현상을 찾아 헤매기도 하고, 자연의 규칙성을 포착하려 애쓰기도 한다. 나아가 광학렌즈로는 포착할 수 없는 외계나 나노 테크놀로지의 극미세계에 대한 표현은 결국 기구를 통해 만들어지는 인공물에 가깝다는 인식도 생겨나고 있다. 신기한 현상, 전형적 현상, 눈에 보이는 대로의 현상, 도구를 이용해 만든 현상 모두가 자연과학의 일부가 돼 있는 것이다. 상당히 오랫동안 회계학에서 간호학에 이르기까지 논문을 쓰는 사람들이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탐독해 왔다. 이론의 혁명적 변화를 보여주는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이 여러 분야에서 매우 유용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여러 학문 분야에서 단절적 변화보다는 점진적 변화가, 단일 패러다임보다는 복합적인 중층적 인지구조가 훨씬 더 유용해 보인다는 인식이 확산돼 가고 있다. 평가가 다양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크로스비와 데이비스의 책들이 역사학자들의 눈에 띄는 이유는 중층적인 역사적 실재의 복잡한 지층 속에서 매우 다른 그러면서도 매우 또렷한 층위를 찾아내 묘사해 낸 저자들의 솜씨 때문이다.

 


김기윤 / 한양대 강사·과학기술사

필자는 美 오클라호마대에서 ‘18세기 유럽의 자연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크로스비의 『콜럼버스가 바꾼 세계』와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과학과 과학자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루는 폴 화이트의 『토머스 헉슬리: 과학지식인의 형성』을 번역했다.

>>『생태제국주의』

유럽의 팽창을 잡초, 동물, 병원균 등을 통해 설명한 책이다. 저자는 네오 유럽 종들보다 훨씬 생명력이 강한 구세계(유럽)의 잡초, 동물, 병원균, 미생물이 신대륙의 토착종을 몰아내면서 유럽의 팽창이 가능했다는 밝히고 있다.
저자는 비슷한 기후가 데오 유럽을 건설하는 열쇠였음을 증명하기 위해 2억년 전 판게아로 거슬러 올라가 하나의 판게아에서 갈라져 나온 신대륙이 구대륙과 비슷한 기후를 가지고 있음을 규명한다. 반대로 기후가 비슷한 태평양 아시아 지역, 중국, 한국, 일본 등지에 정주 식민지를 세우지 못한 이유는 여러 요인과 함께 유럽과 같은 곡물, 가축, 미생물 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봤다. 즉 제국주의자들은 기후는 비슷하지만 그들보다 덜 발전한 문화와 단순한 생태계를 가지고 있던 신대륙에만 네오 유럽을 건설 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

저자는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가뭄·기근과 제국주의의 관계를 폭로한다. 후기 빅토리아 시대는 가뭄·기근으로 인류사 최악의 흉작과 물 부족 사태가 발생했던 시기다. 하지만 빈민을 구제할 잉여 곡물은 국가와 제국의 다른 곳에서 넘쳐났다. 스미스주의적 신조와 냉혹한 제국주의적 사리사욕 앞에 궁핍해진 빈민들은 엘니료의 파괴적인 위력 앞에 내던져 졌다. 생산양식의 제국주의적 변형은 기후 요인들이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양상으로 바뀌면서 기근 취약성을 형성했다. 오늘날 우리가 ‘제3세계’라고 부르는 지역의 발전격차, 근대적 빈곤이 탄생한 배경이다. 데이비스는 이 같은 관점에서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시도한다. 동학농민운동이 세포이항쟁, 의화단운동, 브라질의 카누두스 전쟁처럼 생존 및 환경 위기에서 생존권을 놓고 벌이는 기근 저항운동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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