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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선에서 명맥 유지 … 학문 다양성 왜곡 우려
10% 선에서 명맥 유지 … 학문 다양성 왜곡 우려
  • 김혜진 기자
  • 승인 2008.03.17 1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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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_ 한국 대학 내 마르크스 경제학의 위상

김수행 전 서울대 교수의 후임 임용을 놓고 벌어진 논란은 마르크스 경제학의 사회적 퇴출 경향, 그리고 그에 대한 사회적 위기감이 폭발한 사건이다. 서울대 대학원생들과 경제학자들의 요구는 교수직 한 자리를 놓고 벌이는 爭鬪가 아니라 학문 다양성의 훼손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우려하고 경고하는 목소리였다. 이어 ‘쏠림현상’을 지적하는 언론 보도들이 가세하면서 ‘비주류’ 경제학의 존폐를 둘러싼 위기감이 더욱 짙어졌다.

스스로를 ‘비주류’ 경제학이라고 지칭할 만큼 한국 경제학의 학문적 구조는 기형적인 것일까. 한국교육개발원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경제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4년제 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교수 수는 764명이다.

‘764 대 80’의 기이한 구조
마르크스주의 경제학뿐만 아니라 포스트케인즈주의, 제도주의 경제학 등 비주류 경제학자들을 포괄하고 있는 한국사회경제학회(회장 이병천 강원대)의 2007년도 회원 200여명 중 교수직을 갖고 있는 이들은 80명을 넘지 않는다. 물론 윤소영 한신대 교수와 같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하면서도 한국사회경제학회에 회원으로 있지 않은 연구자들도 있지만, 이례적인 경우다. 한국 대학의 경제학은 영미권 주류경제학 일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기현 서울대 교수는 2005년 한국 경제학계의 미국화 현상을 지적했고, 정성진 경상대 교수는 조사를 통해 이를 확인했다. 이에 따르면 2006년 2월 현재 수도권 30개 대학 경제학 전임교수 377명 중 국내박사 출신이 24명인 반면, 미국박사는 323명으로 무려 85.7%에 달한다. 교수 전원이 미국 경제학 박사인 대학도 6개나 된다.

2008년 3월 현재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31명 중 마르크스 경제학자는 단 한 명도 없으며,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을 분석하는 분야가 아닌 경우는 경제학설사를 전공하는 홍기현 교수 정도다. 연세대는 36명 중 홍훈 교수, 고려대는 24명 중 김균 교수, 박만섭 교수 등을 꼽을 수 있다. 많아야 10%가 비주류 경제학자들의 수치다.

지방의 경우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거점이라 할 수 있는 경상대조차도 교수 8명 중 ‘비주류’는 장상환, 정성진, 양희석 교수 3명에 그친다. 1980년대 김수행·정운영·박영호 교수 등을 임용하면서 한국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꽃피웠던 한신대는 강남훈, 양우진 교수 등이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비주류 경제학이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만큼 연구의 저변도 약해졌다. 200명이라는 한국사회경제학회의 회원 수는 1987년 창립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치다. 새로운 연구 인력의 충원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셈이다. 김수행 교수에 따르면 서울대의 경우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전공 석사학위 수여자 수가 1990년 24명을 최고로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5명 내외로 격감했다. 가르칠 사람이 없으니 자연스레 90년대 이후 늘었던 마르크스 경제학 강좌도 줄었다. 금융위기, 불평등, 고실업 등 ‘터보자본주의’의 폐해를 바로잡는데 필요한 다양한 관점을 기대하기 어렵다.

 

비주류 경제학, ‘포스트주의’가 대세
다른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경제학도 소련 붕괴 이후 ‘포스트’의 발호가 현저하게 나타났다. 비주류 경제학 내에서도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주변화 되는 양상이다. 이는 ‘정치경제학’의 의미 변화에서도 확인된다. 소련 붕괴 이전 한국에서 ‘정치경제학’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 동의어로 간주됐었다. 반면 오늘날은 마르크스주의·포스트케인즈주의·제도주의 등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민주화 열기와 개방된 정치적 공간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매진했던 연구자들이 관심을 달리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성진 교수에 따르면 2007년 한국사회경제학회 진성회원(연회비를 납입하고 선거권이 있는 회원) 81명 중에서 현재까지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연구하는 수는 12명뿐이다. 이전에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했지만 더 이상 연구하지 않거나 제도주의, 포스트케인즈주의 등으로 선회한 경우는 28명이다. 20년 전에 회원 두 명 중 한 명이 마르크스 경제학 연구자였다면 오늘날 그 비중은 불과 15% 정도로 그친다는 해석이다.

한국사회경제학회 회장인 이병천 강원대 교수는 ‘종속적 독점자본주의론’을 주장해 오다 1990년대 중반부터 암스덴, 에반스 등의 논의를 수용하면서 발전주의 국가론, 혹은 ‘개발국가론’의 체계화에 주력한다. 『자본론』의 해설서인 『자본의 이해』를 집필했던 강신준 동아대 교수는 『미국식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적 대안』(당대, 2001)을 내놓았다. 김상조 한신대 교수는 ‘합리적 시장’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다. 포스트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해서 비판적 경제학이 사라진 것은 분명 아니다. 다만 비판 경제학의 다양화 추세 속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주변화는 뚜렷하게 감지되고 있다.

물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주변화가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니다. 소련 붕괴는 전세계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강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것이 전면적 폐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학문적 적실성이 인정되는 가운데 하나의 관점으로 채택되고 있고, 자본주의 맹주를 반성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재구성에도 한창이다.

도꾜대, ‘마르크스주의 경제’ 전공필수로
현재 도꾜대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전공필수 과목으로 정하고 있다. 마르크스 노동가치론을 연구하는 교수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국제노동가치론 연구 그룹’은 소련의 붕괴 이후인 1996년에 발족해 국제적 논쟁을 주도하고 있다. ‘이념적 집착’이 아니라 학문 다양성의 입장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바라보는 해외 학계의 경향을 읽어낼 수 있다.                 

김혜진 기자 khj@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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