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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된 강의노트 없나요?”
“우리말로 된 강의노트 없나요?”
  • 박수선 기자
  • 승인 2008.03.17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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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_ 영어강의, 그 현장을 가다

지난 12일 신촌 소재 A대학 국제법 관련 수업 강의실. 수업을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이 유창한 영어로 안부를 나누고 있다. 21명이 수강한 이날 수업은 담당 교수와 학생들의 토론으로 대부분 이뤄졌다. 담당 교수는 강의 비중을 최소화하고 학생들의 의견을 듣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수강생들은 영어로 자신들의 의견을 거리낌 없이 말하고 상호 토론도 자유롭게 이어갔다. 이 아무개 씨(국제학부 3)는 “수업 내용이 어렵지 강의 전달이나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면서 “학생들 대다수가 해외에서 고교를 나온 학생들이나 유학경험이 있는 해외파”라고 귀띔했다. 담당 교수는 “수업 계획서나 첫 수업에서 겁을 줘서인지 영어실력에 자신 있는 학생들이 주로 수강하는 편”이라면서 “학생들의 수업 참여율도 높지만 원활하게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평했다.

또 다른 수강생인 김 아무개 씨(법학과 2)는 “중학교 때 미국에서 3년 동안 유학을 했는데도 다른 전공 영어강의보다 확실히 난이도 차이가 있다”면서 “수업계획서에도 학생들의 수업 참여도가 높다고 알려져 있지만 수업을 따라가려면 더 열심히 해야겠다”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대학생 영어실력도 양극화
같은 대학 경영학 전공 수업인 ‘회계원리’ 담당 교수는 강의 기자재를 설치하고 바로 영어 강의를 진행했다. 대차대조표와 수익계산서 구조를 설명하고 실제 연습문제를 풀면서 학생들의 이해를 도왔다. 중요한 대목에서는 반복 설명했다. 그런데도 질문을 던지면 학생들은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질문이 있냐는 말에도 묵묵부답이었다.

학생들의 말문이 열린 것은 50분 수업을 마치고 나서였다. 교단 앞으로 나온 학생들은 “우리말로 된 강의 노트는 없어요?” “무슨 말인지는 대충 알겠는데 강의 내용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등의 질문과 소감을 쏟아냈다. 대차대조표 계정 용어인 ‘accounts receivable’의 뜻을 묻기도 했다.
대학생들에게 영어강의는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니다. 대학마다 영어강의 의무화를 추진하면서 학생들에게 영어강의는 피해야 할 장벽에서 넘어야 할 장애물이 됐다.

영어강의 비율 늘고 있지만…
고려대는 2004년 신입생부터 영어강의 수강을 의무화 했다. 이수 학점도 점차 늘려 현재는 5과목 이상을 들어야 한다. 서울대도 08학번 신입생부터 졸업까지 전공과목 3학점을 포함, 9학점 이상 영어 강의 이수를 의무화 했다. 서강대와 한양대도 06학번부터는 각각 4과목, 3과목 이상을 영어강의로 들어야 한다.
영어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은 일단 부담스럽다는 반응이다. 연세대 이 아무개 씨(사회체육 3)는  “오늘 강의를 위해 강의 노트를 읽으면서 예습을 해왔는데도 강의 내용 50% 정도밖에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면서 “수업을 이해하려면 수업 이외에 얼마나 더 예습과 복습을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전공 용어나 개념 이해도 쉽지 않다고 학생들은 전한다. 한양대 장 아무개 씨(사회학 4)는 “학부제로 2학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공 수업이 이뤄지고 있는데 아직 전공에 대한 개념도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영어강의로 수업이 진행되면 수업 이해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면서 “대학 평가 순위를 올리려는 대학 측의 무리한 영어강의 확대 추진으로 애꿎은 학생들만 피해를 보는 것 같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토론 위주로 진행되는 대학원 영어 강의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고려대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미영 씨(가명)는 “영어로 된 원서나 고전을 읽는 것도 힘에 부치는데, 그 과정에서 생겼던 의문이나 비판점들을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토론해야 한다는 것은 소모적인 일”이라면서 “논문 읽기와 비판, 그리고 토론이 핵심인 대학원 수업에서 ‘영어’라는 장벽을 만들어, 하고 싶은 말을 못하게 하는 제도는 부당할 뿐만 아니라, 권리침해라고도 볼 수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교수들도 영어강의가 국어 강의보다 강의 전달력이 떨어진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연세대 경영학부의 한 교수는 “같은 수업을 국어 강의와 영어 강의로 모두 다 해봤지만 학생들의 경우, 영어강의에서 내용 이해가 더딘 게 사실”이라면서 “영어강의는 좀 더 심도 깊은 내용을 전달하는 것과 예정된 진도를 맞추는 것 중에서 선택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학생들, “영어강의 보완 필요하다”
학생들은 영어강의 확대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현재 영어강의는 보완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고려대 이 아무개 씨(언론학부 3)는 “특정 과목은 국어 강의분반을 동시 개설해서 영어가 부담스러운 학생들의 강의 선택권을 보장해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건국대의 한 학생은 “무리하게 영어 강의로 일관하기보다는 먼저 전공 주요 개념은 우리말로 확실하게 정리를 해 준 이후에 영어로 진행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1997년부터 영어강의를 해오고 있는 장영준 중앙대 교수(영어학)는 “영어강의 평가를 받아보고 30%만 수업을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에 난감한 적도 있었다”면서 “우리말과 병행하는 영어강의를 원하는 학생들이 많은데 실제 운영해보면 쉽지 않다. 시행착오를 거쳐 현재는 질문은 우리말로 하고 답변은 영어로 하는 방식으로 영어강의를 운영하고 있다”고 답했다. 

 박수선 기자 susu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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