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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네로 諷刺 … 베네치아의 자부심 노래
폭군 네로 諷刺 … 베네치아의 자부심 노래
  • 교수신문
  • 승인 2008.03.10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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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재의 ‘오페라로 읽는 서양 근대의 편린’ ]공공 오페라의 탄생과 몬테베르디의 「폽페아의 대관」

1612년 빈첸초 곤차가가 죽고 프란체스코가 작위를 이어받게 되자 그동안의 소홀한 처우에 불만이 쌓인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는 만토바 궁정을 떠나 같은 해 죽은 지오반니 가브리엘리의 뒤를 이어 1613년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의 음악감독에 취임했다. 취임 후에도 종교 음악에 국한되지 않고 만토바를 위시한 여러 도시들을 위해 꾸준히 세속 작품들을 제공했던 몬테베르디에게, 베네치아 오페라 극장 개관은 음악으로 성격을 또렷하게 그려내는 그의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많은 오페라 역사책들이 1637년 있었던 로마로부터의 순회 공연단에 의한 베네치아의 산 카시아노 극장에서 공연된 「안드로메다」를 공공 오페라의 탄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피렌체와 만토바, 로마처럼 절대 권력의 통치를 받던 도시들의 궁정 오페라와는 달리, 베네치아와 볼로냐처럼 공화정으로 통치되던 도시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오페라인 공공 오페라가 비롯됐다. 이들 간에는 궁정 오페라에 초대받은 사람들만 참석했던 반면 공공 오페라는 돈만 내면 누구나 입장할 수 있다는 것 외에도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궁정 오페라들은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총보가 출판되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공공 오페라는 입장객들에게 나눠줄 대본만 인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대본을 쓴 작가의 이름은 대체로 밝혀져 있는 반면 음악을 작곡한 사람의 이름은 없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경비를 아낌없이 투여했던 궁정 오페라와는 달리 가능한 한 비용을 절감해야 했던 공공 오페라에는 합창이 등장하는 경우가 드물며,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 레시타티보 위주가 아니라 아리아의 비중을 높였다는 점도 두드러진다.

그러나 산 카시아노 극장이 처음부터 오페라 공연을 위해 설립된 것은 아니었다.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 이후 이태리는 합스부르크 스페인의 강한 영향을 받게 됐는데, 17세기 전반 소위 ‘황금시대’를 맞은 스페인의 연극은 베네치아에도 영향을 끼쳐 돈만 치르면 누구나 입장할 수 있는 극장들이 존재해 왔으며, 산 카시아노 극장도 원래는 이러한 일반 극장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뒤이어 베네치아에는 오페라 전용 극장이 줄지어 생겨나게 되는데, 몬테베르디도 1640년에 「율리시스의 귀환」, 그리고 죽기 한 해 전인 1642년 오늘 살펴 볼 「폽페아의 대관」을 작곡했던 것이다.

 

이성적 판단과 감성적 매혹의 엇갈림

「폽페아의 대관」을 보고난 뒷맛은 그리 개운한 편이 못된다. 세네카와 옥타비아 같은 ‘좋은’ 사람들이 죽거나 추방당한 반면 폽페아와 네로 같은 ‘나쁜’ 사람들의 뜻이 거침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페라를 보는 자신이 좋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보다 오히려 나쁜 사람들의 노래들에 더 매료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더더욱 당혹스럽다. 이처럼 이성적 판단과 감성적 매혹이 엇갈리는 「폽페아의 대관」은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와 더불어 좀처럼 그 궁극적 의미가 손에 잡히지 않는 오페라들로 꼽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자연히 이면에 깔린 의미를 파헤치기 위한 시도가 거듭되게 마련이다.  특히 ‘폽페아’의 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먼저 대본을 쓴 베네치아 귀족 가문 출신의 변호사였던 부제넬로와 그가 속했던 아카데미아 델리 인코니티, 나아가 베네치아의 독특한 역사와 이에서 비롯된 특수한 입장들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당시 베네치아 상류 지성인들을 거의 다 포용하고 있었던 인코니티는 1630년에 창설돼 수십 년 동안 비공식적인 권력의 핵심 역할을 했는데, 대부분의 회원들이 소설, 윤리적 에세이, 종교적 논문들, 그리고 학술적인 변론들을 엄청나게 써내어 출판함으로써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이러한 정치적 활동 외에도 인코니티는 오페라를 비롯한 베네치아 사회활동도 활발히 벌여 1642년부터 1646년 파괴될 때까지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노비시모 극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영혼 불멸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인코니티는 현세와 육체적 감각, 쾌락의 중요성을 강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회원들이 최소한 한 권 정도는 금서 목록에 올라 있었다고 한다. 부제넬로의 대본은 바로 이러한 맥락, 즉 육체와 영혼, 네로의 즉각적인 만족과 세네카의 무덤을 넘어선 정신적 보상 사이의 변증법의 구도 가운데 보아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코니티의 입장은 17세기 전반 베네치아의 상황에 비춰 볼 때 더 잘 공감할 수 있다. 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자신만의 독특한 과두 공화제를 유지해 온 베네치아는, 이러한 자신의 독특한 정치 체제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옹호하고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고대 로마 황제 가운데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네로의 이야기는 절대군주제의 폐해를 보여주고 베네치아의 공화제를 정당화하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1606~1607년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성무금지령이 내려졌던 기억이 생생한 베네치아로서는 로마에 대한 반감과 경쟁의식 또한 팽배했을 것이며, 정신적 풍향계 또한 로마와는 사뭇 다른 방향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부제넬로는 네로와 세네카로 상징된 감성과 이성의 갈등을 프롤로그에서 펼쳐지는 행운과 덕의 논쟁 및 이들에 대한 자신의 궁극적인 승리를 부르짖는 사랑의 주장으로 구체화했다.

결국 전체 오페라는 이러한 세 개념 가운데 무엇이 정말 역사를 이끌어 가는가에 대한 부제넬로의 해답을 제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폽페아의 대관」은 표면적으로는 사랑의 승리로 끝맺음 되지만, 승리한 것이 과연 진정한 사랑인지, 아니면 육욕이나 폽페아 권력욕의 승리인지조차 분명치 않다. 비록 오페라에 직접 나오지 않지만, 이 오페라의 초연을 보았던 관객들 대부분은 폽페아가 결혼한 지 3년만인 서력 65년 임신한 상태에서 네로의 발에 차여 숨을 거두었으며, 68년에는 네로 자신이 근위대의 반란에 직면해자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네로와 폽페아, 세네카와 옥타비아 같은 인물들은 이미 역사상의 구체적 인물을 넘어서서 전설의 차원으로 끌어올려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세네카의 죽음을 네로와 폽페아의 결혼 삼년 후에서 직전으로 옮긴 것도 이처럼 역사를 전설로 승화시키기 위한 조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대본 쓴 부제넬로의 의도


세네카의 죽음 이후 옥타비아와 오토네 같은 ‘좋은’ 사람들이 흔들리는 모습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 질투심에 눈이 먼 황제의 딸 옥타비아가 복수를 하기 위해 오토네를 협박해 폽페아를 암살하도록 사주하는가 하면, 폽페아의 하녀 드루질라에게서 마음에도 없는 위선적인 육체적 위안을 찾던 오토네는 옥타비아의 계략에 굴복하는 유약한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지체 높은 사람들의 흔들리는 모습에 비하면, 암살 기도가 미수에 그친 후 네로에게 고문을 당하면서도 사랑하는 오토네를 감싸기 위해 희생적으로 죄를 뒤집어쓰는 미천한 드루질라의 모습은 그녀야말로 신분을 넘어선 세네카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깨닫게 해준다. 더구나 코메디아 델라르테에서 유래한 여타 하층 등장인물들의 희극적 경박함과 비교해 볼 때 드루질라의 고귀함은 더욱 그 빛을 발한다.「폽페아의 대관」에는 특히 주요 인물들의 독백들이 인상적인데, 로마에서 추방당하면서 부르는 옥타비아의 애가는 유명한 ‘아리아나의 애가’에 필적할만한 애절한 노래이다. 죽음을 앞둔 세네카의 독백 또한 감동적인데, 이러한 세네카의 진중함과 대조를 이루는 그의 제자들의 자기변명은 우스꽝스러움을 넘어 애처롭기까지 하다. 반면 네로와 폽페아는 주로 이중창을 부르며, 이때 폽페아가 언제나 주도권을 잡고 네로는 수동적인 반응만을 보인다는 것과 더불어 오페라 곳곳에 ‘페미니즘’ 적인 발언들이 널려 있음에 미루어 당시 베네치아에서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여성 문제가 초미의 관심거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공 오페라답게 「폽페아의 대관」도 인쇄된 적이 없으나, 현지 사정에 맞춰 손질된 필사본 총보가 나폴리에도 남아 있어 몬테베르디 오페라의 인기가 광범위했음을 시사함과 더불어 앞으로 오페라의 전파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우선 다음 글에서는 17세기 후반 독특한 발전을 이룩하게 될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로 오페라가 전파된 경위를 먼저 살펴본 뒤 다시 이들 지역으로 향하도록 하자.

 

한국교원대·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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