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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일본과 여성 국민화 이데올로기의 ‘意匠’
메이지 일본과 여성 국민화 이데올로기의 ‘意匠’
  • 교수신문
  • 승인 2008.03.03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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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 _ 『황후의 초상』 와카쿠와 미도리 지음 | 건국대 대학원 일본문화·언어학과 옮김 | 소명출판 | 2007

결혼식장에 갈 때마다 이상한 점이 있었다. 하객을 맞이하는 혼주의 복장이 그것이다. 아버지는 양장을, 어머니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하객을 맞이하는 모습이 나에겐 이상한 풍경이었다. 왜 두 분의 복장은 이렇게 비대칭적일까. 전통도 박래도 아닌 이 기묘한 풍경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신사임당도 그렇다. 5만원권 인물에 신사임당이 선정되자 논란이 일었다. 찬반양론의 중심에는 ‘여성상’에 대한 견해 차이가 존재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신사임당의 모습은 이당 김은호 화백의 초상화이다. 신사임당은 조선중기의 서화가로서보다는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현모양처의 귀감으로 우리의 뇌리에 각인돼 있다. 신사임당이 실제로 어떤 인물인가보다는 신사임당의 표상을 둘러싼 갈등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책이 여기 있다. 와카쿠와 미도리의 『황후의 초상』이다.

와카쿠와 미도리는 천황이 아닌 황후의 신체와 복장을 문제 삼는다. 그동안 메이지 천황의 표상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었다. 대표적인 업적인 타키 코지(多木浩二)의 『천황의 초상』도 이미 한국어로 번역돼 있는 상태다. 천황의 표상을 다루는 일을 일본의 근대, 즉 메이지 일본의 시대정신과 국체를 분석하겠다는 의미, 더 나아가 ‘천황의 나라’ 일본을 해부하겠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천황이 아닌 황후의 초상을 문제 삼은 와카쿠와 미도리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하루코황후(美子皇后)야말로 “메이지의 근대국가 형성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가정 하에 그녀의 표상 체계를 분석한다. 그리고 저자가 황후의 초상을 분석하는 이유는 메이지시대부터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는 일본의 젠더사를 연구하는 것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문명화의 가시적 방편으로 천황과 황후의 초상을 만들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개화파들은 일본 근대화의 척도로써 천황과 황후의 초상을 제작했고, 이를 외교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런데 천황과 황후의 초상은 달랐으며 비대칭성이 존재했다. 메이지천황은 권위와 위엄을 갖춘 군인의 모습으로, 황후는 지혜롭고 품위 있는 국모, 민족의 어머니의 모습으로 재현했다. 천황과 황후의 초상에 등장하는 부속물도 달랐다. 천황이 칼을 쥐고 있다면 황후는 부채를 들고 있었고, 황후의 초상의 배경에 등장하는 탁자 위에는 ‘여성성’을 상징하는 장미꽃과 『메이지효절록(明治孝節錄)』과 『부녀감(婦女鑑)』이 놓여 있었다. 초상의 배치에서도 남성중심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돼 있었다. 천황과 황후가 함께 등장할 경우, 천황은 오른쪽에 황후는 왼쪽에 배치됐다. 좌우의 차이관념이 좌우배치의 계급성과 젠더, 또는 타자성의 기호가 된 것이다. 천황의 용모가 무국적인 것에 비해서 황후의 용모는 명백하게 아시아적 특징을 보여줬다.

황후의 초상이 메이지 근대화의 상징으로 부각되면서 여성의 근대화와 국민화가 추진됐다. 국가의례에는 메이지천황과 하루코황후가 나란히 등장했다. 마차 행렬을 통해서는 그동안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모습도 보여줬다. 메이지천황과 하루코황후가 나란히 동승한 것이다. 황후는 황족의 서열에서 보면 3위다. 메이지천황이 황후보다 위이며 메이지천황의 어머니인 황태후가 황후보다 서열이 더 높다. 그러나 서양식 전례가 곧 근대화라는 기치 하에 메이지천황과 하루코황후가 함께 마차에 오른 것이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천황과 황후가 동등하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시각적으로 알리는 퍼포먼스였다. 또한 일부일처제를 공포하는 표지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천황의 역할과 황후의 역할은 엄격하게 구별돼 있었다. 메이지시대 여성의 근대화는 여성의 권리의 자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여권신장을 위해 투쟁했던 여성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메이지 일본에서 여성, 즉 국민의 일분자로서의 여성의 의무란 가정을 굳건히 지키는 일이었다. 남성을 보필하는 아내이자 우수한 국민을 재생산하는 어머니의 역할이 메이지시대 일본이 ‘신’여성들에게 바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양처현모’의 정책이 태동했다. 이로 인해 남성이 목숨을 바쳐 지키는 것은 국가의 평화이고 여성이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은 정절이라는 관념이 확산됐다.

메이지 정부는 천황상을 서구적 근대화의 상징으로, 황후상을 전통과 근대를 아우르는 상징으로 이미지화해 갔다. 황후가 방문한 곳은 여학교와 병원 그리고 제사 공장이었다. 일본에서 신여성의 의무란 가정에서는 양처현모였고, 사회에서는 남성의 노동력을 보조하는 역할이었으며, 간호사로 대변되는 ‘근대국가의 국민건강과 위생’을 지키는 동시에 ‘전시의 구원체제 확립’에 힘쓰는 것이었다. 황후는 일본고대의 구습을 유지하는 행사에서는 일본의 전통의상을 입었다. 이는 전통의 창조뿐만 아니라 국가적 기원을 창조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이에 비해 천황은 처음부터 끝까지 양장을 고수하며 세계 제국 내의 군인으로 표상되었다. 따라서 하루코황후의 초상과 그 초상을 수단으로 전개된 일본 여성의 ‘국민화-근대화’란 여성의 ‘양처현모’화였던 셈이다. 남성을 받드는 이상적인 아내이자 자애로운 어머니로서의 여성상. 정절을 목숨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양처현모의 만들어진 ‘신화’는 여전히 지속된다.

한때 대통령의 초상화가 교단 위에서 학생들을 근엄하게 내려다보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대통령과 영부인의 모습이 여러 매체를 통해 자주 우리들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때 그분들의 모습은 메이진천황과 하루코황후의 모습과는 과연 얼마나 달랐던 것일까. 위안부 문제에서도 여전히 양처현모의 논리는 재생산된다.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에게서 우리는 ‘민족’을 상징하는 어머니의 정절 훼손을 발견하고, 그것을 결국에는 위안부 여성의 아픔이 아닌 국가로 대변되는 남성들의 ‘수치’로 전유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또한 ‘조선의 국모’로 추앙되는 명성황후와 표리부동한 문제가 아닐까.

이승원 / 한양대 연구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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