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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를 개념적으로 사유한 부분 신선 … 난해할 필요 있나?
식민지를 개념적으로 사유한 부분 신선 … 난해할 필요 있나?
  • 허수 / 동덕여대 연구교수·한국근대사
  • 승인 2008.02.25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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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_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 윤해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

‘식민지 근대’는 식민지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다. 그것은 ‘한국적 근대’와 같은 근대의 유형론이 아니라 기존의 식민지 인식을 해체하기 위해 제출된 비판론의 범주에 속한다.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를 출간한 윤해동 교수는 ‘식민지 근대’ 논의를 통해 기존의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의 대립을 넘어서 식민지 및 근대를 이해하는 제3의 시점을 제공하고자 했다. 나아가 그는 기존의 식민지 인식에 공통적으로 내재된 근대적 가치 일반을 비판하고 있다.

“모든 근대는 식민지 근대다”라는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 윤해동 교수의 논의에서 가장 큰 특징은 ‘식민지’ 개념을 기존의 용례보다 훨씬 폭넓고 적극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그에게서 ‘식민지’는 더 이상 근대의 결여나 왜곡이 아니고, 제국주의 국가에 병합된 곳에 제한되지도 않으며, 독립과 더불어 사라지는 경험도 아니다. 오히려 ‘식민지’는 역사적 차원뿐만 아니라 인식론적 차원에서도 자본주의 근대세계의 전체상을 구성하는 핵심요소이고, 서구 근대가 애초부터 가지고 있던 位階性의 또 다른 모습이며, 정치ㆍ경제적 독립 이후에도 계속해서 재생산되는 사회ㆍ문화적 범주이다.

이러한 ‘식민지’ 개념의 확장은 설명 범위의 ‘시공간적 확대’라는 외관을 띠지만, 실은 근대 비판을 위한 ‘戰線의 확대’를 동반한 것이다. ‘식민지’에 근대 비판의 기폭장치를 설치해서 ‘세계로’ ‘현재로’ 침투시킴으로써 식민지 논의의 폭발력과 현재성을 환기시키는 것, 그것이 이 책에서 저자가 취하고 있는 글쓰기 전략이다. ‘이해ㆍ설명’과 관련한 구심적 힘과 ‘비판’적 기획에 담긴 원심적 힘 사이의 이러한 긴장을 그는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로 표현한다.

새로운 敍事의 가능성
‘식민지 근대’의 관점이 수탈론 및 식민지 근대화론의 입장과 구별되는 최대의 특징은 그것이 식민지 경험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그 경험이 가진 근대 비판의 측면을 적극 주목하고자 한 데 있다. 수탈론의 입장은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끼친 ‘합리화’를 전면 부정하거나 기껏해야 그 ‘합리화’ 정도를 ‘수탈을 위한 개발’의 범위에 국한시켰고, 근대적 주체 형성과 관련한 일상적 차원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포착하진 못했다. 또한 식민지에서 이루어진 개발을 ‘주체 없는 개발’로 비판하는 데 그치고, 개발 자체에 내포된 근대성을 전반적으로 회의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입장은 식민지 조선에서 시장경제의 원활한 작동과 경제의 양적인 성장을 강조하지만 그러한 합리성의 지평 너머에 ‘이미-동시에’ 존재했던 원초적 폭력과 민족적 차별을 간과했다. 뿐만 아니라 근대화에 대한 한국인의 높은 적응력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높은 교육열에 주목했으나, 보통학교 설립운동 등을 전개한 식민지 인민의 역동성과 정치성은 외면하고 경제적 주체로서의 순응성만 보았다.

저자는 첫째, ‘수탈론’의 ‘수탈(지배)-저항’ 도식을 벗어나 식민지 일상의 동향을 그의 시야에 적극 포섭하고자 했다. 이런 문제의식 위에서 그는 ‘수탈’ 대신에 ‘식민지 규율권력’ 개념을, ‘저항’ 대신에 ‘식민지 공공성’ 개념을 제기했다. 또한 수탈론이 민족운동사 서술에서 전제했던 ‘계급’·‘민족’ 주체 이외에, 그 주체들의 일상적 존재형태라 할 ‘대중’의 창출에 주목했다. 둘째, 그는 식민지와 해방 후의 역사를 ‘부정적 연속’의 관계에 있다고 봄으로써 ‘수탈론’에서는 은폐된 채로, ‘식민지 근대화론’에서는 공공연하게 제시되는 ‘근대주의’적 경향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식민지 근대’가 기존 이론에서 진일보한 지점은, 식민지 경험을 통한 새로운 서사 구조의 형성 가능성을 보여준 데 있다. 식민지와 해방 이후의 역사, 식민지 조선과 일제 및 세계 자본주의를 관통하는 포괄적 인식틀, 그리고 근대문명 비판의 새로움 등이 그러한 서사 구조의 핵심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식민지 근대’가 가진 새로움은 ‘식민지’와 ‘근대’를 단순하게 병렬시키지 않고, ‘근대’의 규정 속에 식민지를 적극 끌어들여 개념적으로 사유한다는 점에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식민지들’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전개 과정에서 서구 근대에 편입된 ‘타자’이며, 서구 근대는 이러한 타자를 포함하면서 자신의 近代像을 재구성해 왔다. ‘식민지 근대’는 제국주의와 식민지 사이의 이러한 역사적 연관성을 적실하게 포착하고자 한다. 이 때 ‘식민지’는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없고 항상 서구 근대의 언어로 파악되고 표현된다. 동시에 서구 근대의 언어로는 ‘식민지’를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식민지는 근대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동시에 서구 근대의 언어로는 궁극적인 재현이 불가능한 존재로 설정된다.

‘비판’의 특권화 경향
나는 저자의 이러한 식민지 인식에 동의한다. 또한 새로운 서사 구조로서의 가능성에도 크게 주목한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주체의 재구성’에 관한 천착이 미흡하다고 생각된다. 어떤 서사 구조에서도 주체 형성의 문제는 핵심적 사안이다. 그 서사 구조에 기반한 행동에 도덕적 정당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주체’에 관한 그의 인식은 ‘민중’론에서 드러나는데, ‘민족을 매개로 해서 민중을 동원’하는 시도는 민중의 역동성을 근대적 합리성 속에 가두어 버린다고 비판했다. 대신 그는 ‘지배받는 대중’과 ‘자각적인 대중(민중)’의 모습을 함께 지닌다는 의미로 ‘대중의 複數性’을 내세운다. 말하자면 주체 형성에 관한 저자의 전략은 ‘복수성’을 통한 근대 주체의 비판과 해체에 집중돼 있고, 주체의 재구성 문제는 부차화 된다.

이러한 ‘복수성’은 주체에 관한 논의뿐만 아니라 그의 ‘식민지 근대’ 전체에 가득 차 있다. ‘회색지대’의 양면성을 비롯해 이중성, 혼성성, 딜레마, 패러독스, 아이러니 등의 표현을 통하여 ‘지배-저항’이라는 민족주의적 이항대립이나 ‘근대적 합리성이라는 덫’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런 ‘兩價性’을 가진 개념의 연쇄는 담론 차원에서 강한 비판적 효과를 거둘지는 모르나, 현실에서 저항적 힘의 근거를 만들긴 힘들다. 탈중심적 주체가 지닌 해체적 효과와 아울러 ‘지배-저항’의 한 축을 이루는 저항적 주체의 재구성 문제를 기꺼이 고민해야 할 필요성도 여기에서 나온다.

저자의 ‘특권화된 비판’ 전략은 ‘식민지 근대’의 내용적 측면만이 아니라 형식의 측면에서도 그의 글쓰기를 난해하게 만든다. 『식민지의 회색지대』에서 회색지대를 ‘저항과 협력의 교차’로 보던 인식이,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에 와서는 단순한 이중성이나 양면성이 아니라 ‘아이러니’와 ‘패러독스’라는, 좀 더 적극적이고 비판적 효과를 유발하는 용어로 표현된다. 그러나 사유와 이론이 무한증식을 멈추고 체계화하기 위해서는 ‘초월적 一者’를 확정하고, 그에 의해 여타 개념들을 질서 지워야 한다. 그 ‘一者’는 화폐와 같은 일반적 등가물로 기능하면서 여타 개념과의 관계에서 고정점으로 기능한다. 그 ‘一者’는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경계에 위치하므로 본질적으로, 그리고 체계 속에서 유일하게 의미의 ‘양가성(구성적-해체적)’을 가진다. 이 一者는 ‘주체’의 자리에 비유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저자의 개념이 양가성의 연쇄로 이어지고 있는 사실은, 그가 자신의 이론 체계에서 ‘초월적 一者’를 확정하지 못한 증거이다. 그는 ‘유동하는’ 개념을 연속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비판’을 자가발전 시킬 뿐이다 그 결과 그의 눈에 비친 세계는 패러독스로 가득 찬 세상이 된다. 그 세상은 온갖 개념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진동하는 곳이며, 따라서 의미가 고정점을 갖지 못하고 떠돌면서 각자 자신이 초월적인 고정점임을 주장하는 상태, 즉 ‘의미의 자연 상태’가 발생하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각 개념들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줄 고정점을 찾지 못해, 부단한 교환관계 속에서 존재증명을 시도한다 그의 글이 난해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개념을 소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의미의 고정점이 없는 사유는 서사 구조로서의 체계를 이루기 어려우며 실천적 규범성을 제시하기 어렵다. 그곳은 모든 사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사라지는 ‘본질’의 세계이다. 또한 그곳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현상 너머에 있는 본질의 세계, 즉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다’와 같은 역설과 顚倒의 세계이다. 이것이 그의 논의에서 도덕성ㆍ규범성의 재구축 문제가 본격적으로 검토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궁극적으로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의 현실로 귀환해야 한다. 그리하여 보다 확장된 인식 위에서 세상을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 그의 글쓰기가 과도한 비판적 전략을 비껴나, 경험성과 소통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차분해지기를 감히 바란다.

허수 / 동덕여대 연구교수·한국근대사

필자는 서울대에서 ‘일제하 이돈화의 사회사상과 천도교’로 박사학위를 했다. 도쿄대 조선문화연구실 외국인연구원을 역임했으며,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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