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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파할 ‘단서’가 필요하다
돌파할 ‘단서’가 필요하다
  • 교수신문
  • 승인 2008.01.29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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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라는 아포리아』  고사카 시로 지음 | 야규 마코토·최재목·이광래 옮김 | 이학사 | 2007 | 372쪽 | 1만8천원

그런데 내가 지금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무’ 그 자체도 아니고, 동양 문화의 근저를 ‘무’라고 하는 것이 옳은가 어떤가 하는 것도 아니다. 이 ‘무’가 도출되는 ‘절차’가 과연 타당한가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문화 형태의 비교에서 ‘동·서’라고 하는 것의 타당성, 즉 동양과 서양을 양극에 두고 無의 문화와 有의 문화로 간주하는 이 절차가 과연 옳은가라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좀 더 말하자면 니시다 기타로라는 근대 일본의 위대한 철학자가 ‘동양과 서양’이라는 테마를 의논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단지 니시다 기타로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테마는 많든 적든 근대 일본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었던 문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본문 10쪽)

 

하지만 이 서양과 동양이라는 도식은 일본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생각해보아야 했던 필연성을 갖고 있으며, 그 당시의 문제의식의 주조를 이룬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선 일본의 지식인이 이 도식을 생각해야만 하는 필연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 한국·조선, 중국 또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시야에 넣어서 살펴볼 것이다. 그것은 다른 아시아 국가와 일본의 근대화 과정의 동일성과 차이성을 분명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로부터 서양화·근대화가 의미하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고, 그것에 대항하는 일본주의·동양주의의 내용이 명료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 도식 자체가 오늘날 일본에 의의가 있는 것인가? 만약 이 도식을 계승해야 한다면 과연 어떤 지평에서 계승할 것인가? 혹은 그것을 바꾸어야 한다면 그것을 대신해야 할 틀, 즉 일본의 국제사회에서의 문화적 위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 나는 이러한 것들을 이 책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본문 11~12쪽)

‘근대(화)’를 뭐라 정의할 수 있을까. 정치경제적 차원에서 라이프스타일에 이르기까지 또는 세계관이나 발화자의 위치에 따라 근대라는 피정의항은 수많은 정의항을 거느릴 수 있을 터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근대 세계와 관련한 문제 설정도 달라질 것이며, 문제 설정에 따른 담론의 구성도 근대주의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몰근대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일 것이다.
『근대라는 아포리아』의 저자 고사카 시로는 근대화를 세계의 통일 과정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즉, “통일이라는 이름 아래 개개의 특수한 지역·문화·가치를 捨象하고 일원화하는 통합 과정을 바로 근대화”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근대화란 한편으로는 화폐경제에서 보이는 중앙집권 기구에 의한 통일 혹은 일원화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일원적인 통일체 내부에서의 분화·독립”이라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경우 근대(화)는, 리오타르의 표현을 빌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서양이 제작한 ‘철학적 장편소설’을 번역하는 과정이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철학적 장편소설의 전형적인 예인데, 이 ‘작품’에서 헤겔은 정신의 변증법, 의미의 해석, 이성적인 인간 또는 노동으로서의 주체의 해방, 부의 발전 등에 근거해 세계를 하나의 원리로 포괄하는 장대한 내러티브를 작성했다. 이 서사의 주인공은 자본과 이성을 무기로 장착한 ‘서양’이었으며, 그 나머지 세계는 통일의 메커니즘에 따라 서양의 분신이 되거나 노예가 돼야 했다.
선택의 폭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일본 명치유신기의 정치인들. 오른쪽두번째가 이토오 히로부미. 원내는 니시다 기타로.

서양=근대의 충격에 대응하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노선’을 거칠게 ‘급진적 근대주의’, ‘급진적 반근대주의’, ‘점진적 근대주의’라 명명할 수 있거니와, 각각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착종과 균열, 이합집산을 거치면서 다양한 사상적 지형도를 그린다. 일본의 경우, 민권파가 국권파로 ‘전향’하거나 기타 잇키처럼 사회주의자에서 국체론자로 선회하는 것,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미키 키요시가 일본주의자로 돌아서는 것 등이 단적인 예이다.

그런데 저자는 ‘점진적 근대주의’를 중심에 두고 일본의 근대가 어떤 ‘운동 과정’을 거쳐 파국에 이르렀는지를 사상사적 관점에서 고찰한다. 일본의 和魂洋才, 중국의 中體西用, 조선의 東道西器를 앞에 표 나게 내세우고 그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도 근대 일본이 도달한 아포리아의 실상을 보다 입체적으로 再構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동아시아의 근대는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무장한 서양의 총공세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고심참담해왔다. 서양은 동양 또는 아시아라는 심상지리를 설정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타자=거울이었다. 중화시스템에 속해 있던 한·중·일 삼국의 근대는, 시간과 계기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고민을 갖고 출발했다. 동시에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문제에서는 적지 않은 낙차를 보이기도 했다. 예컨대,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은 학문과 기술을 우선적으로 수용했고, 한국은 기독교를, 중국은 공산주의를 수용했다.

이처럼 중국과 한국의 서양=근대 수용 역사와 일본의 그것은 차이가 있다는 결론을 바탕으로 일본의 근대가 도달한 아포리아의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저자의 노력은 충분히 존중할 만하다. 또 자기 부정을 수반하지 않고서는 다른 문화를 받아들일 수 없으며, 자기 부정은 자기 상실의 불안을 초래하고, 불안의 다시 주체성의 회복을 요구한다는 저자의 진술에 수긍한다면, 근대 일본에서 전개된 사상운동의 진폭과 변이를 동아시아 근대와의 관련성 속에서 포착하고자 하는 노력도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 수용 양상을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저자가 한국과 중국의 근대 사상의 전개를 너무 단순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를 들어 한국 근대 사상의 전개와 그 특징을 강재언과 유동식의 연구를 비롯한 70~80년대의 성과에 전적으로 기대어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70~80년대의 연구 성과들의 시효가 만료되었다는 말은 아니지만, 최근 한국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여타 근대를 둘러싼 논쟁 등을 고려할 때, 지금-여기에서 저자의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특히 마루야마 마사오의 논리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도, 마루야마적 논리를 수용한 강재언의 논의를 전폭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동아시아를 시야에 넣고서 일본의 근대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는 관점도 특정 시기(이른 바 ‘문명개화기’)에만 편중되어 있어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아시아연대론에서 대동아공영권에 이르는 과정에서 동아시아 삼국의 지식인·활동가들은 적지 않은 편차를 보이면서 자신의 사상을 피력했다. 일본의 경우, 이 책에서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는 기타 잇키나 도사카 준뿐만 아니라 요시노 사쿠조, 야나기 무네요시, 오자키 호츠미, 하세가와 뇨제칸, 가네코 후미코, 야나이하라 타다오 등등은 어떤 식으로든 중국과 한국을 시야에 넣고 제국주의의 분신으로 ‘환골탈태한’ 일본의 근대를 고민한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패전’ 이후에도 루쉰의 격투를 통해 근대란 무엇인가를 치열하게 물은 바 있는 다케우치 요시미는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는 개념을 무기로 일본적 근대의 딜레마를 파고들었다.

새로운 동아시아의 상을 구성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동아시아상이라 했거나와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다양한 시각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동양평화론이나 아시아연대론, 동아협동체론, 대동아공영권 등등이 그 예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자국을 보호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든, 이웃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포석이었든, 아니면 자본에 저항하는 국제적 연대를 염두에 둔 것이었든 이 논의들이 근대의 산물인 민족주의(국민주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는 점이다. “당면 목표인 민족국가를 수립하자마자 그 주된 목표를 상실하고 다른 민족을 침략하는 원리로 변모하고 마는”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없이 새로운 동아시아를 상상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어불성설이다.

물론 저자에게 이 모든 것을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근대화는 일원적 통일=폭력의 전면화를 지향한다는 것, 일본의 근대는 서양 근대의 폭력을 전유하는 방식으로 아시아를 통일하고자 했다는 것, ‘근대의 초극’을 표방했지만 그것은 하루투니언의 예리한 지적대로 ‘근대에 굴복한(overcome by modernity)’ 것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일본 근대의 아포리아였으며 그 결과는 ‘패전’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저자의 접근 방식이 지나치게 우회적이고 조심스럽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니시다 기타로를 비롯해 다나베 하지메나 와쓰지 데쓰로처럼 일본 중심의 통일 논리로 치달은 이들의 사상적 궤적뿐만 아니라, 근대화=통일화=침략주의를 추동하는 힘의 정체 및 그것의 구체적인 현상태와 긴장을 유지하면서 대결을 펼친 사상가·활동가들에게도 그 이상의 주의를 기울여야 근대라는 아포리아를 돌파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 근대의 아포리아 또는 ‘착각’을 확인하는 선에 머무를 경우, ‘대동아공영권’의 논리와 다른 성격의 동아시아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며, 다케우치 요시미의 말마따나 동아시아를 포함한 비서구의 근대는 ‘패배감의 지속’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정선태 / 국민대·국문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개화기 신문논설의 서사수용 양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근대의 어둠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시선』, 『주변부의 문학, 변경인의 상상력』, 『조선의 혼을 찾아사』(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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