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21:50 (금)
“기여는 엄청나고, 아쉬움은 자잘하고, 실수는 사소하다”
“기여는 엄청나고, 아쉬움은 자잘하고, 실수는 사소하다”
  • 강대진 / 서울예술대 강사·고전그리스문학
  • 승인 2007.12.24 13: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확대서평 _ 『그리스 비극』 임철규 지음 | 한길사 | 2007

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 느낀 감정은 솔직히 질투심이었다. ‘내가 쓰려던 책을 누가 먼저 냈구나!’ 하지만 책을 몇 쪽 읽자 곧 생각이 바뀌었다. 이 책은 내가 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런 책은 15년에서 20년 뒤에나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방대한 인용문헌, 그리고 그것들을 넘나들며 글을 짜나가는 솜씨였다. 각 작품을 보는 여러 시각들을 소개하고, 여러 해석의 계보를 밝히는 등, 한 책에서 이렇게 많은 것을 배우기도 근래엔 없던 일이다.

물론 자잘한 아쉬움도 없지 않다. 우선, 이 책이 개개 작품의 형식적 측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 작품의 구조는 어떠한지, 작품 중앙 부근에는 어떤 장면이 배치돼 있는지, 각 인물에게 배당된 대사의 분량은 어떠한지, 어떤 대사를 어떤 인물에게 배당하는 것이 타당한지 따위의 문제들 말이다. 너무 좀스러운 요구 같지만, 때때로 이런 점들이 작품 해석에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에우리피데스의 『힙폴뤼토스』에서 등장인물 네 사람의 대사 분량이 거의 같다는 점에 주목하면, 우리가 ‘여주인공’ 파이드라나 ‘남자 주인공’ 힙폴뤼토스에게 초점을 맞춰 작품을 해석하는 게 옳은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또 아이스퀼로스 『자비로운 여신들』의 투표 장면에서는, 오레스테스를 공격하는 쪽과 방어하는 쪽이 ‘두 줄씩 말하기’로 진행하다가 마지막에 갑자기 세 줄짜리 대사가 나와서, 투표에 참가한 전체 배심원 숫자가 몇인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보통 한 줄마다 한 명씩 나가서 투표하고, 다음 줄에 들어오는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방대한 인용, 명쾌한 해석의 계보
이 책에 보이는 사소한 실수 중에, 『아이아스』에서 “아이아스는 이복동생 테우크로스를 불러 자신의 아들을 부탁”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런 것은, 소포클레스의 초기 작품들이 양분구성을 취하고 있으며, 이 작품에서도 같은 배우가 전반부에서는 아이아스 역할을 하고, 후반부에서는 다른 가면을 쓰고 나와서 테우크로스 역할을 한다는 데 주목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런 문제는 이 책에 인용된 방대한 문헌목록이 보여주는 한 가지 특이한 점과 관련돼 있다. 20편 이상의 비극작품을 다루는 이 책에 인용된, 개별 작품의 주석서가 단지 4개뿐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주석서가 인용돼야 하는 대목에서, 넓은 분야를 아우르는 2차적인 연구서가 인용되는 일이 종종 있고 그것이 논의의 엄밀성에 흠이 되기도 한다. 이런 흠들은 각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신화를 인용하는 대목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소포클레스의 『트라키스의 여인들』에 “황소의 모습을 한 강의 신 켄타우로스”가 등장한다는 주장 따위가 그런 것이다. 켄타우로스라면 반인반마인데 황소 모습이라니? 이 작품에는 황소 모습을 한 강의 신 아켈로오스가 언급되는데, 아마도 그게 잘못 섞여 들어간 모양이다. 같은 글에서 켄타우로스인 네소스가 자기 아내를 업고 달아나자 헤라클레스가 화살을 날리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화살은 “휘드라에게 쏘았던 흔적이 남은”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이 화살은 원래 헤라클레스가 물뱀 휘드라의 담즙에 담갔었고, 그래서 독화살이 된 것이었다.

한데 배경 신화라는 것이 대체로 이전 시대 작품들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니, 신화 인용상의 실수는 곧장 이전 작품 인용상의 실수로 연결된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를 인용하면서 “우라노스를 죽인 크로노스 역시 자식의 손에 죽는다”고 한 것이나, “에로스는 우라노스의 절단된 성기의 정액에서” 태어났다고 한 것 따위가 그렇다. 우라노스(하늘)는 죽지 않고 그저 땅과 분리됐을 뿐이다. 또 크로노스도 권좌에서 쫓겨날 뿐이지 죽지는 않는다. 그리고 뒷 문장은 에로스가 아니라 아프로디테의 탄생에 대한 언급이다. 다른 예로, 아이스퀼로스의 『테바이를 공격하는 일곱 영웅』에 나오는 에테오클레스의 독백을 아킬레우스와 맞서려 나서는 헥토르의 독백과 비교하면서, 이때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와 벌일 운명적인 대결을 위해 궁전을 떠나”갔다면서 『일리아스』 22권을 인용했는데, 사실 그 장면에서 헥토르는 이미 자기 궁전을 떠나온 지 사흘째였다. 그는 단지 성문 앞에 서 있다가 아킬레우스에게 다가가는 참이었다.

주석서를 참고하지 않을 때 생기는 더 큰 문제는, 원문 이해가 잘못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아이스퀼로스의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는 오레스테스가 이웃나라에 팔려갔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저자께서는 이것을 진담으로 해석하신 듯하다. “그녀의 잔인함은 … 어린 오레스테스를 다른 나라의 ‘노예’로 팔았던 것에서도 드러난다.” “어린 오레스테스를 노예로 팔고”.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메타포이다(A.F. Garvie의 132~3행 주석 참고). 제 자식은 팽개치고 情夫를 끌어들였단 말이다.

지리적 지식·번역 인용 불철저
주석 참조 문제 이외에 작은 아쉬움을 하나 더 밝히자면, 이 책이 보통 고전학자들의 글에 비해 수평적으로 엄청나게 범위를 확장하는 반면에 수직적인 연결은 조금 약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가령, 서사시에 쓰이던 어구를 끌어 쓴 경우, 그 문맥에서 필요한 뜻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그 단어의 역사 때문에 함께 딸려오는 다른 함의를 생각해야 하는데, 이 책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가멤논』에서 주인공에게 주어진 ‘도시의 약탈자(ptoliporthos)’라는 수식어다.

이 말은 원래 거의 아킬레우스와 오뒷세우스에게만 붙는 수식어로 칭찬의 뜻이 들어 있다. 한데 이 책에서는 이 말이 아가멤논에게 쓰였다고 해서, 이것을 그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해석한다. “아이스퀼로스는 … 전쟁의 참혹함을 전해주고 있다. 가령 코로스는 … 아가멤논을 “트로이아의 약탈자”라 불렀다.”(118쪽) “도덕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 그를 ‘트로이아의 약탈자’라 불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가멤논』에 이어지는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 아가멤논이 “‘신과 같은 이미지’로, 트로이아를 함락시킨 위대한 왕으로 그려”지고 “아무도 그의 잘못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이전과는 모순된 태도인 듯 보인다. 애당초 ‘도시의 약탈자’라는 말에 칭찬의 뜻도 들어있다는 것을 지적해 두었다면 그런 느낌은 없었을 것이다.

지리적 지식의 문제도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으로, 소포클레스의 작품 『트라키스의 여인들』이 이 책에서 계속 ‘『트라키아의 여인들』’로 나온다는 점이다. 트라키스는 희랍본토 테르모퓔라이 바로 북쪽이고, 트라키아는 고전기 희랍인들은 거의 자기네 땅으로 여기지 않았던 저 북쪽 땅이다. 이 책에는 편집자들의 잘못인 듯한 실수들이 꽤 보이는데, “헤라클레스의 가족들이 … 아마도 본토 그리스에서 추방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구절로 보아, 이것만큼은 저자의 실수로 보인다. 육지에서 벌어졌던 플라타이아 전투를 “해전”이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번역 인용의 문제도 있다. 이 책은 따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천병희 교수의 번역을 끌어다 쓰고 있는데, 그 번역에서 잘못된 것이 그대로 딸려 들어온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힙폴뤼토스』에서 주인공 청년이 죽게 되자, 코로스는 “전에는 뤼라의 기러기발 밑에서도 결코 잠든 적 없는 음악이 … 침묵하게 될 것”이라고 노래하는데, 여기서 ‘기러기발’로 옮겨진 것은 희랍어 antyx로서 천 교수께서 너무 심하게 옮긴 것이다. 기러기발[雁足]이란 가야금이나 아쟁 따위에서 줄 하나하나를 받쳐주는 받침인데, 뤼라에는 이런 것이 없었다. 보통은 ‘브리지(bridge)’로 옮기는데, 그냥 ‘줄받침’ 정도면 될 것이다.

‘사소한 불만’을 너무 많이 열거해서 이 책이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는데 공정하게 말하자면, 기여는 엄청나고, 남은 아쉬움은 자잘하고, 실수들은 사소하다. 여러 사람에게 큰 도움을 줄, 정말 대단한 책이다. 이런 좋은 책을 써주신 저자께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

강대진 / 서울예술대 강사·고전그리스문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호메로스 『일리아스』의 전투장면의 구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잔혹한 책 읽기』, 『신화와 영화』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