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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 번역이 더욱 값진 '천개의 고원'
[화제의 책] 번역이 더욱 값진 '천개의 고원'
  • 권희철 기자
  • 승인 2001.11.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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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개의 고원』 (들뢰즈·가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 새물결 刊)

철학은 철학 자체로만 존립할 수 있을까. 철학의 가치에 대한 물음이다. 무엇보다 이 가치는 현실적이고 눈에 보이는 가치이다. 대답하기가 간단치 않다. 질문을 바꿔보자. 철학은 바깥의 다른 세계와 공존할 수 있을까. 이는 철학 스스로의 가치를 묻는 것보다 중요할지 모른다. 바깥으로 열려있지 않고 안팎을 넘나들지 못한다면, 그래서 타자의 개입이 허용되지 않는 세계라면, 철학은 오직 철학 안에서만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공저 ‘천개의 고원’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읽힌다. 잠정적인 대답이고, 대답이기 이전에 실험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이것은 하나의 외침, 아니 외침들이다.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침, 즉 개념들을 에둘러 가서 진짜 노래가 될 수 있는 외침들이다.” 이들의 외침(들)에 다양한 수사로 찬사를 늘어놓을 수도 있고, 반대로 바디우가 ‘들뢰즈: 존재의 함성’에서 서술했던 것처럼 비아냥거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늘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목소리의 진의가 아니다. 물론 하나의 외침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들려진 음성 이면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아울러 외침이 어떻게 전달되는지, 왜곡되거나 누락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는 일도 필요하다. 그래서 ‘번역’은 의미있는 일이다. 번역작업이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이기에 더욱 그렇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외침(들)은 그 어느 것보다도 어렵게 들린다. 너무 많은 소리들이 동시에 퍼져 나오기 때문에 난청을 일으켰거나, 천상의 소리여서 지상에 쉽게 전달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쇤베르크의 ‘12음 음악’이 음악사적 평가와는 달리, 즐겨 듣기 어려운 음악인 것과 같다. 번역자의 고통이 이것만은 아니었으리라.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과 정신분석학, 자연과학, 문학 등을 아무런 설명 없이 뒤섞어 놓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언표가 무엇을 지시하는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쨌든 난해하게 읽힐 수밖에 없는 책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읽히도록 한 것이 이 번역의 최대 장점이다. 사실 ‘천개의 고원’의 번역본은 이전부터 떠돌기도 했다. 출판 사정으로 간행되지 못했던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이하 수유너머)’의 번역본이 그것이다. 들뢰즈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킬 때, 많은 연구자들은 복사된 번역본과 영역본을 비교하며 공부했다. 이전 번역에 비하면 술술 읽힌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평가다. ‘들뢰즈의 철학사상’을 번역한 이성민은 칸트철학의 번역과 비교해볼 수 있다며 “그 딱딱하고 암호 같은 문장들에 비하면 쉽게 읽힌다”고 평가했다. 또 여러 명과 나누어 번역을 대조해본 것, 영어·일어·독일어 등의 다른 번역본과도 비교한 작업은 이 번역이 갖춘 또 하나의 미덕이다. 두 가지 번역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인지 이번 번역에 대한 지적들도 상당하다. ‘수유너머’에서는 몇 가지 번역어 채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인 것이 ‘도주/탈주(fuite)’다. 김재인의 ‘도주’라는 번역에 대해 “탈주가 도피가 아니며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와 생성이라는 긍정적인 것이란 점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며 탈주란 “세상/세상사람들을 탈주케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에 김재인은 “도주는 제스쳐가 아니라 실존의 자취”라며 근사하지는 않지만 불가피한 것이라고 대응한다.

세부 번역들에 대한 지적들도 많다. 번역자는 자신의 홈페이지(http://armdown.net)에 따로 게시판을 만들어 논의의 장을 새롭게 펼쳤다. 이성민, 맹정현 등의 지적과 번역자의 답변이 줄을 잇는다. 때로는 그 지적들을 흔쾌히 인정하기도 한다. 이는 번역을 “읽기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읽기”이며 “단순한 사용이 아니라 새로운 제작”으로 이해하는 번역자의 의도로 엿보인다. 완성을 위한 노력만큼, 자신의 작업이 잠정적인 것이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천개의 고원’은 무엇보다 번역의 황무지에서 외치는 천개의 함성으로 다가온다.
권희철 기자 khc@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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