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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성 또는 선과 악의 집단무의식
순수성 또는 선과 악의 집단무의식
  • 이상용 / 영화평론가
  • 승인 2007.10.01 0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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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 80년대 미학을 넘어서] 80년대를 다룬 영화의 시선

 

영화가 지난 시대를 회상하고 소비하는 것은 비단 한국 사회만의 특징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는 한국영화의 주요한 작품들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주목하도록 만든다. 장선우의 ‘꽃잎’, 이창동의 ‘박하사탕’, 황석영의 동명 소설을 옮긴 임상수의 ‘오래된 정원’은 한국의 주요한 감독들이 공통의 관심사를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마다  스타일의 차이가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묶을 수 있는
1980년대는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거대한 집단 무의식이 1990년대 초반 ‘코리언 뉴웨이브’라 불리는 영화군들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상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에 일어난 ‘코리언 뉴웨이브’는 80년대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영화 동아리를 열고 여러 영화 단체를 만들었던 장선우, 박광수, 여균동과 같은 감독들이
새로운 영화를 내놓으면서 형성됐다. 뉴웨이브는 대학생으로(혹은 민주화 운동, 혹은 영화
운동으로) 1980년대를 통과한 세대들이 한국영화 시스템 안으로 들여오는
중요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대들이 만든 영화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1980년대를 청춘의 시절이자 순수의 시절로 다룬다는 것이다. 박광수 감독의 스텝이기도
했었던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현재의 영호(설경구)로부터 출발해,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는 1980년으로 회귀하는 서사구조를 보여준다.

장선우의 ‘꽃잎’에서도 흑백 화면으로 반복되는 금난로 장면은 장편영화 사상 처음으로
광주를 재현하여 화제가 되었던 대목이다. 이정현이 연기하는 현재의 소녀는 미쳐있지만
그날의 소녀는 앳되고 순수한 모습이다. 그러나 1980년의 광주는 소녀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긴다. 소녀는 죽은 어머니의 손을 떼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1990년에 개봉한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은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80년대의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 운동권으로 지명수배 당하고 있는 한태훈(문성근 역)이
탄광촌에서 겪게 되는 파업 과정은 계급과 지역을 초월하여 벌어지는
사회 갈등의 현실이다. 노동자가 된 지식인 태훈은 파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한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태도는 점점 더 조심스러워 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이창동 감독의
최근작 ‘밀양’의 원작인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는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광주를 상징하고 있는 소설이다. 여기에 간극이 있다. ‘밀양’에서는 더 이상 광주를 떠올릴 수 없다.

이창동 감독은 원작에서 ‘광주’를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영화화
하지 않는다. 그것은 광주가 더 이상 대중적 호소력을 지니기 어렵다는 윤리적 사유
때문인가, 아니면 광주에 집착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현실 때문인가. 이러한 간극
사이에서 좀 더 꼼꼼하게 살펴보아야 할 영화가 장선우 감독의 ‘꽃잎’이다. 흑백으로
처리된 금난로 장면이 화제가 되기는 했지만 ‘꽃잎’은 80년대로 들어가 광주를 들여다 본
영화가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진 현재의 시선으로 80년대 광주를 다룬다. 이러한 시선으로
제공하는 것은 ‘우리들’이라 불리는 일군의 대학생들이다. 그들은 광주에 부채의식을 느끼며 소녀의 행적을 따르지만 술에 취해있고,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갈등한다.

이처럼 ‘꽃잎’은 후일담 세대들이 갖게 되는 갈등과 파국을 ‘우리들’을 통해 일찌감치
구현하고 있었다. 이 세대들에게 더 이상 광주는 호출되기 어려운 시공간이다. 질문은
이렇게 나아갈 수 있다. 어째서 최근에 가장 화제를 일으킨 ‘화려한 휴가’를 박광수나
장선우 감독이 만들지 않은 것인가.

역설적이게도 이에 대한 답변이야말로 순수성을 증명하는 사례가 될지도 모른다.
1980년으로 돌아가 광주를 직접적으로 재현한다는 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유명한 다큐멘터리인 ‘쇼아’를 만든 클로드 란츠만이 홀로코스트를
재현하는 장면을 하나도 집어넣지 않은 것처럼 ‘재현의 윤리학’은 언제나 쉽지 않은 결단을 강요한다. 도대체 무슨 권리로 학살 장면을 스펙터클하게 재현한다는 것인가. 

‘화려한 휴가’가 새로운 세대의 젊은 감독을 연출자로 임명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80년대에 대한 직접적인 부채감과 예민함이 사라질 때 눈물어린 호소와 총격전 재현을
가능하게 할 수가 있다. 사실 지난 10년간의 한국영화를 돌아보면 광주를 넘어서 1980년대는 새로운 소재를 만들어 낸 대중영화의 공간이었다. 특히 2000년대 초반에 다뤄진 80년대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야말로 이러한 점에서 중요한 변화를 보여준 매개자들이었다.

조근식 감독의 ‘품행제로’에서 류승범은 ‘경아’와 ‘스잔’ 사이에서 갈등해야만 했고,
김동원 감독의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이정진을 비롯한 달동네 소년들은 친구를 위해 똥을 푸고 디스코까지 춰댄다. 디스코야말로 80년대의 문화적 아이콘이다. 박희준 감독이 만든
‘남자 태어나다’와 ‘마이도’의 소년들은 대학의 꿈을 위해 복서로 변신하기도 했다.

코리언 뉴웨이브 세대의 감독들에게 1980년대는 매번 반복되는 평범한 성장의 시대이다.
하지만 성장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두 편의 주요한 영화가 있었다. 2003년에 선보인
‘살인의 추억’과 ‘지구를 지켜라!’는 화성의 연쇄살인사건과 음모론의 상상력으로 80년대의 암울함을 그리고 있다. 1980년대는 광주와는 다른 또 다른 것이 있음을, 그것은 광주로부터
나온 시대적 공기임을 환기시켜 주는데 성공한다. 두 영화는 대중들에게는 상반된 평가를
받게 된다. ‘살인의 추억’은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된 반면에, 음모론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면서 지구가 폭파되는 것으로 끝이 나는 ‘지구를 지켜라!’는 불운의 걸작으로 남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2003년 이후 한국영화에서 1980년대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한국 영화는 훨씬 더 아래로 내려가 ‘역도산’, ‘청연’과 같은 식민지 시대의
경험을 호출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로 음모론의 역작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음모론은 보편주의의 서사를 구현하면서, 특정한 시대를 망각하여 시대를 초월한
연관성을 끌어당기는 것으로 발전된다. 그 결과, 1980년대는 집중적인 관심의 영역에서
벗어난다. 그것이 음모론의 탈역사적인 태도이다. 

‘화려한 휴가’는 이러한 태도를 과감하게 뒤집는다. 이 영화는 두 가지 점에서 차별됐다.
하나는 한국영화가 1980년의 광주를 직접적으로 호출한 적이 없음을 간파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금난로 전투를 위해 세트를 짓고 거리를 조성함으로써 비극을 시뮬라르크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아이러니는 여기에 있다. 광주를 재현했다고 말하는
이 영화는 정확하게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당시의 상황을 증언한다.

하지만 광주 시민들의 대다수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쉽게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영화가 펼친 선과 악의 이분법은 그날이 아니라 사후적인 것, 즉 오늘날 한국사회에 흐르는 통념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화려한 휴가’를 통념의 역사물이라고 하는 데에는 동의할 수 있겠지만 광주를
생생하게 증언한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날 왜 총을 쏘고, 사람들이 죽어 가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 그 막막함의 감정이야말로 광주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중요한 근거가 아닐까. 여전히 우리는 그 태도에 대해 좀 더 내밀한 성찰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상용 / 영화평론가


 

필자는 현재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와 계간 필름 2.0 스텝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단편영화의 쟁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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