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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황혼녘에 날아올라야 하는 이유
철학이 황혼녘에 날아올라야 하는 이유
  • 박구용 / 전남대·철학과
  • 승인 2007.10.0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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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 80년대 미학을 넘어서] 80년대 이후 철학의 과제

프란시스코 고야  作, 로스 카프리초스 제 43번 ‘이성이 잠들면 괴물을 낳는다’, 1799, 에칭&에쿼틴트, 7 1/8 x 4 3/4 inches, 그림 일부

 

 

 

 

 

 

 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의 육체는 해방되었지만 정신은 예속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민족은 해방 후 줄곧 남들이 만든 사상에 현혹되어 넋을 잃고 혼을 빼앗긴다. 더구나 남들끼리 벌이는 사상싸움은 우리끼리의
정치싸움이 된다. 1950년 6월, 결국 한반도는 생사를 건 대리전쟁에 휩싸인다.

1958년 ‘정신의 해방’이라는 목적의식을 갖고 출발한 ‘한국사상연구회’가 발간한
『한국사상』의 창간호 서문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6·25는 정신의 노예상태가 초래한
민족비극’이라는 철학적 진단을 제시한 ‘한국사상연구회’는 전통사상으로의 회귀에서
‘우리의 철학’이라는 해방구를 찾는다.  그러나 ‘전통사상=우리의 철학’이라는 등식은
제국주의 침략에 의해 자기상실을 강요당한 역사가 있는 국가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낯익은 주장이다. 강화도조약을 기점으로 조선은 일본이라는 필터를 통과한
양정신에 의해 자기상실을 강요받는다. 이 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

첫째, 위정척사파처럼 서양정신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주자학을 ‘우리의 철학’으로
내세우면서도 ‘우리’의 이름으로 억압받아온 계층을 서로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반응이다. 둘째, 개화파처럼 서양정신을 보편정신으로 규정하는 ‘모두의 철학’에 철저히 귀속되는
경우다. 이들도 남이 만든 기준에 따라  ‘우리’를 변화시키려고 했을 뿐, 우리 안의 시민이나 민중을 변화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전자가 나르시스적이라면, 후자는 에코적이다.

결국 한국의 해방 전후 철학사는 나르시스와 에코의 엇나간 사랑이 끝없이 반복되는
과정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차이는 너무나 사소했다.

6·25 이후 7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철학계는 미국에서 수입한 실용주의와 유럽에서 수용한 실존주의가 ‘모두의 철학’으로서 한 축을 이루었다면, ‘우리의 철학’으로서 유불도의
전통사상이 다른 축을 형성했다. 피상적으로 보면 두 축은 적대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철학적 문제찾기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의 동맹관계는 안호상, 박종홍, 이규호의 국가철학에서 그 자취를 발견할 수
있으며, 특히 70년대 유신철학의 리듬에 박자를 맞춘 국민윤리학의 탄생에서 확인된다.
국민윤리 교육은 한국을 철학이 부재한 나라, 곧 정신없는 나라로 만들었다.

서양철학 연구자들은 앞 다투어 외국의 새로운 철학을 소개하는 것에 열중한 반면,
전통철학 연구자들은 과거로 끝없이 회귀할 뿐 한국의 현재와 대결하지 않았다.
유신철학과 국민윤리는 시대적 현실을 외면한 두 철학이 만나 사랑을 나누면서 상상임신을 한 결과물이었다. 자기상실의 비극적 체험은 서양정신에 현혹되어 몸을 맡기는 것으로도,
그렇다고 떠나버린 전통사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도 치유되지 않고, 오히려 상상임신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낼 뿐이다. 상상임신도 입덧을 하게 마련이다. 입덧은 이질적인 것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자기를 키워가는 코라(chora)의 생산적 아픔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에
기생하려는 노예적 근성에 내려앉은 또 다른 상처였을 뿐이다. 그 상처가 품고 있던 고름이 덧나서 터진 것이 1980년 5·18민중항쟁이었다. 스스로가 매혹적이지 못한 상태에서
상대에게 현혹된 상상임신은 그만큼 비극적이었다.  80년 광주항쟁은 충격 그 자체였다.
특히 그동안 민주화를 열망해온 시민들과 젊은 지식인들에게 80년은 이해나 해명이 불가능한 사건이었으며, 따라서 사회, 국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틀을 요구하는 부름이었다.

이 부름에 가장 먼저 응답한 것은 예술이었다. 김남주의 『학살』과 홍성담의 『대동세상』,
그리고 신경호의 『넋이라도 있고 없고』가 대표적인 예술이다. 여기서 5·18은 지나간 역사의 구호가 아니라, 폭력에 저항하는 부서진 벽돌이었고, 분노로 흩날리는 깃발이었다.

이제 더 이상 하나의 국가, 하나의 역사는 없었다. 그 때문에 80년대 말까지 5·18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온한 저항이었다. 임동확, 황석영, 김준태, 박노해, 서중석,
강만길, 김민수, 김용수, 이태호 등이 이 저항의 대열에 참여하지만 그곳에 철학자는 없었다.
80년대 전반을 뒤흔들었던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은 우회적이기는 했지만 광주민중항쟁이
요구한 새로운 인식의 틀을 마련하기 위한 하나의 자생적 거대 담론이었다.

여기에 학생, 재야 운동권, 학계 내외의 좌우파가 광범위하게 참여하면서 다양한 관점들이
제시됐지만, 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논쟁은 남한을 식민지반봉건 사회로 규정하는
주체사상파와 신식민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파악한 마르크스주의자의 대결로 재편된다. 결과적으로 PD로 약칭되는 마르크스주적 관점이 논쟁에서 판정승을 거둔 것처럼 보였지만, 89년 동독에서 시작된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치열하게 참여했던
한국사회구성체 담론 자체가 관념적 허상에 기초했었다는 것을 폭로했다.

한국근현대사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최대의 논쟁이었던 한국사회구성체 담론에서 승리한 쪽은 없었으며, 엄밀한 의미에서 담론 자체가 실패한 것이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두 가지가 핵심이다. 첫째, 담론 자체가 경제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둘째, 앞에서 언급한 나르시스와 에코의 비극적 사랑을 반복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거칠게 말한다면,  철학의 부재가 사회구성체 담론이 실패한 근본적 원인이었던 것이다.
한국철학사에서 80년대는 변증법의 시대였다. 헤겔, 마르크스,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대변했던 변증법은 현실에 대한 철학적 관심이 커짐에 따라 급속하게 확장됐다. 사회변혁운동에서도 변증법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유했다. 많은 사람들은 변증법을 시대의 철학, 현실의
철학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시대의 철학, 현실의 철학은 어떤 특정 이론이 아니라,

시대와 현실에 물음표를 던지는 이론적 실천이다. 물음표를 빼앗기는 것은 답안지만이
아니라 자유까지 빼앗기는 것이다. 자율적인 문제찾기를 포기하고 남이 찾은 문제의 풀이에 몰입하는 것은 시대의 철학, 현실의 철학이 아니라 노예의 철학일 뿐이다. 따라서 변증법이 시대의 철학, 현실의 철학과 만나야 할 지점은 문제찾기가 아니라 문제풀이의 과정이다.

그러나 한국의 80년대 철학은 문제찾기의 과정에서부터 변증법에 현혹됐다.
90년대 이후 많은 젊은 철학자들이 변증법의 유혹에서 벗어났지만, 그들은 곧바로
다른 서양정신인 해체주의에 현혹됐으며, 최근에는 그에 대한 반성적 고해성사를 하고 있다. 에코처럼 남의 끝말만 따라하는 한국철학에 여전히 정신의 독립운동이 절실한 이유다.

철학의 거울에 80년대는 한 시대가 아니라 두 시대다. 87년(6월 시민항쟁, 9월 노동투쟁)은
두 시대가 갈라서는 분기점이다. 80년에서 87년까지의 시대가 개발독재의 억압 속에서
시민들의 상호주관적 서로주체성이 성장하는 시기였다면, 87년 이후의 시대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서 민족, 국가, 시장이라는 독단적 홀로주체들이 각축을 벌인 시기다.
홀로주체들의 경쟁은 90년대로 이어지지만, 97년을 기점으로 시장이 권력을 독점한다.
87년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꾸준히 진행된 민족과 국가의 해체 노력은 결국 시장의
권력 독점에 기여하고 말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87년 체제의 극복을 위한 최근의 담론이 진정성을 갖기 위해서는 시장지상주의를 해체하는 것에 관심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철학은 홀로주체성에서 서로주체성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만 하며,
이를 위해 먼저 87년 이전에 시민들이 형성한 서로주체성을 개념화해야 할 것이다. 
물론 87년 이전 시대를 지배한 것도 사실은 개발독재국가라는 강력한 홀로주체였다.
그러나 당시 시민들은 홀로주체였던 독재국가의 정당성에 끝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저항하고 연대했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서로주체로 성장했으며, 그 결과로 형식적 민주주의에

기초한 87년 체제를 탄생시켰다. 따라서 87년 체제는 80년 광주민중항쟁에서 시작돼
87년 시민항쟁과 노동투쟁에서 형성된 서로주체성의 현실태였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철학이 87년 체제를 극복한다는 것은 그 당시 시대적 현실태로 등장한 서로주체성을
개념화함으로써 새로운 서로주체들의 세계를 가꾸어 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시대의 개념화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가야 하는 철학의 이러한 임무를 자각한 몇몇
젊은 철학자들이 모여 87년 『시대와 철학』(까치)이라는 부정기간행물 1호를 내놓는다.
이들은 시대의 아픔과 고민을 같이하면서도 개념적 긴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철학의
자기해방이 전제돼야 한다고 선언한다. 이들이 말한 ‘철학의 자기해방’은 30년 전
‘한국사상연구회’가 지향했던 ‘정신의 해방’과 동일한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해방을 위해
‘한국사상연구회’가 전통사상으로 회귀하는 나르시시즘에 빠졌던 반면, ‘시대와 철학팀’은 한국사회의 억압적 구조, 특히 분단과 예속의 구조를 폭로함으로써 시대정신을 비판하고
새로운 정신을 형성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그날의 다짐은 80년대가 끝날 때까지
지켜지지 못했다.  1990년 ‘시대와 철학팀’을 끌어안으며 만들어진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시대와 철학』 창간호를 다시 발간하면서 시대의 철학이라는 깃발이 다시 올랐고,

같은 해 ‘철학문화연구소’가 『철학과 현실』을 출간하면서 철학을 관념의 허공에서 현실로
끌어내리는 연구가 꾸준히 진행됐다. 나아가 2001년 ‘사회와철학연구회’가 『사회와 철학』을 내놓으면서 나르시스나 에코의 어긋난 사랑에 빠지지 않고 한국사회의 시대적 현실과
비판적으로 대면하려는 노력이 더욱 확대됐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철학은 아직까지 한국의 역사와 사회, 그리고 시대를 개념화 하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 한계는 매혹적인 불빛만을 지향하는 한국철학의 오랜 습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시대를 개념화하기 위해 한국철학이 어둠이 빛 속으로 사라지는 새벽녘이 아니라
빛이 어둠으로 교차되는 황혼녘에 날갯짓을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박구용 / 전남대·철학과

필자는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자유, 인정, 그리고 담론’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남대 철학과 교수와 철학연구교육센터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우리 안의 타자』가 있고, 역서로는 『정신철학』과 『도구적 이성 비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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