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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기획시리즈]일제하의 법과 사회, 어떻게 볼 것인가
[역사비평 기획시리즈]일제하의 법과 사회, 어떻게 볼 것인가
  • 교수신문
  • 승인 2007.07.0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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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폭압의 대표적 기제’로만 여겨져오던 일제시대 법제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다양성을 획득하게 된다. 두 필자는 일제시대 법제를 제국 전체 통치체제의 일부로 조망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언급하고 일제하 법 연구의 쟁점들을 조목조목 설명한다. 김창록 교수는 그러면서도 법과 법률가의 권위가 기이하게 확장된 현재 상황의 뿌리를 식민지법의 경험에서 찾아야 한다며 일제하 법 연구는 여전히 ‘해방의 기획’일 수 있다고 밝힌다.

#1. 일제 법제 연구 제약 많아…자료 개방 필요

일제시대의 법제와 그것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맥락에 대한 역사학적 연구는 1960년대 말, 7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대의 연구들은 ‘잔학’, ‘간악’,‘악랄’하고 ‘비인도적’이며 ‘야만적’이고 ‘단말마적’인 ‘만행’으로 점철된 일제의 통치를 규탄하는 언사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한 언설 방식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법사학의 분야에서는 도덕적 평가와 가치판단을 전면에 드러내는 선악이분법적 역사서술에 대한 반성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는 것은 새삼스럽다. 일부 연구가 보이는 관점과 서술태도에 대한 ‘정치적’ 비판에 몰두하면서, 의미 있는 연구사적 성과를 내용적으로 음미하거나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데 미흡했던 점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대해 참여자의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아쉬움이다. 이하에서는 관점에 따른 편 가르기 없이 근래의 연구 경향과 성과를 요약하고, 연구가 기대되는 쟁점, 앞으로의 전망을 제시해 본다.

아직도 횡행하는 ‘악법규탄’식 연구
첫째, ‘악법’을 규탄하는 식의 연구들이 직접적인 폭력의 행사 수단으로서의 법의 모습에만 주목하고 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일제가 시행한 법제를 제국 전체의 통치체제의 일부로서 조망함과 동시에 제국을 설명하는 공법 담론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분석하는 작업이 수행되었다.
일본 헌법학자들의 사상을 해부한 김창록은 동화와 차별이라는 지배 전략의 이중성이 어떻게 제국의 질서를 규정하는 공법 담론에 논리적 모순과 긴장을 가져왔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연구는 제국주의 속에 재정의되는 일본의 민족정체성과 일본적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음미할 수 있다.
둘째, 제국 전체의 일부로서 한국 지배를 보는 넓은 시야가 절실하다. 2002년 한국법사학회가 전남대에서 개최한 <동아시아에서의 법, 식민주의, 근대성> 학술대회는 의미가 크다. 제국 법제의 구조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꾸준히 많은 연구가 생산되고 있다. 법제에 대한 연구는 일본제국주의의 특성을 밝히려는 학제적 연구 및 비교 연구와 협력할 것이 기대된다.
1980년대와 90년대 두스(Peter Duus), 피티(Mark Peattie), 마이어스(Ramon Myers) 등이 중심이 되어 프린스턴대 출판부에서 출간한 일련의 일본제국주의 연구는 한국 학계에서 가끔 참고 되고 있으나 충분히 분석, 평가, 비판되지 못한 것 같다. 근래에는 아리기(Giovanni Arrighi)의 세계체계론적 이론틀을 원용하면서 일본제국주의의 전략을 유럽형 식민주의와 구별되는 신제국주의(new imperialism)로 규정한 두아라(Prasenjit Duara)의 시도가 주목을 끈다. 이는 한국 학계의 식민지근대화론과 잠재적 친화력을 갖는다.
셋째, 일본제국주의와 고전적 식민주의의 차별성은 일제의 논리와 전략뿐만 아니라 한국의 특수한 지위에도 기인한다. 세계사적, 비교사적 안목을 가지고 보게 되면 ‘식민지’로 일반화되는 수많은 나라 중 한국이 가지는 특수성을 깨닫게 된다. 스트랭(David Strang)은 제도주의 국제관계이론에 입각하여 ‘주권’이 허구적인 개념이 아니라 국가의 행위를 규율하는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1415년에서 1987년에 이르는 장기의 동향을 연구한 결과, 2개 이상의 서구 국가에 의해 승인된 비서구국 중 단지 11개만이 종속적 지위로 격하되었고 15개만이 소멸했음을 발견했다. 한국은 그러한 드문 사례의 하나이다. 베스트팔렌 국제질서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가 병합된 한국의 특수한 지위는 일제 지배가 무력강점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식민지’라는 용어의 적용을 거부하는 이태진의 어법을 재음미하게 한다. 그것은 을사조약과 병합조약의 효력 문제가 놓인, 그리고 논해지는 맥락을 새롭게 이해하게 해준다.
넷째, 악법규탄적 서술이 일제하의 제도 변화를 폭력의 증가로 단정하는 것에 비해, 권력의 성격 변화, 심화, 그리고 권력이 행사되는 새로운 지점의 확대에 주목하는 연구들이 생산되었다. 푸코의 규율과 통치성의 개념을 이론적 자원으로 활용하는 이 연구들은 일상생활의 깊숙한 영역에 미치는 앎과 힘의 양상들을 드러낸다. 일군의 사회사학자들은 인구에 대한 과학적 접근, 각종 등록제도의 도입과 정비, ‘몸’을 새로이 구성하는 생체권력(bio-power)의 작용을 여러 실천영역에 걸쳐 식별하고 묘사하는 성과를 일구어냈다. 이러한 이론적 진전과 서술방식의 개발은 국가가 규율을 전유하는 계기이자 통로로서 법제를 분석하는 데 자극을 준다. 주제와 관련해서는, 폭력적 탄압을 내용으로 하는 ‘악법’ 연구에서 보건, 위생, 교육의 영역에서 시행된 각종 규제들에로 관심이 넓어진다. 물론 감옥과 형사사법 등 전통적인 주제도 새로운 이론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논의되고 있다.
다섯째, 행정권력의 체계화 등 기든스(Anthony Giddens)이 말하는 근대국가의 국내평정(internal pacification)만으로 일제하에 일어난 권력의 변화를 묘사할 수는 없다. 국체(國體)의 개념, 농본주의 이념, 정신주의 등 일본 특유의 관념이 제도와 통치 작용을 어떻게 모습지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러한 측면은 ‘식민지적,’ ‘일본적’ 또는 ‘아시아적’이라는 수식어의 적용 속에 ‘근대’에 대한 왜곡 또는 공제로서 치부되기 쉽다.
그렇게 취급하는 것은 통치 이데올로기를 일본인에게 주어지고 조선인에게 강요된 특이한 세계관, 우주관으로 전제하고 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한 요소가 법제에 반영되거나 법을 외부에서 제약할 때 그것은 ‘전근대적’이고 ‘반법치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말 뿐이다. 앞으로는 일제 특유의 이념적 요소들이 어떻게 사회의 조합주의적 재편성에 동원되었는가, 그것이 증대되는 통치합리성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분화되어가는 의사소통체계들, 특히 법체계와 그에 대한 환경을 이루는 체계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제약하고 교란하였는가와 같은 사회학적 의문에 답하는 연구가 기대된다.
여섯째, 한국의 관습에 대한 일제의 정책을 동화주의로 보는 관점이 오래도록 지배적이었다. 조선민사령의 단계적 개정을 통해 일본식 ‘가’제도가 이식되어 한국의 가족제도에 강요되었음은 이러한 견지에서 자주 듣는 바이다. 이에 대해 이승일은 총독부의 정책은 관습을 법인(法認)하고 성문법화하는 것이었지 왜곡하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반론을 제기했다.
한편 심희기는 이승일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일제의 정책은 그들이 유도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관습을 형성해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희기의 입장은 법인류학과 사회사에서 주류가 된 ‘전통발명론’의 관점과 닿아 있으며 가족관습에 대한 양현아와 홍양희의 연구와 공명한다.
그런데 이렇게 대립하는 세 관점은 실제로 관습이 취급된 서로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가족관습에만 국한하지 않고 토지소유, 소작관계 등 여러 분야의 관습들을 모두 시야에 넣고 보면, 구관습의 부정, 기존 관습의 성문화, 새로운 해석에 의한 관습의 창출 등 다양한 모습들이 모두 나타난다. 또 관습을 부정했다고, 법인했다고 또는 창출했다고 말할 때에 범하기 쉬운 것은 기존의 관습이 하나로 고정되어 있다고 믿는 오류이다. 관습을 확정된 코드가 아니라 의미를 협상하는 유동적인 과정으로 본다면, 관습을 취급하는 당국의 태도뿐만 아니라 관습을 주장하거나 다투는 분쟁 당사자들의 의미세계도 여러 이익에 의해 동기화된 가변적인 것이었음에 유의하게 된다.

일제시대 법제 연구 심화
마지막으로, 일제시대의 법제에 대한 지식이 역사학과 실정법학의 협력 속에, 법적 텍스트와 사례에 대한 분석을 통해 심화되고 있다. 조선고등법원 판례를 분석하는 근래의 연구들을 보면, 이제 일제시대의 법제에 대한 연구가 한국법과의 실무적 연관성이 없이 순수한 역사 연구로 자리를 잡았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법원도서관이 추진하고 있는 조선고등법원판결록의 번역이 완성되면 법학 전공자의 연구 참여도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상급심 판결이 공식적인 법운용 방식과 이데올로기를 탐구하기 위한 사료로서 중요하다면, 하급심 판결은 사법 실태에 대한 법사회학적 고찰을 위해서는 물론 지방사의 자료로서도 유용하다.
나는 광주고등법원 순천지청의 일제시대 민사판결을 보존되어 있는 한에서 모두 분석한 경험이 있다. 이 자료 자체는 현재 역사가들이 활용할 수 있는 상태에 놓여 있지만, 이와 유사한, 공개되지 않은 사법부의 자료를 사용하는 데에는 제도적 제약이 따른다. 조선고등법원 판결뿐만 아니라 하급심 자료도 역사 연구에 개방되고, 그것을 활용하는 학제적 연구가 활성화되었으면 한다.

이철우 / 연세대·법학과

 


 

필자는 영국 런던정경대에서 ‘한 식민지 사회에서 법, 문화, 갈등 - 일제하 한국 농촌’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논문으로 ‘일제하 근대성, 법치, 권력’ 등과 국적·시민권 관련 논문이 있다.

#2. 1980년대 후반은 ‘식민지법’ 연구 전환점

일제 강점기는 아직도 거의 습관적으로 억압과 착취, 고문과 연행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 시기가 적나라한 폭력으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동시에 ‘법의 시대’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법령집람>(1940)에는 1940년 현재 식민지조선에서 시행 중인 중요한 법령만 2천7백20여개가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1978년 현재 한국에서 시행 중인 헌법·법률·명령의 총수 2천8백64개와 맞먹는 숫자이며, 2007년 현재의 4천1백74개와 비교할 때도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이다. 이렇게 법령의 숫자만 가지고 따진다면 일제의 지배는 지금 못지않은 ‘법을 통한 지배’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제는 그 많은 법들에 의해 짜인 틀 속에서, 역시 그 법들을 통해 정해진 구체적인 방식에 따라 그 지배를 관철했다. 따라서 식민지법은 식민지지배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식민지법, 식민지배 실상접근 중요한 실마리
한편 식민지법은, 예를 들어 밀주 단속을 빌미로 안방 장롱 속까지 뒤질 수 있는, 막대한 권한을 식민지 권력에게 부여함으로써, 식민지 인민의 일상생활을 구석구석까지 지배했다. 또한 식민지 인민들도 각종 인허가제도나 법정에서의 소송을 이용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식민지법에 접촉하기도 했다. 따라서 식민지법은 피지배자의 관점에서 식민지의 실상에 접근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법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활성화되지 못했다. 식민지법은, 일부의 학자들에 의해 그 억압적인 측면이 부각되어 ‘전근대’적인 것으로 낙인찍히거나, 다른 학자들에 의해 그 기술적인 측면이 부각되어 “불유쾌한 매개자”에 의해 수용된 서양 ‘근대법’으로 자리매김 되는 데 머물렀다. 이와 같이 ‘서양 근대’를 매개로 한 양극단의 평가 속에서 식민지법에 대한 파고 든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대다수의 법학자들은 식민지법학의 관성에 휩쓸려 주어진 현행법의 해석에 몰두할 뿐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의 대내외적인 환경 변화는 식민지법에 대한 새로운 주목을 불러왔다. 권위주의 정권의 붕괴와 냉전의 종식은 한국 사회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던졌으며,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로서 식민지법에도 주목하게 만든 것이다.
이후 식민지법에 대한 연구는, 식민지체제 전반에 대한 연구가 그러한 것처럼,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놓았다. 우선, 식민지법 자체에 대한 분석이 심화되었다. ‘법률의 효력을 가지는 명령’이라는 특수한 법형식인 제령을 중심으로 하는 식민지법령의 체계가 분석되었다.
같은 억압과 수탈과 황민화에 관련된 법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그 부분적인 특징을 도려내어 웅변적인 평가와 연결짓는 이전의 조악한 작업에서 벗어나, 법령의 체계와 변화 과정을 종합적으로 드러내는 진전된 연구가 이루어졌다. 식민지 최고법원인 조선고등법원의 판결들을 민법, 상법, 노동법, 형법 등 각 법영역으로부터 파고들어 분석하는 연구도 이루어졌다. 일제에 의한 관습조사가 재검토되었고, 관습이 관습법으로 인정되는 과정과 그 의미가 분석되었다. 특정 지역의 하급심 판결에 대한 매우 치밀한 법사회사적인 분석도 제시되었다.
다음으로, 연구 대상의 범위도 확대되었다. 주로 민형사 법령과 판례에 대한 분석으로 출발한 연구는, 한편으로 검찰제도를 포함한 사법제도와 감옥제도, 그리고 국적법과 참정권에 대한 연구로 확산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식민지의 법학자와 법률가에 대한 분석으로도 발전되었다. 일제의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식민지법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가 주목되었으며, 사회사학자들에 의해서는 ‘규율’이라는 분석 개념을 매개로 가족, 병원, 학교, 공장 등의 일상영역까지도 분석의 범위 속에 포섭되었다.

식민지 사법, 일정한 독립성도 유지
또한, 식민지법을 식민지조선이라는 영역적 틀을 벗어나 ‘일본 제국’ 혹은 국제관계 속에서 자리매김하려는 새로운 시도도 등장했다. 일제의 헌법이 식민지조선에서는 그 입헌주의적인 부분은 배제되고 신권주의적인 부분만이 관철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동일한 치안관계법도 일제와 식민지 사이에서 그리고 식민지들 사이에서 각각 다른 강도로 적용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식민지조선의 사법제도가 대만에서 일제가 형성한 식민지 사법제도의 제국 속으로의 확산과정 속에 자리매김 되었다. 그리고 특히 일본 학자들에 의해서, ‘일본 제국’이 처해있던 국제질서 속에서 식민지법의 위상을 찾으려는 노력도 기울여졌다.
끝으로, 1990년대에 들어서 북한과 일본 사이에 관계정상화 교섭이 시작되고 한일간에도 과거청산 문제가 다시금 불거진 것을 계기로, 일제 지배의 법적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을사조약을 비롯한 1900년대 초의 한일간 조약들이 새롭게 조명되기도 했다. 조약의 체결과정에서의 강박에 대한 상세한 역사학적 조명이 가해졌으며, 당시의 국제법학 속에서 조약의 효력이 재검토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연구들은, 식민지법의 복잡하고도 다양한 모습과 시간의 흐름에 수반되는 그 미세한 변화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냈다. 식민지법은 단순히 지배자의 억압을 위한 기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 인민에 의해 적극적으로 이용되는 것이기도 했으며, 조선총독부의 일방적인 명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 본국인 일제 및 다른 식민지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당시의 국제질서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고 전개된 것이기도 했으며, 식민지사법은 비록 식민지적 한계 속에서이기는 했지만 일정한 독립성을 유지한 측면도 있었다는 사실들이 새롭게 밝혀졌다.
다양한 대상에 대한 다양한 방법에 의한 분석은 더욱 심화되어야 하며, 그것을 통해 식민지법을 비추는 영상의 화질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가는 작업은 지속되어야 한다. 어설프게 돌아본 풍경에 대해 과도한 감탄을 쏟아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법령과 제도는 물론이고, 그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생각과 그 양자가 서로 어울려 만들어낸 식민지법의 다양한 모습들을 다양한 사회과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파헤쳐내는 지속적인 작업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개개의 영상의 선명한 화질에 감탄을 연발하다가, 홀연 풍경을 이루지 못하는 수많은 조각 영상 속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위험은 없는 것인가. 이것은 ‘왜 식민지법인가’라는 질문과 관련이 있다. 일본의 학자들이, 이제는 중요한 화두가 된 아시아 침략에 대한 반성이나 냉전 이후의 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진출의 가능성 탐색이라는 맥락 속에서 식민지법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현재의 시점에서 한국의 학자들이 왜 식민지법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거듭거듭 되짚어보는 작업 또한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1980년대 후반에 식민지법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을 때의 열정을 재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현재 법률가 특권의식 뿌리는 식민지법
그 작업과 관련해서, ‘민주화 이후’ 한국의 새로운 법상황은 중요한 시사를 준다. 한국에서 법은 더 이상 권위적인 억압의 도구가 아니며, 법률가는 더 이상 권력의 시녀가 아니다. 10년 전만 해도 문제가 생기면 일단 돌멩이와 화염병을 들고 거리로 나섰던 사람들과 역시 거리에서 구사대와 전경을 동원해 그들을 막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모두 다 법원으로 선관위로 헌재로 몰려가고 있다. 각하라는 존칭을 생략하면 큰일날 존재였던 대통령의 지위와 행동마저 법률가의 결정에 의해 심대한 영향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민주화 이후, 법과 법률가는 어느 날 갑자기 난장이에서 거인으로 변신하여 우리 앞에 서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지지자들의 모임에서 한 강연에서, 자신과 반대되는 입장에서 자신을 비판해 온 정당과 정치인에 대해 정치적인 견해를 밝히는 것을 법이 나서서 막아야 한다고 단정하는 법률가들의 오만한 법물신주의를 접하게 되면, 이 거인의 정체는 실은 무서운 괴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작은 법조의 특권의식과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벼운 논리조작에 의해 세계를 재단할 수 있다고 믿는 천박한 사고방식, 그리고 그것이 여전히 받아들여지고 있는 국민적 법현실의 뿌리는 최고도의 효율적인 지배를 위한 도구로서 부과된 식민지법의 경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점에서 식민지법 연구는 여전히 ‘해방의 기획’이어야 한다. 물론 해방은 소리 높인 구호에 의해서가 아니라 설득력 있는 분석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김창록 / 경북대·법학과


필자는 서울대에서 ‘일본에서의 서양 헌법사상의 수용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령에 관한 연구’, ‘한·일간 과거청산에 있어서의 국가의 논리와 개인의 권리’ ‘일본에서의 대일과거청산소송’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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