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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도 없고 영화도 없는 '임권택式 서사'
소리도 없고 영화도 없는 '임권택式 서사'
  • 교수신문
  • 승인 2007.05.26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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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임권택 감독 ‘천년학’

임권택 감독은 눌변이다. 곰씹듯이 느리게 말하는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말투에 익숙해져야 할 뿐만 아니라 행간을 새겨듣는
요령 또한 필요하다. 그러다보니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듣게 되는 경우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듣는 순간보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그가 말하고자 했던 바가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 한없이 느린 발걸음으로 흘러가는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은 이런 점에서 유난히 감독을 닮은 영화인 셈이다.
이청준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를 각색한 <천년학>은 여러 평론가들이 지적하듯이
거의 복기가 불가능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감독의 대표작인 <서편제>의 리메이크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는 있는
<천년학>의 주요 등장인물은 물론 줄거리의 상당 부분이 <서편제>와 겹친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송화와 동호, 유봉의 삶이 이야기의
큰 축을 이끌어가고 있는 가운데 이번 영화에서는 용택이라는 인물이 새롭게 추가되어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지만 그의 역할은 부가적인 것일 뿐이다.
이미 알고 있는 인물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이 영화를 기억 속에서 재구성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관객들이 곤경에 빠지는 이유는 이 영화의 독특한 서사구조 때문이다. 눈먼
소리꾼 송화와 그녀를 연모하는 동호와 용택, 그리고 송화의 소리를 사랑하는
유봉과 백사노인의 모습을 그린 <천년학>은 변형된 피카레스크식 구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느슨한 서사구조를 가진 영화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건들은  느슨한
인과율에 지배를 받으면서도 개별적인 에피소드들 안에서는 독립적인 영역을 구축하게 된다.
 그 결과 이야기들은 매끄럽게 흘러가기보다는 굽이굽이마다 부딪히며 덜컹대는
듯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천년학>뿐만 아니라 90년대 이후 만들어진 임권택의
대부분의 영화들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현상이다. 90년대 이후 임권택 감독은 감독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劇性’을 거의 고려하지 않고 영화를 만들고 있다. 관객의
자율성이 극도로 제한된 영화의 관람조건을 고려할 때 이런 불친절한 이야기방식은 관객들이
 영화를 따라가는 데 있어서 상당한 어려움을 안겨주게 된다. 임권택 감독에 대해
대단히 호의적인 평론가 정성일마저도 때로 ‘줄거리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관객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이런 이야기 방식에 대해 또다른 평론가 김영진은
‘수제비를 떠서 끓는 물에 집어넣듯이 플롯이라는 주형에 이야기의 덩어리를 썰어 넣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비약과 생략으로 대표되는 임권택의 서사방식은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특히 <개벽>이나 <태백산맥>처럼 거대담론이 개입되는
작품에서 그 비판의 강도는 더욱 높았다. 반면 ‘극히 일상적인 생활 모습에서 인간을
실감하게 될 때’ 그의 서사방식은 독창적인 매력으로 다가오는데, 여러 인물들을 중심으로
독립된 에피소드들이 산개되어 있는 <축제>나 듬성듬성한 서사를 판소리의 리듬으로
연결해 나가는 <춘향뎐>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감독은 자신의 연출방식이 영화의 전체적인 극성을 포기하는
대신 개별 에피소드들의 극성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천년학>의 경우 백사
노인과 송화의 에피소드나 동호와 송화의 제주도 에피소드 등은 감독이 지향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해주는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서사방식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 <천년학>은 <서편제>보다는 오히려 감독의 전작인 <하류인생>의
연장선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먹 세계와 영화판을 오가는 한 건달의 삶을
다룬 <하류인생>은 <천년학>과 마찬가지로 영화 전체의 기승전결과 인과율을
가다듬기보다는 에피소드들을 거의 등가적으로 배치시킴으로써 개별 에피소드에 대한
관객의 체험을 극대화시키고 에피소드들의 독립성을 완성시켜 나간다. 이런 구조 탓에
이 두 편의 영화는 모두 관객들에게 개별적인 에피소드는 뚜렷한 기억으로 남았지만 이
기억들의 총합인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는 불완전한 기억으로 남는 공통점을 가지게 된다.
이처럼 임권택 감독이 충무로적 혹은 고전적이라 불릴 수 있는 기승전결에 충실한
서사구조의 관습에 저항하는 이유는 이런 매끄러운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효과들에 대해 그가 점점 더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잘 구축된 극적 구조가 영화의 긴장감을 상승시키고 관객의 감정을 고양시키는 데는
기여하겠지만 삶의 진실을 표현하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감독은
사건의 전후관계를 일일이 설명하기보다는 그것을 생략해버리는 방식을 선택한다. 감
독의 대표작인 <서편제>의 경우만 하더라도 감독은 송화가 눈이 멀게 되는
장면이나 유봉이 숨을 거두는 장면과 같은 극적인 장면을 의도적으로 생략한다.
대신 감독은 병석에 누운 유봉이 “알고 있었지? 그러면 용서하겠느냐?”라고 물었을 때
송화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장면을 통해 앞선 장면들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것들을
함축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그가 생각건대 삶이란 단순한 인과율로 설명할 수 없는
비밀스러움과 모호함을 간직한 것이다. 따라서 어차피 영화가 생의 다양한 측면들을
모두 보여줄 수 없다면 차라리 그것들을 여백 속에 남겨두자는 것이 감독의 생각인 것이다.
이렇게 생략된 서사의 빈 공간에 감추어진 의미를 포착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관객들이다.
어차피 영화란 관객들의 정서적 경험을 통한 이차적인 몽타주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기에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이전보다 더 많은 것들을 비워버린다. 그 결과 이 영화는
오동진의 표현대로 “놀랍게도 소리도 없고, 영화도 없고, 다만 걸어 왔던 길만이 남아있는”
영화가 되었다. 그 텅 빈 길을 바라보는 우리의 귓가에 “꿈이로세, 꿈이로세”
노래가락이 울려 퍼진다. 그런데 그 슬픈 노래를 부르는 이는 송화도 동호도 아닌 바로
임권택 감독 자신이다.

김이석 / 동의대 영화학과

필자는 파리 8대학 영화학과 DEA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미학’, ‘L’image du temps dans les films d’Andre Tarkovski’ 등이 있으며, 공역으로 ‘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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