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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화 노선’에 근거한 등소평 리더십
‘현대화 노선’에 근거한 등소평 리더십
  • 교수신문
  • 승인 2007.05.2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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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中國 散策] 등소평의 개혁개방론


 

□ 계획경제를 대신해 시장경제를 새 정책으로 정립시키는 것은 하나의 혁명이었다. 등소평은 스스로 개혁 개방을 ‘제2의 장정’이라고 말했다.

‘개혁’이란 말이 나오면 중국의 ‘개혁 개방’부터 생각하게 된다. 허구 헌 날 ‘개혁’을 부르짖는 한국의 개혁 실체와는 많은 거리가 있을 것 같은 ‘중국의 개혁’이 먼저 머리에 떠오른다. 중국의 개혁 개방은 노선과 지향이 분명하고, 실체가 확실하고, 그 열매는, 한 마디로 ‘國利民福’과 직결된다. 역풍과 시련을 이겨낸 흔적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도 역사적인 가치와 의미를 더해준다. 
좌파 원로들이 계획경제가 무너지면 사회주의 근간이 흔들린다고 아우성 칠 때 등소평은 “국민을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 사회주의”라고 설득했다. 등소평의 ‘개혁 개방’은 바로 앞의 지도자였던 모택동의 노선과 180도 반대방향의 정책이다. 모택동의 인민공사,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 극좌노선이 중국을 황폐하게 했다면, 그러한 극좌노선에 의해 저질러졌던 혼란과 폐해를 반면교사로 삼아서 나온 것이 개혁 개방이다.
등소평의 개혁 개방은, 모택동 시대에 주은래, 유소기, 등소평 등이 줄기차게 추진했던 ‘현대화 4개 노선’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혁명의 기반은 파괴이다. 그러나 혁명에 의해 건국을 했다 해서 나라의 관리마저 혁명적 방법으로 할 수는 없다. 모택동은 “大破大立‘이란 말을 좋아했다. 크게 부숴야 크게 세울 수 있다는 말일 게다. 공산주의라는 이념으로 중국의 밭을 모조리 갈아엎었지만, 거기에 새로운 종자와 묘목을 심어서 수확을 올리는 ’大立‘에는 실패했다.
‘大立’의 요체가 현대화 노선이며 개혁개방 정책이다. 모택동 아래에서 주은래, 유소기, 등소평은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 했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에 맞서는 공산주의 대국을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지구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중국 인민‘을 먹여 살리는 데 있어서 모택동은 실패했다. 모택동은 ‘영구혁명론’으로 현대화 노선을 압박했고,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재확인하기까지 했다.  
논리적으로는, 중국의 개혁 개방은 필연적인 것이었고, 당위성과 시대정신에 맞는 개혁정책이었다. 그리고 그 뿌리가 건국 초기부터 움터 왔던 ‘현대화 4개 노선’에 근거해 있다고 하지만, 모택동 사후의 혼란기에 등소평 혼자서 이를 추진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와 역풍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대화에 앞장섰던 유소기, 팽덕회는 이미 문화대혁명의 아수라 속에서 목숨을 잃었고, 주은래는 심한 방광암으로 생고생을 하며 다음 시대를 예비하는 데에 온갖 안간힘을 다했지만 역부족인 상황에서 모택동이 죽기 8개월 전에  세상을 떴다.
실용파와 4인방의 절충 역할을 위해 모택동이 등용했던 화국봉이 임시로 모택동 사후의 정상에 등극하는 모양새를 갖추었지만 화국봉은 원천적으로 힘이 없었다. 권력의 공백기와 진공상태에서 등소평은 자연스럽게 중국의 새 지도자로 부상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이념을 대표하는 ‘계획경제’를 대신해서 ‘시장경제’를 새 시대의 정책으로 정립시킨다는 것은 또 하나의 혁명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등소평 스스로 개혁 개방을 “제2의 長征”이라고 말했다. ‘사회주의 식 시장경제’라는 수식어를 붙였지만 원로 좌파들의 우려는 심각했다. 그 보다 더 힘든 일은, 새 시대에 걸 맞는 논리로 경제개혁과 맞먹는 정치개혁의 욕구가 힘을 얻고 있는 현실이었다. 안으로는 그 대표세력이 호요방과 조자양이었고, 나라 밖에서는 소련이 정치개혁을 외치고 있었다. 
호요방과 조자양은 등소평에 의해 실각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등소평과 어떤 관계였을까. 1973년 2월 20일, 등소평은 아내 탁림 등 가족과 함께 북경으로 돌아왔다. 1969년 10월 강서로 쫓겨 간 지 3년 3개월 만의 일이었다. 3월 10일, 국무원 부총리로 복귀한 등소평은 6월 21일, 주은래의 승용차에 편승해서 말리 공화국 대통령 환영만찬장으로 가고 있었다. 여러 회고담을 나누면서 두 사람은 동지애와 형제애를 나눌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즐겼다.
그러다가 주은래가 한 문서를 꺼내 등소평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내가 오늘 새벽에 작성한 거요. 지금 심사를 받고 있는 3백68명 노 간부들의 명단인데 한번 훑어 보시요…….”
“단번에 이렇게 많은 노 간부들이 풀려나게 되는 것을 주석께서 동의하실까요?”
“이 일은 주석께서 내게 맡긴 일이요……. 내가 기초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전국 현, 시 급 이상의 영도간부 가운데서 지금까지 심사를 받고 있는 사람이 모두 3천 7백 명이나 되오. 이 중 3백68명은 중앙기관과 국무원 각부, 위원회의 국장 급 이상의 지도자들이오. 모두 몇 십 년 동안 혁명 사업을 해온 오랜 동지들이오! 그런데 아무 죄도 없이 우리가 만든 감옥에서 7~8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소!”
그리고 주은래는 “당신 보기에 이 명단에 꼭 들어가야 하는데 빠진 사람이 없소?”라고 묻는 것이었다. 등소평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만년필을 꺼내 명단 뒷면에 네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萬里, 胡耀邦, 胡喬木, 趙紫陽>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호요방과 조자양을 등소평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자기 사람들을, 한 사람은 좌파 원로들을 달래기 위해 후퇴시키고, 또 한 사람은 천안문 사태의 책임을 물어 실각시켰다. 등소평은 모택동 못지않은 비정한 지도자일까. 그는 천안문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해서 엄청난 후폭풍에 시달려야 했고, 오늘도 서방에서는 그를 반민주 지도자로 낙인찍고 있다. 등소평은 왜 그런 바보짓을 했을까.    
마키아벨리가 말했다던가. “지도자는 지옥으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어야 대중을 천국으로 이끌 수 있다”고. 정치지도자가 섣불리 착한 척 하고, 인기에 연연하고, 인민대중을 천국으로 인도한답시고 달콤한 말만 내뱉으면 결과적으로 그 인민대중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 만다는 뜻일 게다. 1989년 5월, 천안문 사태 당시 소련 수상 고르바초프는 중국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는 천안문 사태를 직접 목격했다. 안정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그의 정치개혁 실험은 결국 소련을 분열시키고 붕괴시키고 말았다. 인민대중들과 함께 천국으로 가기를 원했던 고르바초프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을 포함한 전 인민을 지옥으로 내치게 하고 말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비록 서방세계에서 ‘평화의 사도’로 칭송받고 있지만, 그 자신도 그의 실패를 인정하고 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건, 진정한 ‘개혁’은 목표와 방향, 실체와 결과가 뚜렷해야만 할 것이다. 등소평 리더십의 강점은, 자기 자신을 지옥으로 내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확고한 목표의식과 지도력으로 인민대중을 천국으로 이끌려고 안간힘을 다 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등소평은 또한 자기 전 시대와 자기 이후의 시대를 잇는 연결 고리로서 무엇보다 ‘안정’을 중시했다. 그에게 정치적, 사회적 안정은 개혁을 성취시키는 가장 높은 가치의 담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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