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3:05 (금)
스웨덴 황태자 부부가 ‘현장’ 참관
스웨덴 황태자 부부가 ‘현장’ 참관
  • 조유전 토지박물관장
  • 승인 2007.05.21 10: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유전의 발굴 뒷이야기]외교에 이용된 ‘서봉총 금관 발굴’

□ 서봉총 금관
경주는 신라 천년고도로 세계에 알려져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은 물론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도 한 번은 경주를 다녀와야 한국을 보았다고 할 정도이다. 지금도 경주시내의 평지에는 크고 작은 봉분을 갖춘 신라무덤이 많이 남아 그 자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확인된 무덤의 수가 1백55기나 되었다. 그러나 이들 무덤 가운데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신라 제13대 왕인 미추왕의 무덤이 있을 뿐 그 외는 지금까지 주인공이 밝혀진 무덤은 없다. 그러나 미추왕릉 역시 오랜 세월동안 전해 오고 있을 뿐 진위는 아직도 수수께끼이다. 어쨌든 이들 경주 시내 평지에 남아있는 신라무덤들은 대체적으로 4~5세기 대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신라무덤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이기도 하다.
경주에서 지금까지 3번째 순금으로 만든 신라금관이 출토된 무덤이 소위 서봉총이다. 무덤의 주인공이 분명 사람 특히 금관까지 출토된 것을 보면 틀림없는 왕이나 왕족의 무덤이 분명한데 왜 서봉총이라고 불리고 있는가 한편으로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통해서 무덤의 주인공이 밝혀질 경우 당연히 주인공의 이름이 붙어,  예컨대 홍길동이라고 밝혀지면 홍길동묘가 될 것이고 임금이나 왕비의 무덤임이 밝혀진다면 누구왕릉 도는 누구왕비릉 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없으면 일단 조사를 통한 학술적인 이름을 부여하여 기념하게 된다.
이 서봉총의 금관은 1921년 우연히 경주에서 최초로 금관총금관이 출토되고 난 5년 후인 1926년에 일제의 손에 의해 출토되었다. 그간의 사정을 보면 1926년 5월 대구에서 경주, 울산을 경유하여 부산에 이르는 협궤철로를 광궤철로로 바꾸게 됨으로써 경주역에는 기관차 차고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런데 차고를 건립하기 위한 대지가 낮아 흙을 덮어 높이를 높여야 했다. 말하자면 매립토가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경주역 가까운 곳에서 매립할 흙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이 때 생각한 것이 노서리(路西里)에 있는 신라무덤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의 흙을 파 옮겨 매립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서봉총은 길이가 50미터가 넘었고 높이가 평지에서 7미터에 이르러 구릉처럼 보였다. 더구나 상부가 밭으로 경작되고 있어 아무도 무덤이라고 생각지 않았으며 그저 시내 평지에 있는 언덕쯤으로 알았던 것이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봉분의 흙을 파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당시는 일제 강점기였기 때문에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다행이랄까 흙을 파 옮기기 전 토목공사 업자와 협의해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때 발굴조사 현장책임자는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있던 고이즈미(小泉顯夫)였다. 이 무덤의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을 때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부부가 일본을 방문 중이었다. 황태자부부는 일본의 고도인 나라(奈郞)의 옛 사찰과 유명한 쇼쇼인(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들을 관람하고 우리나라를 경유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 로마 등의 발굴에 경험이 있었고 유적발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 정부에서는 마침 경주에서 발굴조사 중인 신라무덤 발굴현장을 방문하도록 계획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교토대학(京都大學) 고고학 전공교수인 하마다(賓田耕作)로 하여금 황태자부부를 현장으로 안내해 발굴조사에 참관하도록 했다.
이로써 이 무덤은 국제적인 발굴조사로 운영이 되었다. 우리의 신라 왕릉이나 다름없는 무덤이 일본정부의 외교적인 수단에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발굴이었다.
발굴조사 결과 금관을 비롯 허리띠 장식 등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작명에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아이디어가 스웨덴의 황태자부부가 참관한 사실을 기리는 의미에서 스웨덴의 한자표기 瑞典(서전)에서 瑞 자를 취하고 그때까지 출토된 금관총금관과 금령총금관을 비교해볼 때 특이하게도 봉황 무늬가 장식되어 있어 한자의 鳳 자를 취해 瑞鳳塚(서봉총)이라는 학술적인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가끔 塚 자는 조개쓰레기더미를 貝塚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어떻게 왕릉 급에 해당되는 신라무덤을 그렇게 부를 수 없다고 시비가 일어나기도 한다. 아무튼 塚 자를 쓰는 것은 큰 무덤이라는 뜻에서 쓰고 있음을 이해하면 된다.
□ 서봉총 금관 새장식모양
이 서봉총출토 금관과 귀걸이, 목걸이 장식 및 허리띠장식까지 완벽하게 평양기생의 머리와 몸에 착용하게 하여 술을 마신일로 세상을 놀라 게 한 일이 일어났다. 때는 1935년 일제가 평양에 조선총독부 박물관 분관을 개설하고 초대관장으로 고이즈미를 임명했다. 이 고이즈미가 누군가하면 바로 서봉총금관을 발굴할 당시 현장책임자로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양박물관장이 되자 아이디어 차원에서 그 해를 제1회 고적을 사랑하는 날로 정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총독부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서봉총금관을 비롯해 중요 출토유물 일체를 빌려와 평양지역 각 학교 교사와 학생들 그리고 지방의 유지들에게 특별히 관람시켰다. 여기까지는 좋은 일이었으나 특별전시를 마치고 유물을 다시 서울 총독부 박물관으로 돌려주기 전날 관장은 전시에 수고한 직원들과 같이 유물을 몽땅 들고 기생방으로 가 착용시켜놓고 술 파티를 벌였다. 말하자면 기생을 신라여왕으로 만들어 수청 들도록 한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현재 이 서봉총출토 금관은 보물 제339호로 지정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유전 토지박물관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