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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벌 조성 경계...강택민 발탁후 ‘살아서’ 은퇴
파벌 조성 경계...강택민 발탁후 ‘살아서’ 은퇴
  • 교수신문
  • 승인 2007.05.1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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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中國 散策]등소평의 지도자론

□ 등소평은 제3세대 지도부를 구성하면서 지도자의 도량과 흉금, 안목을 특별히 강조했다. 개인의 감정은 뒤로 하고 자기 자신을 반대했던 사람도 과감하게 발탁하고 임용하라는 것이었다.

등소평이 강택민을 전격 발탁한 것도 강택민의 ‘상해 마인드’, 즉 개방에 대한 신념과 업무추진 능력에 대해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업무 능력이 뛰어나고 개혁 개방에 대한 의지가 강하다 하더라도 최고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리더십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런 깜짝 발탁은 잘못된 인사가 되고 말 것이다. 1989년 5월 31일에 그는 두 사람의 당내 최정상급 지도자와 이야기하면서 과거와 미래의 중국의 리더십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이야기의 주제는 개혁과 지도집단의 관계, 지도부의 자질과 덕목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개혁개방을 주도하는 지도부는 먼저 효과적인 시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전에 나는 ‘홍콩’을 몇 개 더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개방해야지 통제해서는 안 되며 과거보다 더 개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개방하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습니다.
홍콩이 없으면 적어도 정보에 어두워질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개혁 개방은 더 대담하게 해야 합니다.”
그가 인민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개혁 개방을 잘 이끌어갈 수 있는 중앙지도부를 꾸리는 일이고, 몇 개의 실적을 올려서 인민의 신임을 얻는 일이었다. 가장 먼저 꼽은 것이 부패의 척결이었고, 심도 있게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부패 척결 없이는 효과적으로 개혁 개방을 추진할 수가 없고 인민의 신임도 얻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공당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역사적으로 우리 당에 진정으로 성숙한 지도부를 형성했던 것은 毛劉周朱 세대부터였습니다. 이 세대의 전반기는 좋았습니다. 후기에 ‘문화혁명’을 해서 큰 재앙을 가져 왔습니다. 華國峰은 단지 한 세대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등소평은 화국봉을 과도기적 인물로 평가했고, 모택동, 유소기, 주은래, 주덕 등 당대의 지도급을 묶어서 제1세대의 지도집단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그는 강택민의 발탁과 등장의 의미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두 번째 세대는 우리 이 세대인데 지금 제3세대로 바꾸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새로운 제3세대의 지도를 건립해야 합니다. 이 지도는 인민들의 신임을 얻어야 하고 당내에서 신임을 얻어야 하며 인민들이 믿어주어야 합니다. 지도부의 매개 성원들 모두가 아니라 이 집단을 만족스럽게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단지도에 대한 등소평의 바람과 의미부여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잘 대변해주는 대목이다. 인민들이 지도부의 성원 개개인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의견을 내놓을 수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집단 자체에 대해 인민들이 만족을 표시하면 된다는 말이다. 자신을 포함한 제2세대에 대해서도 스스로 평가를 하고 있는데, “우리 제2세대에서 나는 인솔자인 셈인데, 우리는 역시 한 집단인 것입니다. 우리 이 집단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인민들은 만족해했습니다. 주요한 원인은 우리가 개혁 개방을 하고, 네 가지 현대화 노선을 제기했으며, 진정으로 실력을 쌓았기 때문입니다”고 말하면서 다음 제3세대에 대한 기대와 희망도 제시하고 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개방’이었다. 제3세대가 인민들의 신임을 얻으려면 먼저 실적을 올려야 하고, 그 실적은 바로, 나라의 문을 열고, 폐쇄된 사회로 되돌아갈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폐쇄는 재앙을 가져온다고 했다.  
“예를 들면 문화대혁명인데 그런 상태에서 경제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인민생활도 개선될 수 없고 국력도 증강될 수 없습니다. 지금 세계의 발전은 일사천리로 매일매일 변합니다. 특히 과학기술면에서는 따라잡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해서도 찬찬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는 제3세대 지도부에 대해 안목과 흉금이 넓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이것이 우리가 제3세대 지도자들에게 가장 근본적으로 요구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의 제1세대 지도자들은 전반기에 도량이 넓었습니다. 우리 제2세대도 기본적으로 도량이 넓었습니다. 제3세대 지도자들과 그 후의 지도자들에게도 모두 이런 요구를 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는데, 지도자의 도량, 흉금과 안목을 특별히 내세운 점이 이채롭다.
아마도 이 도량, 흉금과 안목에 대한 강조는 인사와 공적 업무처리에 대한 당부를 위한 것 같다. 개인의 감정은 뒤로 돌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반대했던 사람도 과감하게 발탁하고 임용하라는 것이었다.
“지난날 毛 주석은 자신을 반대했던 사람도 오랫동안 임용하는 데 서슴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고려하는 각도도 보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도 개혁입니다. 사상상의 개혁이고 사상의 해방입니다.”
그는 이어서 사람을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기 기분으로 처리하지 말고 사회공론에 주의를 돌려야 한다고 말하면서 “정치가의 품위로 이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등소평은 인사의 공정성을 기하고, 사적인 인연이나 좁은 안목으로 처리하지 않는 것도 ‘개혁’이며 ‘품위’이며 ‘해방’이라고까지  역설하는 것이었다.
다음과 같은 충고도 재미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중앙의 최고위층에 들어오는 성원들은 모두 지난날의 자신이 아니어야 하고 지난날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됩니다. 책임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자신들의 각도에서 자신들의 작풍 등을 포함해서 변화가 있어야 하며 자각적으로 변해야 합니다.”
특별히 그가 주의를 주었던 것이 파벌과 동아리 조성이었다. 그 자신 그동안 적지 않은 오류도 범했지만 여태까지 작은 동아리 하나 만들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전근할 때에도 늘 혼자 떠났고, 어느 근무원 하나 데리고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여러 방면을 포섭하고 각 방면과 단결해서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30년대에 강서에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은 나를 ‘모택동파’라고 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모택동파는 없었습니다”고 회고하고, “작은 동아리가 사람을 해칩니다. 많은 실수가 여기서 나오며 오류도 여기서부터 범하게 됩니다”고 경고했다.
이 날의 그의 말은 사실상의 은퇴사였다.
“새로운 지도부가 위신이 서게 되면 나는 과감하게 물러나겠습니다. 당신들의 일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강택민 동지를 핵심으로 하여 잘 단결하기 바랍니다”
여섯 달이 채 못 되어 그는 사실로 사퇴를 감행하고 만다. 1989년 11월 9일, 중공당 제13회 중앙위 제5차 대회는 등소평의 은퇴를 비준했다. 모택동과 주은래는 현직에서 임종을 맞이했지만, 그는 살아서 중국의 최고위직에서 물러난 최초의 지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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