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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그러나 낯선 동서양 ‘춤의 대화’
유쾌한, 그러나 낯선 동서양 ‘춤의 대화’
  • 김남수[무용평론가]
  • 승인 2007.05.14 12: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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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춤에 대해 묻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제롬웰의 ‘나와 PK’

제1회 스프링웨이브 페스티벌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이번 범람이 심상치 않은 것은 그 봄 물결이 예술의 물꼬를 서서히 바꾸는 동시에 예술의 토양을 비옥하게 할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다. 섣부른 기대인지 모르지만, 이 물결이 담지하고 있는 것이 본격 다원예술 축제라는 점에 주목한다. 다원예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얼핏 황톳물에 사는 미꾸라지 같다. 의미의 그물을 던져 포획했는가 싶은 다음 순간, 미끄러져 도망간다. 탈장르[탈], 복합장르[겹], 독립예술[반]이란 구분이 선호되기도 하지만, 전체를 포괄한 것은 아니다. 또한 기존의 장르 경계에서 취하는 대안적, 주변적 입장도 스며 있다. 어쩌면 아직까지는 열린 과정 속에서 자기구성, 자기조직해가는 예술이라는 보다 막연한 정의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원예술이 역동하면서 앞으로 이런 개념 정립을 위한 시도는 분분해질 것이다.
일단 현재의 다원예술을 보면, 표현적으로는 춤과 연극, 미술, 음악, 영상, 기타 등등을 함께 버무리는 형식이 대부분이다. 내용적으로는 변화하는 신체와 생활세계로 한걸음 더 다가가는 접근이 특징적이다. 아르토 이후 걸작품과 결별하고 삶과 존재의 잔혹한 진실을 찾아가는 여행이 이러한 차원에 깔려 있으며, 자연히 무대를 중심으로 춤과 연극이 소용돌이의 눈이 된다. 사실 다원예술은 낯선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20세기초 아방가르드가 선언했던 ‘매체 선택의 자유’와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젊은 예술가는 더 이상 ‘나는 화가이다’ 혹은 ‘시인이다’ 혹은 ‘춤꾼이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단지 ‘예술가’인 것이다. 삶의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 열려 있을 것이다.”(앨런 카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원예술은 반문한다. 열려진 ‘삶의 모든 것들’이 얼마만큼 자기 목소리를 내었던가. 그 자유의 그늘 아래 예술가의 ‘예술 명명의 권리’만이 남용된 것은 아닌가. 대중과 유리된 자율성과 엘리트주의가 소통불능에 빠져든 결과는 아방가르드의 이념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가. 현재의 다원예술은 이러한 질곡에 빠진 예술의 자기성찰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다원예술은 기존의 장르에 대한 메타비평이기도 하며, 그 지향은 탈, 겹, 반의 운동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런 진단을 극명하게 보여준 작품이 스프링웨이브에 뛰어든 제롬 벨의 <나와 PK>(5월 4~5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가 아닐까.
이 작품은 프랑스 안무가 제롬 벨이 2004년 9월 싱가포르의 큐레이터 탕 푸쿠엔의 초청으로 방콕으로 날아가 태국의 핏쳇 클런천을 만나면서 이미 시작되었다. 제롬 벨은 서구에서 유쾌한 개념적 방식으로 각광받던 안무가였고, 핏쳇 클런천은 태국의 전통춤 콩(Khon)을 수련해온 무명의 무용수였다. 전혀 이질적인 길을 걷던 동서양의 무용가들이 만나 서로의 춤에 대한 생각들을 털어놓았고, 그 다큐멘터리에서 의미 있게 추출한 것이 <나와 PK>라고 해도 무방하다.
무대에 등장한 이들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한다. 공연 시간의 처음 절반은 제롬 벨이, 나머지 절반은 핏쳇 클런천이 묻는다. 대화록 형식이며, 그 막간에 춤을 보여달라는 요구에 응해서 각자 춤을 춘다. 그리고 그 춤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해주는 식이다. 하나의 토론 과정이며, 춤에 대한 메타 비평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안무의 일반적 관념에 비춰볼 때, 낯설다. 핏쳇 클런천이 말하듯이 춤은 관객을 작품 속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전제, 미학적으로 뛰어난 춤을 구축해야 한다는 전제가 남아 있다. 그런데 작품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일루전이 필요하다는 전제가 동양에만 남아 있는 것인가. 
한편, 제롬 벨은 무대와 객석, 극장과 현실은 하나의 연결된 공간이라고 말한다. 더 이상 자신에게 일루전은 없다는 것. <백조의 호수>라는 고전에는 백조도 호수도 있겠지만, 현대의 창작에서는 백조도 호수도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생활세계의 행복한 시공간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 형식도 무용적으로 변주한다. 즉 2005년 모다페(Modafe)에서 공연했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중 일부를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그는 비틀즈나 사이먼 앤 가펑클 같은 익숙한 팝송의 제목을 축자적으로 안무한 바 있다. 예컨대,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이 흐를 때 서서히 죽어가는 퍼포먼스를 하고, ‘Let’s Dance’가 반복될 때 막춤을 추는 식이다. 이때 핏쳇 클런천이 반문한다. 그것은 나이트클럽이나 디스코텍에서 추는 춤이 아니냐. 당신은 10년 동안 현대무용을 췄다는데, 춤 실력이 겨우 그거냐(웃음). 그러자 제롬 벨은 아름답고 감동적인 춤도 나름 의미가 있겠지만, 자신에게 아름다움의 재현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맥락에다 현실의 춤을 배치하는 것이 자신의 안무라는 것이다. 그러한 춤을 통해 지적으로 사유하기를 바란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제롬 벨이 춤의 메타 비평을 현실화하는 것은 미술의 개념주의를 무용적으로 변주하는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가져다 놓고 <샘>이란 이름으로 전시하며, “무엇이 창작인가” 라고 화두를 던진 계열의 역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연은 매우 흥미롭고 유쾌하게 진행되었는데, 거기에는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가 끊임없이 출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무대에서의 죽음을 상징뿐만 아니라 실재의 일부로서도 받아들인다는 관념, 춤사위 하나하나마다 일대일로 코드가 결합된다는 관념, 그리고 누드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관념이 먼저 제시된다. 사실 이러한 관념들은 동양을 전통으로 스탠스를 고정해둔 것에서 출발하는 오리엔탈리즘의 편견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작품의 제목에서 보이듯 ‘나’라는 서구의 원근법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동양을 타자화하는 뉘앙스도 느껴진다.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의 팝송 역시 완벽하게 백인의 음악으로 선곡되었다.
그런 한계가 있지만, 오히려 한계를 통해 논란을 생산한다는 것이 아방가르드 정신임을 노회하게 깔고 있다. 사실은 일정하게 뒤샹의 향수가 느껴지니, 이것은 아방가르드의 추억이 느껴지는 중간예술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제롬 벨이 무용으로 변주한 일루전 파괴의 역사는 이미 우리 내부에도 수용되어 있다. 그래서 제롬 벨의 변주는 뒤샹이 십년 동안 춤을 추었다면, 저렇게 안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의 즐거움과 함께 현대 춤의 안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행방을 탐문하는 효과를 낳는다. 무용에서는 일루전을 구축하는 계열과 파괴하는 계열 중 어느 것이 정답인지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며, 단지 생물학적 휴머니티를 깔고 있는 무용이 미술보다는 인간적 보수성을 지니고 있음을 재확인할 뿐이다.

김남수/ 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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