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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덕회·주은래 전철 밟지않고 모진 매질 견뎌내
팽덕회·주은래 전철 밟지않고 모진 매질 견뎌내
  • 교수신문
  • 승인 2007.05.06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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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中國 散策]등소평의 리더십<2>

□ 등소평은 문화대혁명 때 유소기와 함께 홍위병의 주된 표적이 되기도 했다. 유소기는 죽고 등소평은 유배 생활을 마감하고 1973년 복권과 복직이 이뤄졌다.
등소평 리더십의 숨은 매력은 무엇보다도 모택동 1인 지배시대에서 용케 살아남아서 결국 그 자신의 한 시대를 자기 비전과 능력으로 창출해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을 비판했다가 하루 아침에 국방부장의 자리에서 쫓겨난 비운의 충신 팽덕회를 좋아했지만 그의 전철을 밟지 않았고, 영원한 2인자 주은래를 친형 이상으로 따랐지만 그의 明哲保身을 닮지 않고 때때로 황야에서 모택동의 모진 매질을 감당하는 험한 길을 택했던 등소평이다.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의 주된 표적은 주자파로 비판 받은 유소기와 등소평이었다. 한때, 둘 다 모택동의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고, 사실로 유소기는 국가주석이 되어 한때는 모택동 당 총서기와 권력을 노나 가질 만큼 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소기는 문화대혁명 초반인 1969년 11월 12일 개봉감옥에서 한을 품고 죽어야 했다. 명색이 국가주석인 유소기가 狂氣에 저린, 거칠고 철없는 홍위병 앞에서 당한 수모는 극한 상황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다. 1967년 7월의 어느 무더운 날, 유소기와 아내 王光美는 홍위병 앞에 끌려 나왔다. 유소기는 그 자리에서 두 손을 뒤로 똑 바로 뻗고 허리를 굽히며 머리를 숙이는 고문을 어린 홍위병들로부터 2시간 남짓 받았다.
“여러분들이 나 개인에게 어떻게 대하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라고 절규하는 유소기를 홍위병들은 심한 구타로 대응했다. 유소기의 어린 자식들도 아버지를 비판하러 끌려 나왔다가 이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규탄대회가 끝나면 유소기는 다시 중남해로 보내졌다. 철저한 감시와 주변으로부터의 처절한 배격, 식은 밥, 묵은 밥만이 그의 몫이었다. 불과 30미터 앞의 식당에 가는 데에도 50분이나 걸릴 만큼 몸이 말이 아니었는데도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문화대혁명 초기, 국가주석 유소기의 현주소였다.
모택동의 고향 韶山과 유소기의 고향 花明樓는 38킬로미터 거리에 있다. 1999년 정월에 화명루를 찾았을 때, 유소기의 고거와 기념관이 제대로 다듬어져 있었다. 기념관엔 유소기가 중남해에 살던 때의 침대와 가구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고, 타고 다니던 지프차와 비 올 때 신었던 장화도 전시되어 있었다. “花明樓劉少奇紀念館”이란 현판은 등소평의 글씨였다. 기념관 앞 광장에는 유소기의 동상이 서 있었다. 1998년 11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세워진, 높이 7.1미터나 되는 全身像이었다. 세상의 눈에, 모택동은 가해자이고 유소기는 피해자이다. 가해자인 모택동의 고향 소산에도 모택동 기념관과 동상이 우뚝 서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피해자인 유소기의 고향에도 버금가는 규모의 기념관, 도서관, 동상이 서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모택동 못지않게 등소평의 영활성도 대단했다. 주은래, 유소기, 팽덕회 등 1898년생 동갑인 세 선배의 전철을 밟지 않고 마지막 승리자 된 것은 그의 능력이자 운명이었다. 그는 스스로 만든 운명의 가장 큰 受惠者였다. 최고 권력의 자리란, 결과론적으로는 운명이겠지만, 어떤 필연의 단서들이 쌓이고 쌓여서 이루어진, 신산한 과정들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주자파의 두 거두 유소기와 등소평의 生과 死의 갈림길도 어쩌면 모택동이 예비해 두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1966년 10월, 문화대혁명의 불길한 불꽃이 막 피어오르면서 유소기와 등소평은 당의 심사를 받게 되었다. 모택동은 꿀 먹은 벙어리 모양, 특유의 침묵과 遠謀로 입을 다물고 있었고, 측근인 陳伯達이 유소기와 등소평의 이름을 대놓고 비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당의 심사를 받기 위해 자기 비판서를 제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제출된 원고를 미리 꼼꼼하게 읽은 모택동이 두 사람의 자기비판을 받아들이면서 각각 다른 지시문을 보냈다.
“소평 동지. 몇 마디 말, 이를테면, ‘제 자신의 적극적인 노력과 동지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저는 저의 과오를 바로 잡는 것이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시간을 주신다면 저는 능히 재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라는 말을 덧붙이면 좋겠소. 모택동 10월 22일 오전 4시”
“소기 동지. 기본적으로 엄숙하게 잘 썼소. 특히 후반 부분이 보다 잘 되었소. 초안 형식으로 정치국, 서기처, 공작조(지도 간부), 북경 시 당위, 중앙 문혁 소조에 넘겨주어 토론을 하고, 의견을 제출한 후 수정을 거쳐 보고토록 하시오. 모택동 9월 14일”
그 후 두 사람의 운명을 보면 모택동의 이 편지가 가지는 含意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문맥과 숨겨진 뜻, 날짜와 시간들을 잘 살펴보면 멀리 내다보는 모택동의 의도 같은 것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문화대혁명을 시작할 때부터 모택동의 속셈엔 유소기의 제거와 등소평의 재 등용이 들어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이런 자상한, 서로 다른 지시문이 있을 수 있겠는가. 1969년, 유소기가 죽고 난 뒤인 1973년 3월, 등소평은 복권과 복직을 하게 된다. 유배지인 강서성 남창에서 급히 북경으로 불려 올라 와 등소평은 원래의 국무원 부총리 자리를 맡는다.
모택동은, “등소평의 모순은 인민 내부의 모순”이라고 말했다. 1972년 1월, 원로 혁명가 陳毅의 장례식에 참석해서 모택동이 한 말이다. 모택동은 진의의 미망인에게 유소기와 등소평에 대해 언급하면서 “유소기의 모순은 敵對的 모순”임을 비쳤던 것이다. 모택동은 유소기와 등소평을 한데 묶지 않고 모순론으로 구별하고 차별화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모택동의 모순론에 따르면, 등소평의 모순은, 인민 내부의 모순이기 때문에 대오에서 뒤쳐진 등소평은 재교육을 통해 재활시킬 수 있으나, 유소기는 “인민의 적”이 되기 때문에 구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미 목숨까지 잃어버린 유소기에 대해 모택동은 이와 같은 비정한 사후 단죄론을 내리고 있었다. 1980년, 등소평은 유소기를 복권시킨다.   
등소평은 그런 ‘예정’ 같은 운명 속에서 재생할 수 있었지만 그의 후계가 보장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보장의 기미조차 내비치지 않는 것이 모택동, 아니 모든 최고 권력자의 속성이다. 1971년 9월 13일, 林彪가 모반의 탈주 끝에 비행기 사고로 숨지자 江靑 등 4인방의 전횡이 노골화되었다. 모택동은 심하게 앓는 주은래를 대신해서 국정을 이끌어 갈 인물로 등소평을 지명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후 華國峰의 기용 등에서 보는 것처럼 4인방과 등소평을 함께 견제하는 인사를 했다. 주은래-등소평으로 이어지는 실용파에게 모택동 이후의 권력승계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 국면이 되었다.
그의 뛰어 난 리더십의 본령은 아무래도 참 ‘개혁’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런저런 운명의 기복 속에서 정치생명을 이어갔고, 종국적으로 최고 권력을 갖게 되었다 해서 다 위대한 지도자는 아닐 것이다. 중국 역사의 물꼬를 새로 튼, 破天荒적인 정책 발상, 등소평 리더십의 진가는 바로 개혁개방에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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