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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中國 散策(32)] 등소평의 리더십
[이중의 中國 散策(32)] 등소평의 리더십
  • 교수신문
  • 승인 2007.04.30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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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권력보다 ‘역사 속의 평가’ 소중함 알아

 

□ 등소평은 중국의 권력시스템을 1인체제가 아닌 일종의 ‘영도집단’으로 인식했다. 그는 좌파원로그룹과 신진 개혁파를 어르면서 영도집단을 효율적으로 이끌었다.

등소평은 생전에 단 한 번도 국가의 공식적인 최고위직 자리에 있어본 적이 없는 특이한 지도자이다. 아마도 그의 가슴과 머리가, 현재의 자리나 권력보다는 역사 속의 자리와 평가를 더 소중하게 받아 들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가 쥐고 있던 최고로 높은 자리란 것이 군사위원회 주석이었다. “정권은 銃口로부터 나온다”고 했던 모택동의 말을 그대로 적용하여, 중국공산당은 軍部만 손안에 넣으면 권력은 만사형통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인들이 의외로 많다. 그래서인지 호금도 중국 국가주석이 군사위원회 주석 자리까지 갖게 되자 이제는 그의 1인 권력체제가 확립된 것으로 평가하는 한국 언론의 촌평도 보았다.
사실과는 많이 다른 시각이다. 어느 나라나 군부의 입김이나 발언이 일정 지분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독 중국공산당이 군부에 약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천안문 사태 때, 진압을 위해 군 부대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등소평이 군부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의 최고지도부에서 군을 동원해서라도 일단 사태를 가라앉혀야 한다고 가닥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등소평의 권력은 자리에서가 아니라 그의 탁월한 리더십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등소평은 생전에 그의 이름 앞에 붙는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는 관사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가 살아있을 때 중국의 도처에서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등소평’이란 표현을 볼 수 있었다. 권력에 관련된 그 자신의 평가는 ‘제2대 영도집단의 핵심’ 단 하나였다. 그는 중국의 권력 시스템을 1인 체제가 아닌, 일종의 영도집단이 권력과 권한을 공유하며 공존하는 것으로 인식했고, 자신을 거기에 맞추어 나갔다. 등소평 자신을 두 번이나 권력의 자리에서 매정하게 내치기도 했던 절대 권력자 모택동에 대한 자리매김도 그는 제1대 영도집단의 핵심이라고 규정하고, 모택동 생존 시에도 모택동의 신격화나 1인 체제를 용납하려들지 않았다.
대충 아는 얘기들이지만, 중국 공산당의 권력 시스템은 서방 세계와는 많이 다르다. 쉽게 1당 독재라는 말을 하는데, 국민에 대한 공산당 유일당의 지배와 통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전통적인 마르크스-레닌 이론에 입각한 공산당 독재와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을 가진 것이 중국 공산당이다. 요즘 들어 중국이 孔子를 앞세우고 國學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만 보아도 중국 공산당의 민족주의 성향은 오랜 내력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통일전선 전략, 정치협상회의 등등, 1당 체제의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완충지대 같은 성격의 정치적 장치를 중국은 갖고 있다.
중국의 언론들은 흔히 당 중앙이라는 표현을 쓴다. 포괄적으로는 356명으로 구성된 당 중앙위원들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최정상 9인의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바로 당 중앙이다. 9인의 상무위원은 23명의 정치국원 중에서 선발된 사람들이고 356명의 중앙위원 중에서 어렵사리 뽑힌 드문 지도 인재들이 23명의 정치국원들이다. 그러나 당 중앙위원 회의는 1년에 한 차례 열릴 뿐이고 정치국원들도 자주 모일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구성된 9인의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당의 최정상에서 국사와 당무를 이끌고 있다.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胡錦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吳邦國), 국무원 총리(溫家寶),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賈慶林), 당교 교장(曾慶紅), 부총리(黃菊),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吳官正), 정법위원회 서기(羅干)와 다른 직책 없이 그냥 정치국 상무위원만을 맡고 있는 李長春이 상무위원들이다. 등소평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과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있으면서 노 간부들을 설득하고 신진 개혁파들을 어르면서 영도집단을 효율적으로 이끌었다.
호금도 국가주석이 힘이 약해졌다느니 영도력에 제동이 걸렸다느니 많은 말들이 있다. 모택동 1인 체제와 같은 중공당 지도부는 이제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영도집단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 그대로 일종의 집단체제가 사실상의 중국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타협과 조정만이 집단지도를 가능케 한다. 등소평, 강택민, 호금도는 그 영도집단의 핵심일 뿐이다. 등소평은 핵심영도를 잘 해야 중국이 바로 선다고 했다. 등소평은 스스로 운명을 극복하고 핵심이 되었지만 강택민과 호금도는 등소평의 지명 케이스이다. 강택민은 천안문 사태의 책임을 지고 조자양이 실각된 공백기에 갑자기 전국 단위 지도자로 급부상한 경우이고 호금도는 티베트 당 서기 때부터 그의 지도역량을 눈여겨 보아온 등소평이 일찌감치 점지해서 키워온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서울대 총장을 지낸 정운찬 교수가 어느 대학 특강에서 “내가 생각하는 국가적 리더는 중국의 경제개방을 이끈 등소평 같은 지도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높이 평가하는 부분이 개혁 개방이라는 전환기적 정책 발상에 대한 것인지, 剛斷과 親和力을 두루 활용한 그의 특이한 정치적 성격에 대한 평가인지, 짧은 언론보도 만으론  분명하지 않지만 아무튼 등소평의 리더십은 곱씹을수록 의미가 새로워지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 
그는  모택동과 같은 절대권위나 카리스마를 갖지 않았다. 가지거나 쟁취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중국 공산혁명에 절대적 의미를 갖고 있는 大長征에 대해서도 그 자신은 “그냥 따라서 걸어갔을 뿐”이라고 술회할 정도로 자신을 낮출 줄 알았다. 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북경에 가 본 것이 1949년 10월 1일의 천안문의 건국선포식 참석이었다. 10대의 나이에 프랑스로 고학 겸 노동하러 갔다가 소련을 거쳐서 돌아온 이래 그의 발자취는 넓고 넓은 중국 땅을 헤매면서 종군과 전투 지휘, 정치 공작을 한 것이 전부였다. 아내와는 첫 번째는 사별했고, 두 번째는 배신을 당했고, 세 번째 결혼에 성공했지만, 결혼 당일부터 전쟁터인 임지로 가야만 했다. 당시의 이런 생활들은 중국공산당 지도층이 공유하는 삶이기도 했다. 당과 군, 정부 안에 그와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이 수두룩했던 것도 그의 인생 역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등소평 리더십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모택동이 좌경 모험주의와 우경 패배주의에 강한 질책을 했다면, 등소평은 계획경제와 국가기업에 연연하는 극단의 좌파 원로그룹과, 경제개방에 앞서 과감한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신진 과격 우파를 모두 어르고 달래야 했다. 호요방, 조자양의 실각은 과격 우파에 대한 채찍이면서, 계속 개혁개방을 추진하기 위한, 좌파에게 던져주는 당근이었다. 그가 지향하는 세계는 오로지 개혁 개방이라는, 중국을 천지개벽시키는 큰 그림이었다. 실천과정의 집중과 선택에서 등소평은 자신의 오른팔, 왼팔인 호요방과 조자양을 희생시켜야 했고, 그 기초 위에서 그는 광동지방을 순회하면서 ‘南巡講話’를 통해 개혁개방을 거세게 다그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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