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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역사의 ‘뼈아픈 기록’
식민지 역사의 ‘뼈아픈 기록’
  • 교수신문
  • 승인 2007.04.30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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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분단의 경계를 허무는 두 차이니치의 망향가>, <100년을 울린 겔릭호의 고동소리> 재외동포재단 기획 | 현실문화연구 | 2007

사진이란 기억의 고갱이이자 기억의 마지막 보루다. 어릴 적 시골 집 안방에는 여염집 창문만한 액자가 걸려있었다. 그 곳에는 이 씨 집안의 빛바랜 사진들이 알록달록하게 모자이크 되어 있었다. 말쑥한 양복에 포마드 기름으로 머리를 단장한 할아버지의 사진. 한쪽 눈을 실명하기 전에 찍은 할아버지의 마지막 사진이었다. 또한 한때 배구선수였던 아버지가 유니폼을 걸치고 포즈를 취한 사진, 어머니와의 결혼사진, 형과 나의 돌 사진, 내가 첫 걸음마를 했던 사진 등등이 현재의 나에게 말을 걸었다. 평면 위에 붙여진 사진들이 연쇄적으로 충돌하면서 한 가족의 연대기적 이야기가 넘실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족사는 당사자가 아니면 그저 낡은 풍속화의 일부로 전락하고 만다.

사진이란 지나간 시간을, 지나간 세월을 붙잡아둔다. 찰나적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것, 순간의 기억을 장엄한 시간으로 탈바꿈하게 만드는 미디어가 바로 사진이다. 한 장 한 장 따로 떼 놓고 보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것들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묶음으로 만들어지고 거기에 사소한 글귀라도 적어 놓으면 어느새 역사가 된다. 특정한 인물이 아니더라도, 비록 장삼이사의 일상을 찍은 풍경일지라도 우리는 그 풍경 속에서 과거사와 마주친다. 사진을 통한 과거의 역사란 기억의 역사이다. 사진은 기억의 미디어다. 사진은 다른 미디어에 비해 언어적 장벽으로 가로막히지 않은 미디어이기에 때로는 국경을 뛰어 넘는다.

조국을 등진 사람들, ‘소수자’의 역사

재외동포재단이 기획한 두 권의 사진집은 그동안 우리의 기억에 존재하기는 했으나 좀처럼 부각되지 않았던 소수자들의 역사를 다룬다. 더욱이 이 사진집에 실린 사진들은 국가기관의 문서고에서 발굴한 것들이 아니다. 1천여 점에 이르는 사진들이 재외동포 개개인의 소장품이었다는 점에서 이 사진집은 기존의 사진집들과는 차별성을 지닌다. 수많은 사진들이 하나의 앨범으로 묶이자 1백여 년 동안 숨죽였던 조선인 이민사가 역사의 거대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재외동포들은 과연 무엇을 기념하기 위해서 과거의 사진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일까.

재외동포의 역사는 대한제국의 황혼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02년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담당부서가 탄생했다. 이름 하여 綬民院이다. 이 정부부서는 한국인의 ‘이민 및 해외여행사무 전담기구’였다. 당시 하와이와 멕시코는 “값싸고 성실하고 말 잘 듣는”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 대상으로 조선인이 낙점되었다. 조선인들은 가난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 하나로 ‘겔릭호’에 승선하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1905년부터 운항하기 시작한 關釜連絡船을 타고 일본으로 떠났다. 처음에는 신학문과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일본으로 떠났고, 시간이 지나 태평양전쟁 때에는 전시노력동원 정책에 의해 일본으로 떠났다. 춥고 배가 고파서 조국을 등졌던 사람들에게 돌아온 건 인종차별과 가혹한 노동이었고, 강제로 동원되어 조국을 떠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죽음과 맞선 싸움이었다.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되묻는 또 다른 우리인 그들.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고장난 레코드처럼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던 그들을 우리는 재외동포라 부른다. 재외동포들은 경계에 선 사람들이다. 그 옛날엔 ‘돼지를 기르는 토지’라 불렸던 일본 오사카시 이쿠노구(生野區)는 코리아타운의 메카이다. 미유키도리(御幸通) 상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조선이치바(朝鮮市場)의 풍경을 찍은 한 장의 사진은 재외동포의 정체성을 온전히 보여준다.

영어와 일본어와 한국어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조선이치바의 풍경 속에서 우리는 경계의 삶을 포착할 수 있다. 그 어느 곳으로도 귀속될 수 없는 삶의 혼종성은 역사의 불균형성이자 기억의 불균형성을 잉태한다. 1945년 해방 이전까지를 한정해서 말한다면 재외동포의 역사는 곧 조선 식민지의 역사, 더 나아가 제국주의 전쟁의 역사이자 근대의 역사와 겹친다. 

컷 사이엔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상흔

두 권의 사진집 속에는 식민지 조선인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들이 ‘찍힌’ 사진 속에는 식민지 역사의 시간이 기념비처럼 부각되어 있다. 컷과 컷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상흔이 잠복하고 있다. 당시 스물 세 살이었던 제1호 사진신부 최사라.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하와이까지 가서 서른여덟 살의 하와이 국민회 총회장 이내수와 결혼한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평범해 보이는 이 결혼사진 속에는 인종차별법으로 인해 현지의 미국인과 결혼할 수 없었던 조선인들의 역사를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갱도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은 노동자들의 모습에서는 일본의 전시노력동원 정책을 감지할 수 있다. 건장한 청년들의 입소식 사진, 전쟁에 동원된 여성들, 신사참배를 하는 조선인들, 일본 국민복을 입은 조선인들, 미국 전투기 조종사가 조선인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지나간 역사의 퇴적물들을 길어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불행은 자객처럼 다가왔다. 거대한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미국에서 각기 험난한 시절을 보냈던 그들은 태평양전쟁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주치게 된다. 1942년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하자 미주 한인들은 캘리포니아주 민병대 소속의 맹호군(한인국방경비대)을 결성해 군사훈련을 받았다. 또한 1942년 12월 18일 재일조선인 김종근은 강제 징집되어 조선총독부 제2육군병지원자훈련소에 입소하였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갔을까. 미주 한인 2세인 ‘프레드 오’는 전투조종사로 참전하여 적기를 맹렬하게 격추시켜 영웅이 되었다. 미국의 조선인 하사관 ‘조나 리’는 일본군에 소속된 조선인 포로들의 호송을 책임졌다.

태평양전쟁 당시 서정주는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우리의 가마가제 특별공격대원”으로 조선인 마츠이 히데오(松井秀男)를 영웅으로 찬미하였다. 그렇다면 혹시 드넓은 창공을 가로질렀던 프레드 오와 16명이나 되는 조선인 가미가제 특공대원들이 마주치지는 상황이 연출된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기막힌 운명을 어떻게 기억하고 애도해야만 하는 걸까.

한민족이라는 베이스캠프

우리는 이제 그들의 운명을, 그들을 호명하는 ‘재외동포’라는 말에 대해서 다시금 사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민족 단위의 숭고한 역사의 경계를 되물어야 한다. ‘동포’라는 단어는 1898년 만민공동회 시기에 급속하게 유행했던 거리의 단어이자 정치적 용어였다. 이때의 동포는 권력에 맞서는 일종의 대항언어였다.

따라서 재외동포는 더욱더 민족국가라는 시공간에 귀속되지 않는 타자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근대적 민족국가가 만들어 놓은 굳건한 제도적 장벽들을 뛰어 넘는 실천의 윤리이자, 견고한 지배적 사유에 균열을 내는 대항적 사유의 기폭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재외동포가 돌아와야 할 곳은 한민족이라는 혈연중심의 튼실한 베이스캠프가 아니라 새로운 장소여야만 하는 것은 아닐지. 희생자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일만큼이나 그들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애도하는가도 중요하다. 그것은 내가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된 할아버지의 과거사를 어떻게 역사와 연루시키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기억의 낙차만큼이나 역사의 경계를 사유하는 것이 필요한 시기다.

이승원 / 한양대·국어국문학

필자는 인천대에서 ‘근대전환기 기행문에 나타난 세계인식의 변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조교수이다. <소리가 만들어낸 근대의 풍경>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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