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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통해 실학의 민족주의적 성향 검증
문학 통해 실학의 민족주의적 성향 검증
  • 교수신문
  • 승인 2007.04.2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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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기획시리즈(7) 실학 개념에 대한 논쟁

심경호 교수는 실학의 민족주의적 성향은 사학과 철학에서도 드러나지만 문학에서 가장 뚜렷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문학 속에서 드러나는 실학의 징표들을 서술했다. 심 교수는 탐구의 학인 실학적 방법론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고 밝혔다./편집자주

1980년대 한국학의 아이템은 실학이었다. 지금 그 아이템은 충분히 매력적인가. 종래 한국학의 최전선에서 학문과 실천의 연결을 모색하던 분들과는 달리, 젊은 연구자들은 실학이란 용어를 그리 사용하고 있지 않다. 왜 그럴까. 조선후기의 역사나 사상이나 시문을 다룰 때면 실학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어야 그 가치가 공인되듯이 여기던 시기가 있지 않았던가.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실학은 조선후기에 현실 대응 논리를 모색하여 현실을 변역할 실천 방안을 제시하였던 학풍을 가리킨다. 종래의 통설에 따르면, 실학은 비록 논리의 형식적 측면에는 성리학이나 경학의 요소를 남기고 있기만, 근대적 지향과 민족적 의식을 지닌 비판적 사상운동이다. 하지만 최근, 실학을 근대적 지향의 학풍으로 규정한 것에 대해 회의하거나 그 함의를 재규정하자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실학 개념이 제기된 것은 일제강점기이지만 그 개념이 조명을 받은 것은 암울한 시대에 진보적 지성들이 현실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면서였다. 그 후 사회적 동인이 약화되고 지식인들의 책무의식이 빛바래면서 실학의 열기가 식어가고 있다. 학문 내적으로도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론이 비판을 받게 되자 그것에 기대었던 여러 논의들이 표류하기 시작한 듯하다. 

□ 사실을 집적한 사료 편찬 방법을 개발했다는 측면에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이 실학의 여러 계보 중 하나라고 심 교수는 지적했다.
그렇다고 실학이란 개념 설정이 무의미한가. 결코 아니라고 본다. 기존의 실학 연구는 우리 지성사와 관련하여 매우 소중한 사실들을 밝혀내었고, 그 성과의 유의미한 결과들은 현재의 젊은 연구자들도 자각하든 안 하든 활용하고 있다. 더구나 실학이 근대의 새 징표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그 징표는 광의의 문학 속에서 더 잘 드러난다. 문사철의 합일을 추구한 전통 지성의 존재방식에 비추어 볼 때 문학 속에서 사유의 변화 양상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사유의 근대성  

18세기 후반, 19세기 전반의 문학은 경험세계에서 일회성의 진실을 포착해내어 감성을 도구·기관으로서 작용시키는 원리를 발견하는 방향으로 일보 전진하였다. 비록 모든 사물들을 가치론적으로 배열하는 인식태도를 탈각하지는 못하였지만, 생활과 사물의 일회성을 파악할 때 본연의 존재를 상정하지는 않았으며, 개별화되어 운동하는 현실 자체를 ‘본래’라고 보기 시작하였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의 ‘도강록’에서 형경(荊卿 : 荊軻)이 진시황을 암살하러 떠나려다가 머뭇거리면서 “내가 지금 머뭇거리는 까닭은 나의 손님을 기다렸다가 함께 떠나려 함이오(僕所以留者, 待吾客與俱)”(<사기> ‘자객열전’)라고 말한 것에 대하여, 형경이 기다린 ‘나의 손님’은 실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의지를 발동하는 형경 그 자신이었다고 보았다. 곧, 그는 스스로의 행위를 선택하는 근대적 인간 존재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頂點에 위치한 사유양식이지만 다른 진보적 지성들도 그러한 사유양식을 어느 정도 공유하였다고 생각한다.

민족주의적 성향의 대두

실학의 민족주의적 성향은 사학과 철학에서도 드러나지만 문학에서 가장 뚜렷하다. 한국문학은 매 시기마다 우리 민족의 사상과 감정을 진실하게 표현하기 위해 갖가지 모색을 하였으나, 실학의 시대에 이르러서 그러한 모색을 충분히 개화·결실할 수 있었다. 조선시·조선풍의 중시는 그러한 사조를 반영한다. 곧 조선후기의 문학은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의 표출, 국경의식의 고양, 민족역사에 대한 관심 표명, 자국 언어 및 국문문학에 대한 관심 표명, 독자적인 문명의식, 민족 정서의 재발견과 소외된 민족성원에 대한 재인식, 국토산하의 재발견 등을 주제로 삼아 기존의 문학형식을 새로운 각도에서 재활용하거나 새로운 문학형식을 창출하였다. 그렇기에 문학을 통해서 실학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검증할 수가 있는 것이다.

탐구 정신의 반영으로서의 신 사조 

필자의 생각에 실학의 특성은 한마디로 탐구의 정신에 있다고 본다. 이것은 실학의 문학이 사실주의와 낭만주의의 두 사조를 동시에 발전시킨 사실에서 귀납적으로 얻어낸 결론이다. 실학의 문학은 무엇보다도 사실주의의 특성을 드러내었는데, 그 특성은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상이한 국면들에서도 나타났다. 곧, 견문하거나 전문으로 듣는 현실이 깊고 넓어져 서사 세계가 확대되었다는 점과 작품창작에서 현상 자체를 心眼으로 재해석하여 묘사하는 방식이 발달하였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실학의 문학은 형식적 ‘傳神寫影’을 극복하고, 생활이나 사물이 자체의 발전 법칙을 따른다는 점을 부각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실학의 문학은 개인의 진실정감을 담아내는 방향으로도 발전하였다. 삶과 욕망의 관계에 주목하는 한편 형상화 방법, 통속적 문체에 대한 탐색이 일어났다. 일부 문학이 남녀의 진정을 강조한 것은 예교의 허위성을 공격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는 하였지만, 정감 자체를 해부한 것 자체는 이 시기의 사조를 대표하는 중요한 표징이라고 볼 수 있다.

실학적 사유의 파장 

실학은 이념적으로는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세 부류로 구분되지만, 실제로는 지향이 다른 여러 계보가 혼재한다. 그 가운데서도 강화학파 지식인들은 眞實無僞를 중시하는 心學的 실학을 추구하였다. 李匡師는 나의 뜻(意)과 관계된 사(事)를 중시하였으며, 인간 감정의 솔직한 발로를 존중하였다. 그는 자연과 우주에 대한 주희의 생각을 비판하여 박학의 학풍을 열고,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자기 검증’을 바탕으로 학문과 문학을 하였다. 그 아들 李肯翊은 <연려실기술>에서 史評을 배제함으로써 사견을 개입시키지 않고 사실을 집적한 사료 편찬 방법을 개발하였다. 그 방법은 강화학파의 樸學者 申綽이 경학을 연구하면서 己見을 배제하고 古注를 집성한 방법과 통한다. 이긍익의 아우 李令翊은 특정 경학론이나 이기론에 편향하지 않고 주체의 존재양식에 대하여  물음을 던졌다. 그 사촌 李忠翊은 불교와 노자에까지 사유의 범위를 확대하였다. 정제두의 손자사위 申大羽는 주로 인간의 생활상에 중시하여 ‘專內實己之學’의 전형을 제시하였다.

한편, 실학시대의 문화적 분위기는 각 신분계층의 자기정체성 인식과 문학적 실천을 촉발하였다. 중인과 서얼은 비록 계급적 시각과 정치적 견해를 뚜렷이 개진하지는 못하였으나 갖가지 문화운동을 통해서 자신들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임윤지당 같은 여성은 기호 서인의 성리학을 계승하였지만 “하늘에서 받은 성품은 애당초 남녀가 차이가 없다”고 선언하였고, 강정일당은 “부인들이라도 큰 실천과 업적이 있으면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성리학의 논리를 궁극에까지 추급한 자리에서 그러한 선언이 가능하였으므로, 그 행동과 태도는 이미 속류 성리학의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그렇다면 실학 연구가 지향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실학의 사유방법이나 학문방법을 키워드로 제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실학의 학문방법은 ‘실사구시’라고 규정되기도 하지만, 그 구체적 내용은 아직 논의되지 않았다.  

필자는 실학의 사유방법을 ‘탐구의 학’이라고 규정한다. 실학은 불완전하지만, 객체의 가변성과 주체의 가변성 사이에 우발성이 성립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주자학적·성리학적 관점을 버리지 않은 예도 있었으나, 실학의 지성은 대부분 불변의 가치를 맹목적으로 승인하지 않고 가능한 한 ‘자연의 빛’으로 사물을 바라보고자 하였다. 특히 감성을 통하여 드러나는 所與들을 넓혀가고 그것을 다시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실증적 태도를 중시하였다. ‘리는 하나이되 만물 속에 각각 달리 구현되어 있다(理一而分殊)’라는 성리학적 명제에서 촉발된 면도 있지만, 리를 우선시하는 명제의 뒤로 숨지 않았다.

탐구의 학으로서의 실학은 학맥이나 인맥을 넘어서서 여러 연원에서 기원하였다. 金萬重의 ‘按脈의 학’은 그 하나라고 생각한다. 실학의 현재적 가치를 재확인하고 그 사유 및 학문의 방법을 발전시키는 일은 우리 모두의 과제로 남아 있다.

심경호 / 고려대·한문학
필자는 교토대에서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산문기행>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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