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18:55 (일)
한국의 미_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38) 서산 마애삼존불
한국의 미_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38) 서산 마애삼존불
  • 김춘실 / 충북대· 불교조각사
  • 승인 2007.04.18 23: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밝은 얼굴에 중후한 자태 …신앙과 전통 반영된 ‘백제의 미소’

깊은 산 속에 은거하기도 하고, 산 정상에서 속세의 땅을 굽어보기도 하고, 마을 어귀에서 친근하게 웃어 보이기도 하는 마애불(磨崖佛). 현대적 의미에서 환경 조각이라고도 불리운다. 바위에 새겨긴 마애불은 전국에 2백여개가 넘는다. 김춘실 교수는 온화한 백제인의 미소를 보여주는 서산 마애불의 아름다움에 대해 심도 있게 짚었다./ 편집자주  

 

磨崖佛이란 자연의 바위면에 불상을 浮彫로 새긴 것이다. 인도나 중국에서 유행한 석굴사원을 한국적인 수용의 한 형태로서 조성하면서 시작됐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경우 마애불이 특히 중국과의 교류에 있어 관문의 역할을 하였던 태안과 서산 지역에 남아 있어서 더욱 이와 같은 새로운 중국 문화 수용의 결과임을 생각하게 한다.

□ 서산마애삼존불의 모습. 늘어진 옷자락의 세부묘사가 매우 부드럽고 사실적이어서 온후한 인상이 넘쳐흐른다.

서산마애삼존불상은 서산군 가야산 계곡의 소위 인바위로 불리는 바위에 부조되어 있는데 규모는 본존상의 높이가 2.8m 정도로 그리 크지는 않다. 인근에는 백제의 초기 절터인 보원사지가 있다. 바위의 윗부분이 지붕처럼 앞으로 돌출되어 있어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 면은 자연적인 감실의 형태를 띠고 있다. 본존상은 시무외 여원인(施無畏 與願印)의 여래입상이고, 왼쪽 협시상은 반가사유상, 그리고 오른쪽 협시상은 배 앞에서 두 손을 아래위로 하여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봉보주보살입상(捧寶珠菩薩立像)이다.

이들 삼존상은 각각의 보주형 頭光과 仰蓮의 연화좌를 갖고 있어서 마치 독립된 상들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각각 당시 백제에서 유행한 불·보살상이기도 하다. 이 서산마애삼존불상은 백제의 불교가 꽃피었던 7세기 초반경에 조성되었는데 조각수법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좌우 협시보살상을 당시 백제에서 유행하던 像으로 구성하고 있어서 백제 불교계의 독자성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像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서산마애삼존불상 보다 조금 앞서 조성된 태안의 마애삼존불상에서도 볼 수 있는데 가운데에 작은 크기의 봉보주보살상을 두고 좌우에 큰 키의 여래입상이 서 있는 특이한 형식이다.

특히 서산마애삼존불상은 조각 양식면에서 백제를 대표하는 불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전하는 백제의 불상이 많지만 대부분 파손이 심하거나 작은 金銅像들임에 비해서 이 상은 마애불로서 규모도 클 뿐 아니라 유연하고 세련된 백제 조각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같은 삼국시대의 마애불상인 신라의 단석산마애불상과 비교해 보아도 그 조각의 우수함이나 도상의 정확한 표현과 세련됨을 확인할 수 있다.   

 
본존상은 좌우 보살상에 비해 크게 조각되었는데 광배의 화염문도 본존상의 광배에만 유려한 선으로 조각되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어깨가 넓고 둥글며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풍성한 대의가 유연하게 잘 표현되어서 중후한 자태를 보인다. 본존상의 눈을 활짝 뜨고 밝게 웃는 얼굴 모습은 당시 고구려나 신라의 불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백제불상의 대표적 얼굴 모습으로 언급되고 있다. 손은 시무외 여원인을 취하고 있는데 왼손의 끝 두 손가락을 굽히고 있는 것이 자연스럽고 손바닥의 굴곡이 사실적이다. 복련(覆蓮)의 연화좌는 백제 연화문 기와의 경우처럼 연판이 넓고 부드럽다. 

오른쪽의 협시보살상은 봉보주보살상으로 중국의 南朝 梁代의 보살상과 비교되고 또한 일본의 飛鳥時代 보살상들에서도 발견되고 있으므로 중국의 남조, 삼국시대 백제, 그리고 일본의 飛鳥時代가 역사적으로 밀접한 연관 속에 있었음을 실제 불상에서 확인시켜 주는 예이다. 이 상에서도 새로운 양식의 진전과 섬세한 조각표현을 볼 수 있는데 보관은 가운데가 높은 산형관으로 윗부부에 일월식 장식이 있고 밑으로는 술장식이 늘어져 있으며 관띠가 길게 어깨 위로 늘어지고 있다. 얼굴은 갸름하나 역시 뺨이 팽창되고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목에는 끝이 뾰족한 굵은 목걸이를 하였고 상반신은 천의를 걸쳤으나 거의 나신처럼 드러나 있다. 천의는 양팔에 걸쳐져 몸 앞에서 한번만 둥글게 늘어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하의는 허리 밑에서 되접어 입었는데 표현이 자연스럽고 배가 둥글게 드러나 보인다.

왼쪽 협시보살상인 반가사유상은 보관이 삼산형이나 가운데에 술이 늘어지지 않고 위에 꽃장식이 붙어 있어 다소 낮다. 얼굴을 둥글고 밖을 향해 웃고 있으며 턱에 대고 있는 오른손과 팔은 파손되었다. 상반신은 裸身으로 목걸이만 걸치고 있는데, 얼굴과 가슴, 그리고 다리의 양감이 둥글게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대좌는 아직 높은 편으로 반가한 다리 아래 늘어진 옷자락이 여전히 아래 폭이 넓게 대좌 전체를 덮으면서 풍성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산마애삼존불상은 전체적으로 얼굴이나 손, 그리고 늘어진 옷자락의 묘사가 매우 부드럽고 사실적이어서 온후한 인상이 넘쳐난다. 이와 같은 양감이 부드럽게 살아있는 양식은 경직된 특징을 보이는 중국의 북위 후기 내지는 동위양식의 영향에서는 벗어난 것이어서 서산마애불상이 7세기 초의 상으로 추정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서산마애불상이 전형적인  一光三尊佛 형식을 벗어나서 각각의 독자적인 형식의 삼존불 구성을 보이는 점도 시대가 내려가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서산마애삼존불상은 한국조각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마애불상은 1959년 황수영 교수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당시 한국조각사 연구는 우리나라의 미술사 연구의 전분야가 그러했겠지만 해방 이후 이어진 6·25 전쟁 등으로 인하여 연구가 이어지지 못하고 공백기가 지속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공백기를 깬 초기의 업적이 서산마애불상의 발견과 소개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각지에 소재한 미공개 불상자료에 대한 탐색 작업을 중심으로 조각사 연구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후 태안마애불상의 발견이 이어지면서 이들 마애불상이 조성되어 있는 서해안 지역이 주목되었고, 이를 통해 이곳이 중국과 교섭의 관문이었다는 지적이 나오게 되었다. 또 이러한 지정학적 배경과 관련하여 중국의 산동성 지역의 석굴사원이 주목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실제로 산동성 지역의 석굴사원들을 살펴보면 서산마애삼존불상의 삼존상 구성형식이나 조각 양식면에서 꼭 같이 비교되는 상은 찾을 수 없다. 이로 보면 서산마애삼존불상은 바위면에 불상을 조각하는 석굴사원의 기본 형태는 받아들였을지 모르나 그 표현 자체는 당시 매우 높이 고조되었던 백제의 불교신앙과 조각 전통이 적극 반영된 매우 독자적인 불상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마애불상은 이후 바위 자체를 신체로 생각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바위신앙과도 맞물려서 크게 유행을 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경주 남산의 마애불상들을 위시하여 고려시대가 되면 특히 巨佛의 마애불상이 전국적으로 조성되는데 북한산 승가사의 마애여래좌상도 그 중의 한 예이다. 그러나 조각 양식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삼국시대 마애불상들이 보다 高浮彫로 조각되고 있는데 반해서 고려시대 마애불상들은 대체로 얕은 부조나 선각으로 조각되고 있어서 거대한 규모와 더불어 사실적인 조각수법은 떨어지는 상들이 많다. 

김춘실 / 충북대· 불교조각사
 



필자는 홍익대에서 ‘삼국시대 여래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는 ‘三國時代 施無畏 與願印 如來坐像考’와 ‘百濟 6세기 후반 蠟石製佛像 硏究’ , ‘百濟彫刻의 對中交涉’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