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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 대학의 생명이자 활력의 원천
자율, 대학의 생명이자 활력의 원천
  • 김봉억 기자
  • 승인 2007.04.16 1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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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시론 : 대학과 자율_정범모 한림대 석좌교수

정범모 한림대 석좌교수
"한국대학의 소생은 정부가 대학자율을 대폭 허용하는 건곤일척의 결단과 
 대학이 스스로를 엄하게 규제하려는 의연한 결의가 선행해야 가능하다"

한국의 대학들이 제 모습을 갖추려면 정부는 대학에 대폭 자율을 허용해야 하고, 대학은 그 자율에 걸맞은 엄한 자체규율을 세워야 한다. 이것이 이 글의 결론이다. 그리고 실은 자율과 자체규율은 같은 말이다. 자율은 곧 ‘자’체규‘율’이기 때문이다.

  지난날

  교수와 학생이 있고, 일정한 교과과정이 있고, 그 수료에 따라 학위증을 주는 대학이라는 교육제도의 연원은 13세기경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현대 거의 모든 나라의 대학들은 19세기 초 독일의 문교장관 훔볼트가 창설한 베를린 대학을 그 전형典型으로 하고 있다. 훔볼트는 대학에 두 가지 새 생명을 불어 넣었다. 하나는 교육과 동시에 연구를 대학의 두 주요 기능으로 도입한 것이고, 또 하나는 학문의 자유, 교학의 자유를 확립한 것이다. 자유는 자율과 같은 말이다. 훔볼트형 대학은 크게 매력적이고 생산적이어서 세계적으로 번져갔다.

  건국 후 한국의 대학들도 교육과 연구의 두 기능 그리고 교학의 자유를 기치로 출발했다. 그렇게 헌법에도 교육법에도 규정되었다. 그래서 1950년대에 정치적으로는 독재로 기울어졌을망정 한국 대학들은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자율을 누렸다. 예를 들어, 입학생 전형은 그 정원과 전?후기만 문교부의 인가를 받아야 했지만, 나머지는 완전히 대학의 자율이었다. 무슨 과목으로 시험 보건, 논문형이건 객관형이건, 내신과 면접을 어떻게 참고하건 말건 하등 문교부의 간섭이 없었다. 교과과정 운영에도 거의 간섭이 없었다.

  이런 대학의 자율은 1961년 군사혁명으로 그 명맥이 끊겼다. 1950년대에 자율을 악용한 일부 사립대학의 부정입학 등 비리가 자율종식의 빌미가 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중앙집권적 개발독재체제의 탓이 많았다. 개발독재가 그 당시의 경제발전에는 필요했을지 몰라도 교육계에까지 미쳐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 후 근 반세기 동안 지금까지도 줄곧 한국의 교육계 그리고 대학은 중앙집권적 관료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나는 한국교육 그리고 한국 대학의 열악상의 최대 원인이라고 본다.

  한번 거머쥔 권력은 여간해서는 내놓지 않으려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그러나 정말 한국 교육계, 대학계의 웅비를 바란다면, 권력은 크게 자체를 반성하고 학교와 대학의 자율을 과감하게 대폭 허용해야 한다. 이런 자율의 허용과 확대는 교육계?대학에만 끽긴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사회활동 전반에 다 긴요하다. 한국은 지금 그런 발전단계에 있다.

  자율의 이유

  네 살짜리 아이도 자기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을 옆에서 누가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를 하면 싫어한다. 사람들은 잔소리가 심해지면, ‘그러면 네가 해라, 난 모른다’라고 손을 떼고 일을 팽개쳐 버린다. 1950년대엔 교수들에게 입학전형은 ‘내 일’이었다. 더 좋은 학생을 더 교육적인 방법으로 뽑아 들일 길은 없는가, 교수들은 백방으로 연구했다. 그러나 지금 교수들은 입학전형을 ‘내 일’로 생각하지 않는다. 개선의 방도를 연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연구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자율은 모든 일에서 성취와 생산의 원동력이다. 자율이 없으면, 모든 성취와 생산은 저조해지게 마련이다. 사람은 타율 하에서는 신이 안 나고 사기도 오르지 않는다. 노예는 주인의 말대로는 하지만, 일은 시들하고 마지못해서 할 뿐이다. 한국의 교사들, 교수들이 교육부의 지시대로 ‘마지못해’ 교육하고 있다면, 그 결과는 심각하다.

  자율은 모든 일에서 책임감과 도덕적 감각의 원천이다. 내가 내 뜻대로 하는 일에만 사람은 책임감을 느낀다. 따라서 타율적 지시사항의 난무는 그대로 무책임의 풍토를 만들어낸다. 노예는 일에서 자유?자율이 없다. 그러나 일의 책임도 없다. 책임은 주인의 몫이다. 타율 하에서는 사람의 도덕적 감각도 무디어진다.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어진 독일 병사도 히틀러의 명령 하에서는 무고한 유태인을 가스실에 몰아넣어 죽인다. 타율은 무책임만 아니라 무도덕의 풍토도 조성한다.

  교육부가 진정 교육계?대학에 사기와 교육적 성취를 고양하고, 책임감과 도덕적 감각을 고취하려면, 그 첫 요건은 대학?학교의 자율의 신장에 있다.

  자율의 규율

  반면, 이 세상엔 문자 그대로 완전 자율이란 있을 수 없다. 언제나 일정 규율 하에서의 자율이다. 그 규율이 법?규정일 수도 있고, 도덕?정서일 수도 있다. 대학이 자율을 생산적으로 향유하려면, 그런 규율의 견지에서 심각하게 반성?시정해야 할 저간의 몇몇 관례가 있다.

  우선 학사규율은 학생에게도 교수에게도 엄격하게 적용되는 풍토부터 만들어야 한다. 그 연유야 해방 직후의 무질서 때문이건 데모시절의 방편 때문이건 간에, 한국 대학의 학사규율은 외국의 대학에 비해서 너무 방만하다. 학생도 ‘축제’를 구실로 휴강이 일쑤고, 교수도 여러 구실로 휴강이 잦다. 성적 미달, 출석 미달도 ‘온정’으로 처리되고, 언제부턴가 교수는 ‘책임시간’ 이외는 ‘자유’시간이고 학교에 안 나와도 된다는 풍토가 만들어졌다. 외국 대학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엄한 학사규율 없이는 대학도 유명무실이다.

  대학자율은 대학 자치와 통한다. 그러나 모든 자치는 폐쇄주의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다는 것도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자치의 이름으로 교수채용에서 동창만 선호한다든지, 총장 선임에서 동교, 동창, 동향출신 교수만 고집한다든지 하는 폐쇄주의는 결국 동종교배의 퇴행?위축을 결과할 뿐이다. 한국 대학들의 교수에 의한 총장 선거제도 지양되어야 한다. 한국의 대학은 이런 폐쇄주의의 병폐에 많이 걸려있다. 폐쇄적 자치는 각종 비리를 엄폐하기도 한다.

  대학 자율?자치가 치외법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율은 누군에겐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 ‘누구’가 학생일 수도 있고, 정부일 수도 있고, 기업일 수도 있고, 매스미디어일 수도 있다. 대학과 교수는 필요하면 언제라도 스스로의 내막을 공개할 수 있어야 하고, 기꺼이 각종 평가와 상호견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원칙적으로 모든 이유 있는 교수평가제, 대학평가제에 찬성이다. 대학교육을 잘했느냐 못했느냐의 평가는 해당 대학?교수가 아니라, 외부자가 하는 것이 원칙이다. 요리의 맛은 그 요리를 만든 요리사가 아니라, 그것을 먹어본 사람이 판정한다.

  이러고 보면, 한국 대학의 소생에는 정부가 대학자율을 대폭 허용하는 건곤일척의 결단과 대학이 스스로를 엄하게 규제하려는 의연한 결의가 선행해야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그 방향으로 진전이 있기를 목마르게 기대해 본다.

  삼불

  자율과의 관련에서, 근자에 자주 거론되는 ‘3不’ 정책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3불은 하나로 묶어 논의할 것이 아니라, 둘로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본고사와 고교등급제는 입학생 능력 평가의 문제고, 기여입학제는 능력 평가가 아닌 행?재정상의 문제다.

  나는 본고사 여부와 고교등급제 여부는 대학의 입학전형 개선 노력의 일환으로 전적으로 대학의 자율에 맡겨야 할 문제라고 본다. 그 이유는 위에 누누이 설명했다. 그런 자율 없이는 입학전형 개선은 영영 바라기 어렵다. 본고사, 고교등급제만 아니라, 또 다른 여러 가지 타당하고 희한한 평가방법을 창안해낼 수도 있다. 창안?연구?실험의 여유 없이 어떻게 개선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애당초 전국 대학에 모든 것을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그러나 기여입학제는 능력평가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일종의 상업적 바터제다. 바터제 치고는, 검사?의사도 돈 주고 사고 장관?국회의원도 돈 주고 사자는 식의 금전만능풍조를 부추기는 좀 야박한 바터제다.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율의 문제도 아니고, 도리어 자율의 악용이다. 혹자는 미국 대학에서 기부금을 많이 낸 사람의 자녀에게 입학특례를 주는 경우를 들어 기여입학을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세 가지 차이가 있다.

  첫째, 대부분의 경우 기부자는 자녀 입학을 조건으로 내걸지 않는 순전한 희사다. 둘째, 기부행위 후 10년 또는 수십 년 후에 아들이나 손자를 입학시킨다. 그러나 그런 조건이 미리 붙어 있는 것은 아니다. 셋째, 그런 특혜 대상자의 기부금은 대개 10억, 20억이 아니라, 대개 큰 건물을 짓는데 드는 것과 같은 ‘천문학적’인 돈이다. 바터제가 아니다.

  재정지원

  국부가 늘어나니까 근자엔 정부도 돈이 많아졌고, 교육부의 재정규모도 커져서 대학에 대한 각종 지원금, 연구비도 커졌다. 교수들은 그 연구비 챙기기에 바쁘고, 대학들은 각종 지원금?보조금을 할당받기에 골몰한다. 본래 대학이 발전하려면 국가의 각종 재정지원이 풍족해야 한다.

  그러나 돈은 하나의 권력이다. 권력으로는 하게 할 수 없는 일을 돈으로는 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돈으로도 대학의 자율을 무력화시키고, 극단의 경우 ‘어용화’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말 안 들으면 돈 안 준다’. 지금 우리 대학엔 그런 현상이 짙어 보인다.

  미국의 경우를 참고할 만하다. 미국 정부도 대학교육에 엄청난 돈을 지원한다. 대학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엄청난 지원금은, 대학에 직접 주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 학생의 장학금, 대여 장학금이라는 통로로 대학에 흘러들어간다. 이른바 ‘바우처’ 제도다.

  따라서 대학들은 구차하게 정부에 구걸할 필요도 없고 아첨할 필요도 없이, 의연하게 대학의 자율을 지킬 수 있다. 미국 대학들이, 세계 최우수 대학 20개 중 17개 대학이 미국 대학이라 할 만큼, 비약적으로 발전한 가장 큰 원인이 이것이라고 그들은 자체평가를 하고 있다.
  자율은 그만큼 대학의 생명이고 활력의 원천이다.
 
필자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에서 ‘가치관과 역할과 고등정신기능과의 관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교수와 사범대학 학장을 지냈으며 한국교육학회장, 충북대 총장, 한림대 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행동과학연구소 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교육과 교육학>, <한국의 내일을 묻는다>, <교육난국의 해부>, <학문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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