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15:10 (일)
실학자의 사유엔 성리학적 세계관 공존 가능
실학자의 사유엔 성리학적 세계관 공존 가능
  • 교수신문
  • 승인 2007.04.16 13: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리학과 실학' 단순한 이분법은 인식의 지평 좁혀

최근, 한국학 분야에서 실학에 대한 새로운 논의와 담론이 형성되고 있음은 매우 고무적인 사실이다. 실학에 대한 논의는 어차피 한국사회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성리학적 체계를 극복·지양하고 근대로 이행해 갔는가를 문제시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학문적 의미는 심대하다. 특히 근자에 한영우 교수의 주도로 한림대에서 펴낸 <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는 잘 짜인 기획과 뚜렷한 문제의식을 안고 있어서 최근 실학연구의 전선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가를 잘 알려준다.

우선 이 책에서는 아예 실학의 실체를 부정하거나, 섣불리 조선 후기 실학을 상대화하여 여러 실학 중 한 유형으로 범주화하려고 하지 않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또한 특정 당파의 사상에 귀속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견해를 지양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안정되고 건실한 논의의 틀을 확보하고 있다. 이 책의 발간을 계기로 실학이란 매우 난해한 퍼즐게임에서 무언가 유의미한 그림과 도형이 추출되었으면 한다.

‘근세’가 지닌 개념의 유연성과 개방성

앞의 책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중세’와 ‘근대‘의 이분법을 극복하자는 한영우 교수의 제안이다. 한 교수의 이 제안은 기존의 시대구분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 교수의 주요 논지는 조선후기를 ‘근세적 유교사회’라는 독자의 용어로 개념화하여, 그 속에서 서구적 의미의 ‘중세적 요소’와 ‘근대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에 있다. 필자로서는 이 개념의 외연과 내포가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약간의 혼란을 느낀다. 그리고 ‘근세’라는 용례가 지금까지 많이 논의되어 왔던 ‘중세사회의 해체기’, 혹은 ‘근대를 향한 이행기’라는 개념과 어떤 질적인 차이를 지니는지 아직 모호한 요소가 남아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제안이 ‘실학’ 혹은 ‘실학자’들의 실체적 진실에 한걸음 더 가까이 접근한 소중한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이 제안이 지닌 유연성과 개방성은 앞으로 실학 연구를 둘러싼 불필요한 갈등과 혼란을 상당 부분 제거할 계기를 제공해 주리라 본다. 기실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은 성리학과 실학 사이를 갈라놓은 단순한 이분법적인 도식에 매몰되어 인식의 지평을 스스로 좁혀 왔다. 예로 근대적 모형에 가장 가까운 다산의 경우에만 하더라도 그의 사상의 층위는 매우 넓고 복잡하다. 김영식 교수는 다산과 주자의 과학사상에서는 사실상 본질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정일균 교수는 다산이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지향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다산은 그의 <심경밀험>에서는 정주 성리학의 윤리적 계몽성을 넘어서는 사상적 이탈을 감행하고, 또 다른 책인 <소학지언>에서는 일률적으로 반주자학 내지는 탈성리학적 테제로 규정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도 다산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밝은 조명은 상대적으로 성리학의 세계를 온통 중세적 어둠의 세계로 기록하게 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즉 다산의 성리학에 대한 비판은 매우 단선적인 이해 위에 기초하고 있음을 자주 볼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이러한 주장을 통해 실학의 의미 자체를 과소평가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지금의 실학에 관한 논의가 매우 협소하고 제한된 차원의 ‘근대성’의 개념에 매몰되고 있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실학자의 사유 속에서도 성리학적 세계관과의 중첩 혹은 공존현상은 얼마든지 발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실학자의 사유 속에서는 명백히 성리학적 세계에서는 결여되었던 변화와 운동의 개념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과도하게 심학화되었던 앞 시대의 사상을 치용과 사업의 영역으로 관심을 환기시키는 중대한 진전을 보여준다. 그러나 가장 선진적인 북학파들의 일상 속에서도 아직 강고한 형태로 전대의 삶의 방식이 온존되어 있거나, 사실상 이기론적 패러다임에 결박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즉 실학자의 사유 속에서도 얼마든지 성리학적 세계관이 공존할 수 있고, 중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전제 위에서 새로운 시대구분론의 가능성을 발견하여야 할 것이다. 

육경고학 범주화는 현실적 어려움 있어

다음으로 전술한 책에서 새롭게 주목할 점은 서울지역의 육경고학이 실학의 선구라는 주장이다. 즉 왜란전후의 사상계는 조선 성리학보다는 오히려 육경고학이 지배한 시대라는 것이다. 한백겸, 이수광, 유몽인, 허균, 신흠 등 북인과 북인계 남인들이 들고 나온 육경고학이 실학의 선하라는 것이다. 육경고학으로 불린 신 학풍은 윤휴, 허목, 이익, 정약용 등을 통해 경기남인의 학풍으로 이어졌고, 정조도 남인의 육경고학을 높이 평가하고 왕권강화론을 주장하였고, 급기야 17·18세기 노론계로 흘러 진경문화를 일구어 내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일단 실학을 근기남인, 노론 등 당파적 흐름 속에서 갈래짓고자 하던 기존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신선함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의 사상적 기반이 성리학과는 구별되는 육경고학에 근거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많은 논란이 예상된다. 지금 육경고학의 흐름 속에 편입한 인물들은 대체로 정통적인 성리학자들과 비교하여 사공학적인 성향이 강하고, 삼교회통적인 요소도 강하며, 이른바 선기후도적인 사유체계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 많다. 그런 점에서 실학적 모티브가 강한 인물군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인물들이 과연 일본의 오규 소라이(荻生徠)나 이토 진사이(伊藤仁齋)처럼 성리학에 대한 대항의식을 근저로 한 새로운 학문적 테제를 확보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은 숙제로 남는다.

퇴계 이황의 영정. 정순우 교수는 퇴계의 주리론이 화담계열보다 더욱 실학적 친화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예로 한강 정구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퇴계학파의 주리주의적 학문 경향과 함께 실천적 학문을 강조하는 북인 계열의 남명학적 흐름을 함께 수용한 인물이다. 특히 그는 육경고학적 성향이 가장 강하고 근기 학통을 형성한 미수 허목의 스승이다. 그에게서는 이학적 요소뿐만 아니라 병학, 예학, 역학, 심지어는 음양학, 술수학 등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영역이 다양하다. 그러나 그는 다산이 “퇴계한강의 학만이 오직 대령 남쪽에 전해온다”고 평할 정도로 성리학적 세계에서 정통성을 확보한 인물이다.

책에서 육경고학의 인물로 거론한 권문해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퇴계에서 수학한 인물로서 대구부사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육경고학의 한 전범으로 소개한 그의 <대동운부군옥>도 그의 대구부사 재직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학사 김응조나 목재 홍여하, 해좌 정범조 등이 모두 이 책의 값어치를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의 세계관이 성리학적 세계를 결코 이탈한 것은 아니다. 또한 상촌 신흠의 경우에도, 양명학과 노장에 대해서도 매우 개방적인 자세를 취했고, 백가서를 두루 섭렵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던 이제신이나 박세채, 최명길 등도 조선적인 풍토에서는 응당 육경고학파의 범주 속에 편입되어야 할 것인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말하자면 육경고학의 사상적 취향은 좁히면 허목 등 매우 제한적인 인물에 한정될 우려가 있고, 그 외연을 넓히면 매우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지적 흐름을 상정하게 되어 범주화에 상당한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주리론이 화담계열보다 더욱 실학적

마지막으로 좀 더 깊이 논의해 볼 문제는 과연 주기론자들의 사상이 실학사상의 주류라는 지금까지의 통설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가의 문제이다. 한영우 교수에 따르면, 한쪽에는 친주자적인 이황이, 다른 흐름으로는 서경덕이나 조식처럼 독자의 기철학을 발전시켜 그 문인들이 뒤에 북인으로 결집되어 실학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좀 더 확대된 논의들 중에서는 이들 화담계열과 남명계열의 북인 사상이 동명 김세렴에게로 전해졌고, 그것이 혈연관계를 통해 반계 유형원으로 계승되었다는 가설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앞으로 좀 더 검토할 부분이 존재하나 적어도 서화담 계열의 사상이 퇴계의 사상보다 더욱 현실 개혁적이고 실학적이라는 가설은 전적으로 허구적이다. 화담의 유기철학에서는 구체적인 삶과 역사가 펼쳐지는 理 현상의 세계도 氣의 취산 작용의 결과일 뿐, 인간의 주체적 의지나 윤리성의 소산은 아닌 것이다. 화담에 따르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만물은 모두 이 一氣의 가운데에서 떴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잠시 깃들어 있는 존재”일 뿐인 것이다. 이에 화담의 유기론은 인륜과 도덕의 문제에서 매우 취약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퇴계는 이러한 조선전기의 주기론적 해석의 한계를 맹렬히 비판하면서 그의 새로운 경 철학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즉 화담의 무위적이고 노장적 사유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한 철학이 퇴계의 주리론인 것이고, 그런 점에서 화담계열보다는 오히려 더욱 실학적 친화성이 있다. 

최근 한영우 교수를 중심으로 제기된 몇 가지 제안은 실학 연구의 새로운 출구를 제시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디딤돌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다만 아직까지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례를 수렴할 수 있을 정도의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본고가 이 제안에 대한 좀 더 다양한 찬반 논쟁을 유인하는 촉매가 되었으면 한다.

정순우 / 한국학중앙연구원·교육사
필자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18세기 서당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부의 발견> 등의 저서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