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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의, 미디어에 의한, 미디어를 위한 지식담론
미디어의, 미디어에 의한, 미디어를 위한 지식담론
  • 김재환 기자
  • 승인 2001.09.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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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오른 ‘미디어 지식인’ 시대 … 자기성찰 없는 담론은 허구
최근의 지식인 논쟁은 언론, 그것도 거대언론인 ‘조선일보’의 문제제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식인 사회 내부의 자기 성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과거의 지식인 논쟁이 단행본이나 계간지 등 지식인 매체에 의해 주도됐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문제는 지식담론이 미디어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항제 부산대 교수(신문방송학)는 최근 한 논문에서 “미디어가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에 못지 않게 자신도 권력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권력화한 미디어 속에서 지식인에 관한 담론이나 그가 생산해낸 담론은 종속적 지위로 전락한다. 미디어가 창출한 ‘권력장’에서 지식담론은 제자리를 잃고 미디어 권력의 재생산에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지식인의 두 유형

이러한 현상은 지식인들이 자초한 것이기도 하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가 만들어낸 ‘미디어 지식인’이라는 용어는 미디어 권력에 종속되어 있는 지식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는 최근에 펴낸 ‘대중매체의 이론과 사상’(인물과 사상사 刊)에서 미디어 지식인을 이렇게 정의한다. “미디어를 가장 중요한 사회참여적 활동무대로 이용하기 위해 미디어의 요구와 필요에 최소한의 타협을 하는 동시에 미디어를 비교적 성역과 금기로 간주하고 그 원칙에 따라 사회이론을 개발해내고 사회비평을 하는 지식인.”

강 교수가 제기한 미디어 지식인은 진보나 좌파를 자처하면서 보수언론에 글을 기고하는 지식인을 의미하지만, 외연을 넓혀 언론과 직간접적인 공생관계에 있는 지식인을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용어로도 지칭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지식인이 미디어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언론이 자신이 정한 의제에 따라 입맛에 맞게 지식인을 활용하고, 지식인들이 언론의 권력장 안으로 스스로 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디어 지식인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현택수 고려대 교수(사회학)가 제기한 ‘텔레페서 형’(telefessor)이다. 이들은 주로 TV를 통해 활약한다. TV의 대중적인 영향력과 지식인에 대한 전통적인 숭상 풍조가 결합되어 이들은 영상시대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부상한다. ‘도올 신드롬’이 바로 그것이다. 이른바 원전 해석 논란과 별도로, 도올 김용옥은 영상시대 지식인을 상징하는 전형적 사례로 일반인들에게 각인되었다. 여기서 지식인은 엔터테인먼트가 되고, 지식담론은 ‘쾌락으로서의 지식’으로 전락한다. TV가 재생산하는 ‘즐거운 지식’은 위험하지 않다. 현안에 대한 ‘불편한’ 문제제기나 신랄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체제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불온하지 않은 것만이 TV가 원하는 지식이다.

또 하나의 유형은 ‘폴리페서’(polifessor)다. 지난 96년 정치평론가 이원태 씨가 제기한 이 유형은 주로 신문을 통해 활약한다. 지식인의 자율성은 TV보다 상대적으로 높지만, 이들은 신문 칼럼을 권력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으로 활용한다. 이원태 씨는 “지식으로 권력을 구걸하고 권력으로 지식을 매수하는 폴리페서의 악순환은 이제 끝나야 한다”고 했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칼럼리스트들의 목록은 국회의원 후보거나 장차관 후보들의 명단이다. 이데올로기적 스펙트럼도 압도적 보수 우위다. 좌파학자들은 다른 입장의 논자들과 대화를 하려 하지 않고 ‘그들만의 리그’에서 머물러 있다. 강준만 교수는 “보수주의자들은 보수적 사상의 대중화와 전파에 별 거부감없이 능동적이다” 라고 지적한다.

미디어에 참여하는 지식인들은 “자기의견을 미디어를 통해 발표하는 것이 뭐가 나쁜가”하고 반문한다. 미디어의 ‘색깔’에 동의한다면, 오히려 지식인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권력화한 미디어 속에서 그의 독립성을 유지하기란 어렵다. 게다가 ‘문화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지식인의 영향력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크다고 할 수 있다. 곧, 문화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지식인은 매체권력을 재생산하고, 스스로 권력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지식인이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거대언론과는 차별되는 지식인 저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계간지나 학술지 등에 한정된 지식담론에서 벗어나 현안에 대한 지식인들의 시각을 독립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저널이 거대미디어에 의한 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같은 이유로 지식인의 독립적 저널 ‘자유’(liber)를 펴낸 바 있다.

홍성민 동아대 교수(정치학)는 “학위제도와 교수임용 등 지식인 공급의 차원, 언론 등을 통한 지식담론의 수용이라는 수요의 차원을 연구하는 ‘지식인 사회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제 문제는 지식인 사회 ‘외부’가 아니라 ‘내부’이다. ‘지식인 사회학’은 하나의 성찰을 위한 계기다. ‘외부’의 과제에 대한 비판과 대안제시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지식인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성찰이 배제된 담론이 허위라는 것은 자명하다. 김재환 기자 weiblich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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