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07:00 (토)
미국 유학파와 전통적 엘리트의 힘겨루기
미국 유학파와 전통적 엘리트의 힘겨루기
  • 교수신문
  • 승인 2007.04.02 19: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깊이읽기_<궁정전투의 국제화>  이브 드잘레이·브라이언트 가스 지음 | 김성현 옮김 | 그린비 | 2007

1917년 1월 1일 한국 근대문학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춘원 이광수가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에 <무정>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족주의자로서 제국주의에 협력했던 이광수는 구시대의 유학자들과 철저하게 단절하고 서양 학문으로 무장한 신세대 엘리트였다.

<무정>의 주인공인 경성학교 영어교사 이형식은 이광수의 분신이나 다름없다. 식민지 조선 민족의 계몽을 위해 목청을 돋웠던 이형식은 조선의 무궁한 영광과 발전을 위해 미국 ‘시카고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과연 이광수가 걸어갔던 길을 이형식도 따라 갔을까. <무정>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광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땅은 날로 아름다워 간다.” “우리의 어둡던 정신에는 날로 빛이 난다.” 이광수의 바람대로 이형식이 귀국한 식민지 조선은 과연 아름답고 빛이 났던가.

이광수의 혜안이 그야말로 글로벌했는지는 몰라도 이후 시공간을 뛰어 넘어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이형식과 같은 존재들이 등장한다. 이른바 시카고 보이스다. 이들은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유학한 칠레 경제학자들의 별칭이다. 시카고 보이스는 칠레로 돌아와 전통적 엘리트들인 대지주·법률가들과 치열한 힘겨루기를 벌인다. 구시대 엘리트들은 자본과 가문으로 무장했고, 시카고 보이스는 미국산 경제학을 무기로 삼았다. <궁정전투의 국제화>의 두 저자는 이들의 대결을 은유적으로 ‘궁정전투’라 부른다. 그러나 저자들이 단순하게 칠레 내의 정치적 헤게모니의 싸움 혹은 국가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궁정전투’로 은유한 것은 아니다. 미국이 만들어낸 지식 네트워크와 이를 기반으로 정치·경제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라틴아메리카(칠레,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의 소수 관료들과 국제적 엘리트들 사이의 ‘은밀한 동맹’이야말로 궁정전투의 본질이다.

이 책은 라틴아메리카를 사례로 미국산 지식의 국가권력화를 미시적인 차원에서 분석한 역작이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유럽대륙을 지향하는 법률의 강조에서 미국을 지향하는 경제학으로의 이동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이다. 또한 그 변동의 순간들을 미국의 전략적 차원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궁정전투의 국제화>는 라틴아메리카에 한정하지 않고 국가권력을 둘러싼 지식투쟁의 흔적들을 국제적인 차원에서 분석한 실증적 사례 보고서이다.

시카고 보이스의 아메리칸드림

저자들이 분석 대상으로 삼은 모델은 미국의 시카고학파와 그의 적자들인 시카고 보이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경제·법률 엘리트들을 비롯한 국제적 법률 엘리트들 간의 역학관계이다. 저자들이 말하는 시카고학파는 케네디 정부와 함께 형성된다. 케네디는 동부 아이비리그 출신인 케인즈학파 경제학자들을 정부의 관료로 대거 등용한다. 마침 미국 중부에 위치한 시카고대학에서는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시카고학파가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다.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시카고학파는 공화당의 소수 보수주의자들과 연대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해 갔다.

시카고학파는 대부분 미국 이민 1세대와 2세대였다. 그들은 그동안 미국을 지배해왔던 토착 엘리트들과 경쟁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들에겐 가문의 영광도 자본도 사회적 ‘빽’도 없었다. 하여 그들은 지적 경쟁을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지적 경쟁을 위해 동원한 학문은 수학적인 기술이었다. 수학적인 엄격성이야말로 케인즈학파를 이길 수 있는 유용한 도구였다.

이 무렵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전략을 마련한다. 1960년대는 이른바 냉전 전략 모델이 절정에 도달했던 시기였다. 포드재단, 국제개발처, 진보를 위한 동맹, 법과 발전 등의 기관과 프로그램이 가동됐다. 이런 것들은 라틴아메리카의 젊은이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전략이었다. 미국의 해외지원 프로그램에 힘입어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 라틴아메리카의 젊은이들은 자연스럽게 시카고학파의 제자가 되었다. 시카고학파가 주장했던 수리경제학은 언어·문화적인 능력의 중요성을 최소화했다. 따라서 수리경제학은 미국에 있는 외국 학생들을 통합하는 데 매력적인 학문이었다. 미국인들과는 문화도 언어도 인종도 다른 라틴아메리카 유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형식이 문명의 상징을 서양의 기계문물과 영어로 파악했듯이, 라틴아메리카의 젊은이들에게는 수리경제학이 곧 세계화의 상징이었다.

시카고학파가 길러낸 칠레의 시카고 보이스는 쿠데타와 함께 등장했다. 이미 그들은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 형성했던 것과 유사한 정치동맹을 칠레에서 형성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73년 피노체트는 아옌데 정권을 쿠데타를 통해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았다. 피노체트는 그동안 권력의 심장부에 포진해 있었던 구엘리트 세력을 추방·살해하고 그 자리에 시카고 보이스를 등용했다. 그들은 기술적 전문성과 정치적 개입의 결합을 강조하는 용어인 테크노폴(technopols)로 찬양되었다.

시카고 보이스는 단순한 경제학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정치가였고, 권력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의사(擬似) 군인’이었다. 미국의 시카고학파는 자신들의 지식을 국제시장에 유통시켰으며 라틴아메리카는 이러한 지식을 수입하여 국가의 헤게모니를 미국식으로 장악해갔다. 신엘리트에 의해서 축출된 구엘리트들 역시 새로운 상징권력을 마련했다. 법률로 무장한 전통적인 엘리트들은 인권을 무기로 신엘리트들과 투쟁하였다. 그렇지만 군부의 억압적인 정치권력에 저항하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외쳤던 지식인들 또한 미국과 연루되어 있었다. 인권운동이나 시민운동의 주축들은 칠레와 브라질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권력을 획득하자 곧 정치계로 입문했다. 더욱이 새로운 형태의 초국가적인 NGO는 세계화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힘썼다. 그들은 사회적 폭력을 줄일 수 있는 새로운 정치 기술을 발명하는 열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사업 법률가가 되어 재계의 이익에 봉사하는 ‘고용된 총잡이’의 역할을 자임하였다.

새로운 ‘지식 네트워크’는 가능한가

한쪽에는 경제, 다른 한쪽에는 법률이 라틴아메리카의 정치권력을 구성하는 핵심이었다. 미국이 생산한 법률과 경제학은 라틴아메리카에 이식되어 상징권력이자 상징자본으로 변화했다. 막스 베버의 말처럼 정치란 ‘악마적인 힘들’과 관계를 맺는 일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정치가들이 이런 악마적인 힘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 동원한 것은 미국산 지식이자 그들이 구성한 지식 네트워크였다.

이브 드잘레이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냉전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 라틴아메리카의 궁정전투는 동남아시아나 한국에서도 익숙한 시나리오다. 따라서 <궁정전투의 국제화>는 한국 사회의 정치권력을 분석하는 유용한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다. 현재 한국에는 수많은 ‘이형식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고급 기술과 지식으로 무장하여 전문기술지식을 독점하는 테크노크라트이다. 지식인은 권위를 통해 대중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누구보다 대중적이어야만 한다.

한국의 ‘궁정전투’를 분석하는 것도 물론 의미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질문해야 할 것은 그동안 한국을 지배해 왔던 미국산 지식 네트워크에 균열을 내고 이를 재배치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 네트워크의 형성은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가 아닐까.

어린 시절 해외에 살다가 장성한 뒤 일자리를 찾아 국내로 들어오는 젊은이들을 가리켜 ‘연어족’이라 부른다. 조기유학 열풍에 따라 급증하는 미래의 연어족들은 과연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까. 그들이 이 ‘궁정전투’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의 네트워크는 어떤 모습일까.

이승원 / 한양대·국어국문학

필자는 인천대에서 ‘근대전환기 기행문에 나타난 세계인식의 변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조교수이다. <소리가 만들어낸 근대의 풍경> 등의 저서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