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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中國 散策(28) _ 中 고전명시와 시인들
이중의 中國 散策(28) _ 中 고전명시와 시인들
  • 이중 전 숭실대 총장
  • 승인 2007.03.26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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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桑田碧海 소동파의 詩心이 펼쳐진 듯

동파공원 내 소동파 동상.
중국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제대로,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杜甫나 李白, 陶淵明, 蘇東坡의 시 몇 구절 정도는 알고 있는 것이 어떨까. 새삼스럽게 중국의 고전 명시들을 외울 수는 없겠지만, 좋아하는 시 구절 쯤은 평소에 수첩에 적어두면 대화할 때 요긴하게 활용할 수가 있다. 현대 시인으로는 魯迅, 많은 중국인들이 애송하는 그의 孺子牛는 짧고도 애국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어서 알아두는 것도 괜찮다.
   

    橫眉冷待千夫指 / 俯首甘爲孺子牛
    눈썹을 치켜뜨고 천인의 손가락질 쏘아보지만   
    머리 숙여 기꺼이 아이들 등 태우는 소가 되리라

1932년에 노신이 쓴 이 시는 1942년에 모택동의 문학 강화 한 마디로 전 중국의 애송시가 되어버렸다. 연안 시절, 한 문학예술 좌담회에서 모택동은 노신의 이 시를 두고 “우리는 노신을 본받아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인민대중의 ‘소’가 되어 목숨이 붙어있는 한 헌신적으로 봉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알다시피 눈썹을 치켜세운다는 것은 대결과 전투의 표정이다. 고개를 바짝 들고 눈앞의 적과 맞선다는 뜻이다. ‘千夫의 指’란, 수많은 사람들이 비난하며 손가락질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엔 옛날부터, 천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으면 병을 앓지 않아도 죽는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당시의 노신의 처지가 그렇지 않았나 싶다.  그는 그를 비난하고 적대시하는 세력들과 맞서 싸워야 했던 것이다. ‘유자우’는 소처럼 넙죽 엎드려 등에다가 아이들을 태운다는 얘기가 되는데, 철저한 봉사와 헌신의 자세이다. 천부가 중공당과 싸우는 적이라면 유자는 인민대중을 지칭한다.

미국의 닉슨 전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여 야인이 되었을 때, 모택동의 초청으로 다시 중국을 방문했다. 거의 사경을 헤매다시피 하던 모택동을 만나서 닉슨은 모택동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하여 미국과 중국의 밝은 장래를 전망했다. 1965년 5월에 쓴  ‘다시 정강산을 찾아서(重上井岡山)’의 마지막 구절이다.

     世上無難事 / 只要肯登攀
     세상에 못해 낼 일 없노라
     맘먹고 오르려고만 한다면
    “태산이 높다 한들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러한 우리 시조와 같은 뜻이지만, 중국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모택동의 시 한 구절로 속뜻을 전할 수가 있다. 사실 이 시는 의미가 깊은 시이다. 시대적 배경을 두고 하는 말이다. 모택동이 38년 만에 정강산을 찾은 것이 바로 문화대혁명을 한해 앞둔 1965년이었다. 이 시간의 의미가 중요하다. 인간에겐 初心이란 것이 있다. 정강산은 모택동에게 있어서 혁명의 초심을 상징하는 곳이 된다. 문화대혁명이란 모택동에게 있어서 제2의 혁명일 수 있었다. 사실 그 자신이 문화대혁명을 자산계급에 대항하는 무산계급 혁명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정강산에서 모택동이 머물렀던 곳이 정강산 빈관인데, 1989년 내가 정강산을 찾았을 때만 해도 영업을 하고 있었다. 낡은 여관인데, 여름인 데도 너무 추워서 실내의 난방기를 틀었더니 그 소리가 너무 요란해서 밤잠을 설쳤던 기억이 있다. 모택동이 묵었던 방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침대와 탁자, 의자도 그대로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방문 옆 표지판엔 ‘毛澤東同志/重上井岡山時的住房(모택동이 정강산에 다시 올랐을 때 묵었던 방 1965.5.22~28)’이란 날짜까지 적혀 있었다.

중국에선 손꼽히는 시인 소동파를 노산 이은상 선생은 아주 싫어했다. 한국인을 깔보고 폄훼했다는 것이다. 고등학생일 때 노산의 글을 읽고 나도 흥분한 적이 있는데, 그 근거를 잊어버렸다. 아마도 노산 문집을 찾아보면 노산이 노여워한 까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래로 소동파뿐이 아니고 중국인, 특히 중국의 지식인들은 한국인을 한 수 아래로 접고 본다. 최고로 치켜세운다고 하는 말이 기껏 小中華니 하는 말들이다. 중화문명, 좁게는 유가문화를 흉내 내는 데 있어서 한국 사람들이 주변의 다른 오랑캐들보다 낫다고 하는 것이 칭찬의 전부라 할 것이다. 朝貢도 잘 바치고 고분고분할 때에는 형제의 나라라면서 우리에게 아우 대우를 해주었다.

그러나 소동파는 한국을 깔보는 것 말고는 역시 탁월한 중국의 시인임에 틀림없다. 특히 기개도 대단해서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에 대해서도 거센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유비가 蜀을 집어삼킨 것도, 비록 天下三分之計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잘못된 일이라고 비판했다. 泣斬馬謖으로 널리 알려진 군율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울면서 馬謖의 목을 벴다는 泣斬馬謖의 경우도 애초에 유비가 써서는 안 된다고 한 사람을 공명이 우겨서 등용해 저질러진 일이라고 공명을 나무랐다.

소동파는 대대로 비단 장수를 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송대에 꽃피었던 과거제도가 아니었으면 벼슬길은 물론이고 재상에 오를 수도 없는 신분이었다. 소동파가 활동하던 시기 송나라는 王安石의 신법파와 司馬光, 歐陽脩의 구법파로 나뉘어 당쟁이 치열했다. 소동파는 자기의 과거급제 때 시험관이었던 구양수 편에서 정치를 했다. 당시 송나라는 구법파와 신법파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정권다툼을 했는데 그가 59세 때에 다시 신법파 세상이 되자 멀리 해남도로 유배를 갔다. 7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겨우 사면이 되어 상경하던 중 상주라는 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 전에도 그는 정부를 비방했다 해서 1백일 옥살이를 했고, 이어 황주로 귀양을 갔는데 그곳 東坡 땅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그래서 그의 본명인 軾보다 동파라는 호가 더 유명해졌다. 황주 귀양살이에서 얻은 동파 8수 가운데 다음 구절을 나는 가끔 인용한다.

 良農惜地力   착한 농사꾼은 지력을 아끼나니
 幸此十年荒   십년의 황무지가 오히려 다행일세
 
동파 땅은 오래 갈지 않고 내버려 둔 황폐한 땅이지만 그런 만큼 지력이 쌩쌩하게 남아있어서 오히려 새로 개간하기는 안성맞춤이란 뜻이다. 60년대 이래의 한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이나 개혁개방과 더불어 봇물 터질듯한 중국의 桑田碧海를 보면 이 시구가 절로 떠오른다. 1988년의 88서울 올림픽, 2008년의 북경 올림픽, 20년차로 두 나라는 국제 올림픽을 치르거나 예정하고 있다.

두 나라는 1950년에 한반도에서 피를 흘리며 싸웠고, 이후 중국은 인민공사, 대약진운동 등의 실패에 이어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완전 피폐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다가 1976년 모택동의 사망과 더불어 등소평의 시대가 막을 올리면서 새 중국 30년의 황무지가 비로소 본격적으로 개간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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