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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日 반가사유상과의 비교
中·日 반가사유상과의 비교
  • 임남수 교수
  • 승인 2007.03.12 15: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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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사유의 고요함 배어 있는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의 간다라 지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간다라에서 반가사유상은 석가의 일생을 나타낸 불전이나 기적 장면인 神變圖 등에서 볼 수 있다. 태자 석가가 출가를 결심하는 장면이나 석가모니의 신변에 놀라 찬탄하는 보살의 모습 등에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단독 예배像으로도 제작되었으나, 이 像들은 머리에 장식이 있는 터번을 두르고 손에는 연화를 잡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관음보살로 생각되고 있다. 장식이 있는 터번을 쓴 것은 태자 석가에서도 볼 수 있다.

신들의 왕인 인드라가 보관을 쓰듯이 세속의 왕자로서의 성격을 나타낸 것이다. 이에 비해 미륵은 브라만 출신을 상징이라도 하듯이 머리를 묶어 보계를 만들고 손에는 물병을 든 행자의 모습이었다. 반가사유상은 인도의 불교미술에서는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불교 전래와 함께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에 들어왔다.

6세기 이후 중국에서는 나무 밑에서 반가사유의 자세를 취하는 예가 많았고, 명문에는 ‘태자사유상’ 또는 ‘수하사유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명칭으로 추정한다면, 중국에서 반가사유상은 중생을 위해 염부수 밑에서 고뇌하던 태자 석가의 모습으로 이해됐던 것으로 보인다. 인도에서는 태자 석가의 사유상은 염부수 밑에서 결가부좌를 하고 선정에 잠긴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므로, 태자 석가의 사유에 대한 인도와 중국의 형태상 차이는 뚜렷하다. 이에 비해 중국의 미륵보살상은 대좌에 앉아 두 다리를 내려 교차시킨 交脚像이어서 인도와는 전혀 다른 전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편, 한국의 반가사유상은 존명을 명확히 기록한 예가 없지만 일반적으로 미륵으로 간주되어왔다. 특히 경주 단석산 마애불상군에는 반가사유상도 있는데, 암벽에 새겨진 명문에는 미륵으로 판독할 수 있는 부분도 있어서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로 추정하는 방증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중국에서 성행했던 미륵교각상은 한국에서는 유행하지 않았으며, 삼국 가운데 신라의 미륵신앙은 화랑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므로 중국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일본에서는 한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까닭에 반가사유상의 존명이 野中寺 반가사유상(666년),  명문에는 ‘미륵’, ‘隆寺資材交替帳’(890년)에는 ‘미륵보살’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문헌기록에 의하면 7세기 전반, 일본의 聖德太子가 건립한 것으로 알려지는 사찰들은 모두 미륵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 중 中宮寺와 隆寺 등은 반가사유상이므로 다른 사찰도 반가사유상을 본존으로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生身의 태자와 補處佛로서의 미륵보살을 연관 짓는 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인도에서 시작한 반가사유상은 중국에서 태자사유상 또는 수하사유상으로 불리고, 한국과 일본에서는 미륵보살로 성격이 변화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임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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