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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중국산책 (25) 장개석의 눈물
이중의 중국산책 (25) 장개석의 눈물
  • 이중 전 숭실대 총장
  • 승인 2007.03.02 18: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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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소탕'은 '항일'대의에 밀리고

   서안사변의 주역 장학량의 뒤에 ‘고원복이 있었다’는, 그 고원복은 누구일까. 그는 한때 중공군의 포로였다. 그 이전에 그는 장학량의 호위대장이며 심복이었다. 그런 그가 적군의 포로가 되었으니 낙담과 비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원복에게 새로운 세계가 다가왔다. 모택동의 통일전선 공작이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그는 홍군이 자기와 같은 포로들을 특별히 우대하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 ‘停止內戰 團結抗日’이란 구호도 가슴에 와 닿았고, 민족의 대의로 받아들여졌다. ‘攘外必先安內’라는 장개석의 주장은 당면한 민족의 生死存亡을 돌보지 않는, 이기적이며 반역적인 구호로 들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홍군은 동북군 포로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홍군과 동북군이 연합하여 공동의 적인 일본을 물리치고 하루 빨리, 머나먼 동북의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했다.

   동북군 진영으로 돌아온 그는 장학량에게 매달렸다. 홍군으로부터 들은 ‘민족 대의’를 내세워 장학량을 설복하기 시작했다. 장학량이 또 누구인가. 장작림의 아들이다. 만주 군벌 장작림은 모택동의 마르크스주의 스승마저 학살한 장본인이지만, 프랑스와 영국을 합친 것보다 더 넓은 만주 땅의 지배권을 쉽게 일본에게 내줄 수 없는 군벌이었다. 일본 군부는 그가 타고 있는 열차를 폭파시켜 버렸다. 일본은 장학량 개인에게도 원수 중의 원수였다. 그러한 일본에 대항하는 것은 민족의 대의이자 부친의 원혼을 달래는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깊은 고민이 있었다. 장개석과의 형제로서의 의리였다. 장개석과 장학량은 열세 살 차이였다. 그러나 장학량은 장개석에 대해 “나에게는 아버지와 같았다”고 말하곤 했다. 1928년 6월, 만주 군벌인 그의 아버지가 암살되자 장개석은 그에게 만주를 떠맡겼다. 그는 하루 아침에, 중국 동북 3성의 상속자가 되어버렸다. 1931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공하기 전까지 그는 그의 아버지가 누렸던 지방 통치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버지가 만주 군벌로 장개석의 북벌의 대상이었던 것과는 달리 장개석과 형제의 의를 맺고  중앙정부의 통치권 아래 있었다.   

1935년 10월, 중국 공산당은 대장정을 끝내고 북서지방에 둥지를 쳤다. 장개석은 모택동과 홍군을 섬서성 골짜기에 가두어두려고 했다. 그리고 공산당 소탕 계획을 세워 ‘소공사령부’를 만들고 자신이 사령관, 장학량을 부사령관 겸 사령관 대행으로 임명했다. 연안지방에서 300킬로 떨어진 西安에 사령본부를 두었다. 섬서지방은 장개석 군대로부터 완전 포위되고 있었다. 모택동은 필사적으로 소련과 연결되는 활로를 찾아야 했다. 생존을 위한 방어체는 막강한 화력과 병력을 가진 장개석으로부터 언제 점령당할지 모르는 치명적인 위험을 안고 있었다. 섬서성에서 소련 관할의 영토까지 가장 가까운 곳은 신강과 외몽골이었다. 신강은 1,000킬로 이상 떨어져 있었고, 외몽골은 500킬로 떨어져 있었다. 장학량의 동북군은 바로 이 두 지역으로 통하는 요충지에 약 30만 명의 대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1935년에서 1936년으로 넘어가는 시간대에 장개석과 모택동의 위치는 이처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장개석은 중국 공산당 소탕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었고, 모택동은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필사의 항전을 해야만 했었다. 장개석과 장학량의 결속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장학량의 새로운 고민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장개석에게도 중국의 통일이라는 명분과 대의가 있었고, 장학량 자신의 성분 역시 공산주의와는 애초부터 멀리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만주 전역을 삼키고는 대륙을 넘보고 있다. 장개석의 공산당 소탕과 연결되는 통일의 대의는 당면한 항일과 연결되는 민족단합이라는 대의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장학량은 새로운 대의에 따르기로 결심을 하고 곧바로 고원복을 홍군 주둔지로 보냈다. 홍군과 동북군이 힘을 모아 항일전선을 구축할 것을 의논하자고 했다. 이 포로 특사를 모택동이 직접 만났을 지도 모른다. “장학량의 뒤에 고원복, 고원복의 뒤에 ‘모략대사’ 모택동이 있었다”는 대목은 이래서 나온 것이다. 그 후 장학량은 직접 보안으로 주은래를 찾아간다. 오늘에 와서 당시의 이러한 비밀스런 만남들은 공개적인 회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서안사변은 동북군 사령부의 장학량, 양호성 두 지도자들의 민족대의가 빚어낸 우발적인 사건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미묘한 움직임들이 뒤안길에 깔려 있다.
 

  일본군의 대륙침공에 맞서기 위해서는 정국의 변환이 필요했고, 이 대변환을 주도하는 샅바싸움에서 모택동이 선수를 쓴 셈이다. 모택동의 선수가 통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른다.  장개석을 연금해버린 그날의 사건 자체를 공산당이 직접 사주하거나 조종했다는 증거는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장학량이 서툴러서 일을 갑자기 저질러 버렸다고 주은래가 아쉬워했다는 기록은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이 세기적인 사건은, 민족과 항일이라는 대의명분을 검어 쥔 공산당이 고원복, 장학량을 뒤에서 움직여 공산당 소탕과 통일을 주장한 국민당을 힘(강제 연금)으로 눌러버린 사건으로 확대되고 만 셈이다.
   공산군의 완전 섬멸을 눈앞에 두고 장개석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서북 오지에 갇혀있다시피 한 중공당이

아니던가. 장개석의 원한은 깊고 깊었다. 남경으로 따라나선 장학량을 장개석은 평생을 자기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남경에서 중경으로, 다시 대만으로 끌려 다니면서 장학량은 일생을 감옥 아닌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다. 양호성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국민당의 패전 직전에 중경의 한 감옥에 끌려가 비밀리에 죽임을 당했다.

   사건이 터지자 세계의 이목은 중공당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장개석의 목숨도 이제 끝이라는 시각이었다. 남경에서 급히 서안으로 날아온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도 그렇게 생각했다. 낌새도 심상치 않았다. 동북군의 일부 젊은 군인들은 장개석의 감금을 혁명이며 항일의 첫 걸음이라고 환호하며 장개석의 처단을 주장했다. 소식을 들은 많은 공산당원들도 처음엔 장개석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소개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마오>에도, 애초에 모택동은 장개석을 버리고 새로운 패권을 모색했다고 적고 있다. 

   결국 장개석은 살아서 남경으로 돌아갔지만, 장개석의 생사를 두고 국내외에 걸쳐 많은 논란과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논쟁의 뿌리에는 아주 깊은 사연이 있었다. 향후 중국의 진로와 당면한 항일전선 구축에 있어서 초점은 언제나 장개석이라는 중국의 최대 지도자였다. 장개석이라는 존재를 떠나서 중국의 문제는 누구도, 어떻게도 논의될 수 없었다. 사건 전 해인 1935년 늦여름부터 주은래와 장학량은 공식적으로 만나서 숙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장개석의 존립을 두고 공산당에서 미묘한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애초에 공산당이 구상하는 항일은 ‘장개석을 배제한 항일’이었다. 장개석의 통치를 용인하는 항일은 공산당에겐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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