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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본질은 ‘술이부작’
번역의 본질은 ‘술이부작’
  • 김규종 / 경북대·러시아문학
  • 승인 2007.02.24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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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비평: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의 『희곡선』

'최고 번역본을 찾아서' 이번 회는 러시아의 소설가 겸 극작가인 체호프의 '희곡선'이다. '희곡선'에는 여러 작품들이 실려 있는데 김규종 교수는 그 중에서 '바냐 외삼촌'에 대해 논하고 있다. 김 교수는 세월이 흘러가고 문화가 변함에 따라 예전의 번역도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고 지적한다.[편집자주]

 문학작품을 번역하는 일은 어렵다. 시를 번역하는 사람들은 고충을 토로한다. 김소월의 서정시 ‘가는 길’ 마지막 연을 보자. “앞강물 뒷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의미전달은 모르지만 소월 고유의 운율과 한글의 유려한 맛을 살려내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비속어나 사투리가 덕지덕지 딸려있는 산문번역은 어떠한가. 이런 사정은 희곡번역도 마찬가지다. 주로 대화로 이루어지는 희곡을 극작가가 의도한 방향에 가깝도록 전달하는 일은 쉽지 않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이런 명제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도 만만치 않다. 창작이란 새롭게 지어내는 일이며, 번역은 기존의 창작을 전제로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창작은 이미 ‘창작’은 아니며, 따라서 제2의 창작은 형용모순이다. 아마도 ‘논어’의 ‘술이’ 편에 나오는 ‘술이부작’이란 의미가 번역의 본질에 가깝지 않을까. 원작자의 의도에 따르면서, 옮긴이의 생각이나 감상을 덧대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체호프(1860-1904)의 ‘희곡선’ 번역비평에 즈음하여 필자는 네 가지 번역본을 살펴보았다. ‘세계문학전집 26 체호프, 동완 역, 동서문화사, 1973.’, ‘체홉 희곡선, 체호프, 김학수 역, 삼중당, 1983.’, ‘안톤 체호프 선집 5, 희곡선, 안톤 체호프 지음, 홍기순 옮김, 범우사, 2005.’, ‘체호프 희곡전집, 이주영 옮김, 연극과 인간, 2006.’(이상 연대순). 이상이 지난 30년 동안 출간된 체호프 희곡 모음집이다. 이 글에서는 ‘바냐 외삼촌’에게만 초점을 맞춰보려고 한다. 왜냐고 할지 모르겠다. 비교하기에 지나치게 짧은 단막극이 아니라는 점, 필자에게 친숙한 작품이라는 점, 제목부터 역자들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점 등을 선택근거로 제시한다.


변하는 세월 만큼 새로워야 할 번역

 1920년대부터 일본을 거쳐 식민지조선에 수입된 러시아문학은 일본어 중역에서 출발하였다. 윤동주의 산문시 ‘툴게녭의 언덕’이 그것을 증명한다. ‘투르게네프’는 ‘거지’라는 산문시를 남겼는데, 동주는 거기서 모티프를 얻었다. 중역 아닌 러시아어 원어번역이 가능하기까지 60여년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1980-90년대에 중역의 연면 부절한 흐름이 멈추었다는 보고서는 아직 없다. 1984년에 필자는 어느 ‘세계연극사’에서 ‘와니야 백부’를 보고 놀란 일이 있었다. 외숙을 가리켜 백부라니!

 시간이 흐르면 인간도 언어도 변한다. 변하는 세월에 따라 번역도 새로 단장해야 한다. ‘모던 뽀이 京城을 거닐다’란 흥미로운 서책이 있다. 거기 나오는 ‘모던뽀이’와 ‘모던껄’의 행태는 웃음과 탄식을 절로 자아내게 한다. 그들이 사라진 것처럼 이제 우리는 ‘바아냐’라고 하지 않는다. 이런 표현은 세로쓰기로 출간된 70-80년대 낡은 번역에서 두드러진다. 기타아, 브라아보, 오우버슈우즈, 류우머티즘 등을 추가로 들 수 있다. 결국 나의 ‘바냐 외숙’도 시간과 더불어 ‘바냐 외삼촌’이 되었다. 집에서 외삼촌을 아저씨라고 부르는데 어쩌란 말이냐고 누군가가 항변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에서 이모를 ‘아줌마’라고 불러도 되는가.

 체호프의 희곡은 세계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러시아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극작가는 알렉산드르 오스트로프스키(1823-1886)다. 러시아연극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는 러시아 고유의 습속과 감정을 토속적인 러시아어로 그려냈다. 외국인이 그의 희곡을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반면에 체호프는 러시아의 특수성을 포착하여 극작을 했으되, 특수성을 취하지 않고 보편성의 길로 나아가 그것을 성취했다. 그것은 셰익스피어나 몰리에르, 브레히트가 가지는 보편성과 같은 맥락이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는 명제를 회의하는 것이 필자만의 오해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번역서에 나타난 몇몇 오류를 살펴보자. 여기서부터 필자는 홍기순과 이주영의 번역서만 다루겠다. 앞의 두 책에 오류가 없어서가 아니라, 몇몇 독자를 제외하면 오래된 역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홍기순의 경우 러시아어 ‘бог’를 세 가지로 나누어 쓴다. 아스트로프는 ‘신’(145쪽)으로, 유모는 ‘하나님’(146쪽)으로, 엘레나와 세레브랴코프는 ‘하느님’(각각 212쪽, 220쪽)으로 부른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등장인물들이 서로 다른 종교의 신도라는 징후는 원작 어디에도 없다. ‘매우 서둘러 달려왔다’는 구어적인 표현을 ‘머리가 깨질 정도로 달려왔다’(154쪽)고 옮김으로써 독자에게 적절한 여운을 주지 못한다.

쉼표, 세미콜론, 콜론의 부적절한 사용

 번역문에 자주 등장하는 ‘~에 있어서’(225쪽)가 보이고, 불필요한 형용어가 많다. 제2막에서 엘레나는 바냐에게 칙칙한 집안분위기를 말하는데, 여기서 홍기순은 ‘자신의 팸플릿, 자기 아버지, 자신의 어머니’ (176쪽) 등을 나열함으로써 ‘자신의’ 잉여를 유발한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쉼표로 잘라서 번역함으로써 체호프의 간결한 언어적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제가 이런 말을,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아빠, 우리를 이해하셔야만 해요, 아빠.”(228쪽). 이것은 제3막에서 소냐가 세레브랴코프에게 바냐 외삼촌을 이해해달라고 하소연하는 장면이다. “저는 이걸, 이걸 말하려고 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저흴 이해하셔야만 해요, 아빠.” 이 정도면 충분할 듯하다. 이런 식으로 쉼표가 남용된 곳은 얼핏 보아도 열다섯 군데가 넘는다. 이것은 이주영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런데 이주영의 번역에서 가장 불편한 것은 쉼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세미콜론과 콜론까지 원문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다는 점이다. 제1막에서 숲의 효용을 말하면서 소냐가 말한다. “그곳 사람들은 더 부드럽고 온화하대요; 그곳 사람들은...”(138쪽). “인간은 모든 게 아름다워야 합니다: 얼굴도, 옷도, 마음도, 생각도요.”(156쪽). 콜론과 쉼표와 결합도 적지 않다. “못생긴 여자한테는 그렇게들 말하죠: 당신의 눈은 아름다워요, 당신은...”(166쪽). 이런 점은 옮긴이가 콜론과 세미콜론의 역할과 기능을 오래 숙고하지 않은 데서 기원하는 듯하다.

 그는 “애인이 죽었다”는 것을 “자살했다”(132쪽)고 옮기고, ‘아저씨’(135쪽)와 ‘삼촌’(147쪽 이후)을 혼용한다. 아스트로프가 쩰레긴과 바냐에게 시종일관 말을 높이도록 함으로써 등장인물의 친밀도를 떨어뜨린다. 그들은 계속해서 ‘너’라고 반말하는 사이다. ‘분석과 반응’을 ‘해부학과 반사작용’(157쪽)으로 바꾸고, 소냐의 독백을 엘레나와 행하는 대화체로 바꿈으로써 독자의 혼동을 불러온다. “아녜요, 모르는 게 더 나아요...”(168쪽). 공장에서 찾아온 일꾼과 함께 가려고 아스트로프는 모자를 찾으면서 “어디 있나... 어디로 갔지...” 하고 혼잣말한다. 하지만 이주영은 그것을 “어디서든... 어디로든...”(137쪽)으로 옮기고 있다. 세레브랴코프에게 두 번이나 총질한 바냐가 ‘살인미수’가 아니라, ‘살인음모’(188쪽)를 범했다고 번역하기도 한다. 

 홍기순이나 이주영 모두 ‘백조’보다는 ‘큰고니’가, ‘유형지’보다는 ‘유배지’가 우리말답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지문에 마침표를 찍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체호프의 의도와는 달리 문장을 종결하지 않는다. 그래도 희곡은 계속된다! 제4막 세레브랴코프의 대사 “지나간 일을 말하는 자는 눈을 빼버려라”를 그들은 “옛일을 기억하는 자는 두 눈을 던져버려라”로 번역한다. 번역은 정말 어려운 작업이다.    

 체호프 희곡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언어다. 그는 소박하고 생동감 넘치며 간결하게 쓰고자 하였다. 체호프 희곡의 ‘기저텍스트’라든가 ‘무대 심리주의’는 서정적이고 시적인 언어에서 생겨났다. 체호프 희곡을 번역하려는 사람들이 기억해둘만한 덕목이 아닌가 한다. 

 희곡은 연극과 극장을 아는 사람, 우리말 표현에 능숙한 사람이 번역할 일이다. 줄기찬 퇴고와 근면한 성찰에 기초한 성실한 번역만이 오역을 최대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창작’을 하겠다는 굳은 각오와 ‘술이부작’하는 자세로 번역에 임하면 좋을 듯하다. 체호프의 원작에 가까운 보다 아름답고 충실한 번역을 기대하면서 글을 마친다. 두 분 번역자의 노고를 지면사정으로 상찬하지 못한 필자의 무능과 부덕을 부디 해서(海恕)하시기 바란다.

필자는 자유 베를린대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주요 논문으로 '1905년 러시아혁명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 안드레예프, 블로크, 고리키의 희곡을 중심으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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