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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 종중 재산 분쟁을 통해 본 ‘여성상속’의 역사
[흐름] 종중 재산 분쟁을 통해 본 ‘여성상속’의 역사
  • 교수신문
  • 승인 2001.09.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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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9-25 09:47:19
이배용 / 이화여대·사학과

요즈음 정당한 종원 자격을 주장하며 남성중심적이고 성차별적인 종친회 결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들의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대체로 문중재산을 남성들끼리 마음대로 처분하는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있는데, 현재 청송 심씨, 용인 이씨, 성주 이씨 기혼 여성들이 소송을 진행했거나 진행중이다. 조상이 물려준 재산을 둘러싼 갈등은 비단 금전적 문제뿐 아니라 남녀의 동등한 권리에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옛 사람들은 어떻게 자손에게 재산을 남겨주었을까. 전통시대에 딸들에게도 상속이 이루어졌을까. 조선중기까지만 해도 자녀는 동등하게 부모의 재산을 분배받을 수 있었다. 신라나 고려의 기록에는 경제력을 가진 여성이 많이 나오고, 재산을 분배할 때 아들 딸 차별 없이 골고루 나누어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아들과 딸에게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주도록 명시하고 있다. 적처의 소생일 경우 장자, 차자, 딸의 구별 없이 모두에게 똑같이 분배하고 그 가운데 제사를 지내는 자식에 한해서 상속분의 5분의 1을 더해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한편 첩에게서 난 자식이 있을 때 그가 양인여자첩 소생일 경우에는 적자녀의 7분의 1, 천인여자첩 소생일 경우에는 10분의 1만을 상속하라는 규정이 첨가돼 있다. 그런 경우에도 아들, 딸간에는 균등분배를 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 재산 상속에 있어 적자·서자의 신분 차별은 있었지만, 장자·차자·남녀의 재산 차별은 없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를 보아도 조선 건국부터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조정에서 자녀균분상속 문제에 이의를 제기한 예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자녀균분이라는 재산상속의 원칙이 조정의 보호를 받았음을 알려주는 사료가 있을 뿐이다. 세종은 즉위하던 해 신하들에게 “혹시 부모가 모두 죽은 후 같은 어머니의 형제이면서, 노비와 재산을 다 차지할 욕심으로 혼인한 여자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기를 꺼려하는 자는 엄중히 처벌하도록 하라”고 전교를 내렸다.

혼인 후에도 상속재산 독자관리
그렇다면 자녀균분상속 제도하에서 혼인한 여자의 재산은 어떤 식으로 보존됐을까. 균분상속을 받았어도 그 재산을 유지·보존하지 못한다면 균분상속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조선 초기, 여자에게 상속된 재산은 혼인 후에도 개별적으로 관리가 됐다. 부인의 재산은 남편의 재산과 별도로 관리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자료를 검토해 보면 ‘누구의 처 모씨의 노비’라는 식으로 노비 소유주가 부인이었음을 알려주는 기사가 다수 나타난다. 세종 8년(1426) 3월의 기사에 “좌의정 이원은 자기의 집안 노비가 적지 않은데 김장이라는 노비 한 명을 김도련의 처에게서 사들였다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부인이 매매·양도에 있어 주체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인이 죽었을 경우에는 자녀에게 균분상속하고, 자녀가 없을 때는 그대로 친정으로 귀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부인이 사망해 남편에게 귀속됐다가도 남편이 재혼하면 친정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조선전기 여성의 재산권 행사는 지금보다 더 안정적으로 보장됐다고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여성들이 재산을 보존·유지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하거나, 국가에 상언을 한 경우도 많았다. 어머니의 재산을 마음대로 쓰는 아들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고, 어머니의 재산분배에 불만을 품은 딸이 송사를 제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세종 25년(1443) 기록 중 “양맹규가 어미의 노비와 전답을 제 맘대로 다루므로 그 어미가 노비 문건을 찾아가려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가, 그 어미가 고소장을 올리자 죄를 모면하기 위하여 망령되게 어미의 의사였던 것처럼 하여 또 소장을 올렸으니…”라는 사헌부 보고가 있다.
재산 때문에 자식을 고소한다는 것이 모자간의 정리로 보아 얼른 납득이 가지 않지만 여자들이 자기 재산 보호를 위해 그만큼 집요하게 노력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자식이라 해도 어머니 허락없이 재산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었던 당시에는 적어도 오늘날보다는 한 차원 높은 부부별산제적 경제권이었다는 추측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균분상속제가 조선중기까지 가능했을까. 조선초기까지도 ‘서류부가혼’, 즉 혼인 뒤 여자 집에서 일정 기간 생활하는 혼인 형태가 꽤 일반적이었다. 그것이 바로 딸도 재산을 똑같이 나눠 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배경이 됐을 것이다. 또한 당시는 장남 중심의 대가족제가 아직 확고하게 자리잡은 단계가 아니고 제사 봉송에 있어서도 윤회봉사가 가능했던 시절이다.

장자중심 상속은 조선후기부터
이렇듯 남녀 구별없이 균분되던 상속제도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였다. 조선후기 유교윤리가 전국적으로 보급되고, 부계중심의 가족형태로 바뀜에 따라 제사·상속에 있어서 장자를 중시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표면적으로는 균분을 내세우지만 실제적으로는 장자, 장손을 우대하면서 딸에 대한 차별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차츰 재산의 자녀균분상속이 드물게 되고, 그 대신 제사를 받드는 맏아들 중심으로 재산의 대부분을 상속하는 경향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목할 점은 딸·아들 차별의 질서이기보다는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 맏아들이 조상에 대한 제사를 전담하고 대가족을 부양하는 의무와 책임에 상응하여 재산상속에서 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최근 들어 개정된 가족법에는 아들이든 딸이든 혹은 결혼여부에 상관없이 재산상속을 똑같이 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이는 시대변화의 추세에 부응하여 당연한 귀결이다. 부모를 모시는 일에도 아들딸의 구분이 거의 없어지고 제사에 대한 의무도 변하고 종중의 터전도 해체되는 시점에서 남성이라는 이유로 재산권을 독점 획득한다는 것도 분명 재고의 여지가 있다.
합리성과 평등원칙은 근대 서구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 역사에서 그러한 요소들은 멀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남녀가 동등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선행돼야 할 것은, 바로 멀지 않은 우리 역사의 기록을 더듬어보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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