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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는 일에는 정년이 없다”
“가르치는 일에는 정년이 없다”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1.09.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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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교수들의 근황

평생을 바쳐 연구에 전념하다 정년을 맞는 교수는 한 해 평균 5백 여명. 명예교수로 학교에 남는 이들에게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나 퇴임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가르치고 봉사하고 기증하며, 뜻깊은 노년을 보내는 퇴임교수들을 찾아보았다.

9월 4일 화요일, 사당역 근처의 한 사무실. 낮 열두 시를 훌쩍 넘긴 시간, 예닐곱 평 작은 사무실에서는 ‘수업’이 한창이다. 부지런히 받아 적으며 귀를 쫑긋 세워 듣고 있는 스무 명 남짓의 남녀 ‘학생’들은 언뜻 보아도 40, 50대의 아주머니 아저씨들이다. 점심도 놓쳐가며 이 ‘늙은’ 학생들이 도대체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살짝 들여다보니, 칠판 가득 漢字들이 춤을 추고 있다. 머리 희끗희끗한 학생들을 앉혀놓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열강하는 ‘淸波書室’의 훈장선생님, 이달 정년을 맞은 민병수 전 서울대 교수(65세,국문학)이다. 칠판 가득 썼다 지웠다 하기를 몇 번, 사자성어의 유래와 뜻을 설명하는 사이사이 漢詩를 읊기도 하면서 강의 시간은 틈이 없다. 선생님도 학생도 모두가 열심이다.

한문학의 1세대이자, 평생 漢詩를 연구해온 민병수 교수가 자신의 호(淸波)를 딴 서당을 차린 것은 올 초, 퇴임을 준비하면서부터였다. ‘국문과 퇴임 교수가 무료 서당을 차렸다’는 소식이 한 일간지에 알려지면서 수백 명이 한시를 배우겠다고 몰려들었다고 한다. 꼼꼼한 자기소개를 적어내게 한 뒤 추리고 추린 인원이 성인 4반, 대학생 1반 총 1백 30여명이었으니, 배우려는 학생들의 의지를 생각해서라도 ‘취미 삼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배움이 필요한 곳 어디든

수십 년 간 학교에서 가르친 것만으로도 ‘진이 빠질’ 일이었을 텐데, 퇴임 이후까지 돈도 되지 않는 일에 스스로 발목을 묶는 이유를 물으니 민 교수는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문학과도 있고 한문교육과도 있지만, 대학에서조차 제대로 한문공부를 하기가 힘들어요. 하물며 학교교육을 못 받는 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 어떻게 해서라도 한문공부 하고 싶은 사람을 가르쳐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기회가 된 것이지.”우리 ‘문명’과 관계된 대부분의 것들은 한자를 알지 못하고서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민 교수가 좀더 많은 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고자 하는 이유이다. 문자 자체를 볼 때도, 한자는 음과 뜻이 서로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지극히 탄력적이고, 또한 아름답다.

“옛것이라면 일단 지루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명심보감, 채근담 등에서 꼭 필요하고 좋은 울림을 주는 명언을 뽑아 아름다운 한시와 함께 가르칠 생각입니다.” 배움의 의욕으로 좁은 강의실을 채우는 이들을 보며 민병수 교수가 갖는 꿈은 청파서실의 대를 끊이지 않고 배움의 맥을 잇게 하는 것이다. 정년퇴임이 민교수에게 가져다준 가장 큰 변화는 ‘가르침의 영역’이 훨씬 더 넓고 깊어졌다는 것 뿐, 달라진 것은 없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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