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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시간과 속도의 양면성
[테마]시간과 속도의 양면성
  • 교수신문
  • 승인 2001.09.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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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9-10 00:00:00
“샐러리맨은 쉬고 싶다. 왜? 피곤하니까.”
실감을 너머 식상한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는 말이다. 확실히 우리 시대의 샐러리맨은 피곤하다. 일은 많고 시간은 없다. 샐러리맨만 그런 게 아니다. 유치원 원아들에서부터 퇴임한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한결같다. 누구나 바쁘고 시간이 없다. 언제나 시간은 내편이 아니다. 현대의 시간은 가혹한 억압자다. 그 때문에 나날의 삶은 피로에 찌들고 피폐해진다. 삶의 존재론적 의미나 행복을 저작하는 것을, 시간이란 독재자는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 시간은 금지와 수행의 계율로 인간을 억압하는 동시에, 속도와 변화의 계기들을 내장한 채 또한 인간을 옥죈다. 이 같은 시간의 모듈로 인해 인간의 정체성은 훼절을 경험하고, ‘나 없는 나’의 상태로 흔들리는 삶을 사람들은 끊어질 듯 이어간다. 그럼에도 문득 인간들은 질문한다. 왜 이렇게 사는 거지?

두 책이 제기하는 이항대립의 틀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24시간 사회’와 ‘바다로 간 게으름뱅이’는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24시간 사회’라는 화두는 빠르게 변화하는 동시대의 동향들에 대한 사회학적 성찰이다. 24시간 사회의 형성 배경과 작동 원리, 장단점 분석과 지향 방향 등에 대한 논의가 들어 있다. “지금부터 세상은 빠른 것과 느린 것으로 나누어질 것”이라는 앨빈 토플러의 전언에 따르자면, 빠름의 논리를 대변한다 하겠다. 반면 ‘게으름뱅이’는 느림의 철학을 지향하고 게으름을 찬양한다. 삶의 양식 전반에 걸쳐 빠른 속도로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화가 진행되는 현실을 거슬러서 생태학적 성찰의 깊이로 내려간다. 그 심연에서 느림의 철학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행복의 에피파니를 추구한다. 빠름과 느림, 인공 조작과 자연 상태, 효율적 가치와 근원적 가치, 전자적 네트워크성과 식물성, 비순환적 시간과 순환적 시간, 혹은 시계적 시간과 생태학적 시간 등등 여러 이항대립적인 문제틀들이 24시간 사회와 게으름뱅이 화두 사이에 복잡하게 놓여 있다.

24시간 사회는 한 마디로 “살 것도 많고 할 일도 많은데 시간이 없”는 상황에 대한 대안 명제처럼 보인다. 낮과 밤의 자연적 구획과 노동시간의 획일적 편성이라는 제도적 규율 속에서는 세상과 인간의 효용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사람에 따라 종달새형 인간이 있는가 하면 올빼미형 인간도 있다는 것, 공식적으로 진료를 하는 낮시간에만 환자가 발생할 리 만무하다는 것, 맞벌이 부부들의 편리를 위해서는 심야 시간에도 쇼핑센터가 문을 열면 좋다는 것, 공간의 제약성을 시간의 탄력적 운용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외환 딜러의 업무에서 분명하듯 빠르게 변화하고 명멸하는 세계화 시대에 24시간은 늘 활용해도 모자란다는 것 등등 24시간 사회의 형성 배경은 만만치 않다.
게다가 과학 기술과 컴퓨터 통신의 발달로 국지적 공간을 넘어서 실시간 접속과 상호연결이 가능해짐에 따라 원격 근무의 영역을 넓힐 수도 있다. 근무 시간과 공간을 조절하면 도시의 고질적인 문제인 교통 체증을 줄이는데도 도움이 된다. 개인들은 고정적 시간의 비탄력성을 극복하여 탄력적으로 시간을 자기 설계함으로써 시간으로 인한 강박적 스트레스를 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시간과 경쟁하면서 개인의 경쟁력을 증진함은 물론 개인의 고유한 권리인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질 수 있다는 생각을, 24시간 사회론자들은 펼친다.

하지만 자유의 이면에는 의무와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다. 스스로 시간을 탄력적으로 조절한다고 하지만, 실은 어느 누구도 네트워크화된 제도 관리의 그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언제나 접속 가능한 보이지 않는 초고속 연결 시스템에 의해 개인은 조작될 수 있다. 현대의 기업이나 도시는, 그리고 현대의 무한 경쟁적 자본주의는 어느덧 사유하는 기계의 사회를 욕망하게 되었고 진입하게 되었다. 사유하는 기계 사회에서 사유하는 개인의 자유는 더욱 정교한 방식으로 제한될 수 있다. 저널리스트 쿠엔틴 레츠의 지적처럼 “회사는 문을 닫지 않고, 거리는 절대 비어 있지 않으며, 삶의 불협화음이 하루 종일 지속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오웰적 사회”라면 문제는 심각한 게 아닐까. 시간과 경쟁하면서 시간을 정복하고자 하지만, 오히려 더욱 시간에 정복되는 게 아닐까. 더욱 강박적으로 쫓기게 되지 않을까. 게다가 민족, 도시, 국가, 지역 단위에서 파워 엘리트 그룹과 그렇지 못한 그룹 사이의 간극을 더욱 심화하는데 24시간 사회가 기능하지 않을까. 24시간 사회는 경쟁 이데올로기와 세계화 추세를 최고의 선으로 추구하는 각국의 파워 엘리트 집단의 기득권 확장에만 기여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저런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24시간 사회론자들도 끊임없이 생태론자들을 의식한다. 사람들의 건강과 안전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24시간 사회의 장점과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다. 24시간 사회가 현실적으로 뚜렷한 추세라면 이런 모색은 아주 긴요하다. 그러나 24시간 사회의 모색으로 일찍이 칸트가 주장했던 이상주의 사회에 근접할 수 있을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찰스 테일러 식으로라면 24시간 사회가 오히려 ‘불안한 현대사회’를 가속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련의 생태론자들은 심히 우려한다. 1992년 유엔이 개최했던 리우 정상회의에서 지속 가능한 개발위원회(BCSD)가 강조했듯이, 생태학적 측면을 도외시한 무한 경쟁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변화와 인류의 욕망에 결코 부합할 수 없다. 무한 경쟁을 통한 이익과 효율성의 극대화가 개인 또는 정부의 유일한 동기부여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는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최근에 새 천년 지구촌이 당면하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 환경 분야의 위협 요소를 검토하면서 리스본 그룹은 ‘경쟁 제일주의’를 가장 파괴력이 큰 위협 요소로 꼽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인류의 공멸을 방지하기 위해 지구촌을 공동으로 경영할 수 있는 새로운 의사소통 네트워크, 즉 지구촌 공동 계약이 맺어져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

이른바 문명의 전환을 위한 진지한 성찰과 실천 방식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게으름뱅이’ 화두를 내세운 저자들이 느림, 걷기, 숲, 게으름, 인간관계의 질, 기다림, 삶의 질, 행복, 낮잠, 침묵과 같은 작은 주제들을 따라 명상의 산책을 하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새로운 문명의 출구를 발견하기 위해서 그들은 천천히 걷는다. 욕망보다는 절제를, 경쟁보다는 상생을, 인공보다는 자연을, 채움보다는 비움을, 빠름보다는 느림을 강조하는 그들은 지속가능한 발전과 지속가능한 행복의 조건에 대해 발본적으로 성찰한다. 인공의 도시에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도시로, 이미지가 난무하는 도시에서 안정된 분위기의 도시로, 기억상실의 도시에서 집합적 기억의 도시로 바뀌어야 한다는 제안도 그렇거니와, 새로운 삶을 위해 개인들이 자기만의 시간 갖기, 내면의 평화 만들기, 느림의 생활 양식 만들기, 가난한 삶 선택하기, 성찰성과 영성 키우기, 녹색 감수성 키우기, 보살핌의 윤리 실천하기 등을 추구해야 한다는 제안들이 썩 인상적이다.

결국 문제는 저마다의 행복을 타인들과 더불어 평화롭게 찾아나설 수 있는 사유와 방식이다. 누구나 자기 가치와 자기 행복의 주인일 수 있어야 하고 또 그 행복 찾기의 과정이 평화로워야 한다는 얘기다. 말처럼, 생각처럼 쉬운 일은 결코 아닐 터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야 할 지 모른다. 또 어쩌면 24시간 사회론과 게으름뱅이 화두 사이에서, 그 경계선에서, 최선이 아닌 차선의 탈주를 빠른 듯 느리게 모색하게 될지도 모른다. 차선의 탈주 전략이 빠름과 느림의 시간적 길항과 역설적 상황을 지혜롭게 견디는 힘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 인문 사회과학이 고민하고 맞씨름해야 할 자리는 참으로 많다. 비록 우리에게 허여된 은총의 시간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지라도 말이다.

우찬제 / 서강대·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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