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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 비평_최고 번역본을 찾아서(54) 니체의 『도덕의 계보』
고전번역 비평_최고 번역본을 찾아서(54) 니체의 『도덕의 계보』
  • 이상엽 울산대
  • 승인 2006.11.27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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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 譯 가장 충실 ... 일관성 · 가독성 아쉬워

프리드리히 니체의 ‘도덕의 계보’는 서양의 도덕철학을 가장 근본적으로 비판한 대표적인 저서 가운데 하나다. 도덕이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탄생했다는 그의 주장은 이후 미셸 푸코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상엽 울산대 교수는 국내에 번역된 4가지 종의 ‘도덕의 계보’를 꼼꼼히 살피면서, 어떤 번역본이 원전에 충실했는지, 어떤 번역본이 가독성이 있는지 등을 검토했다.

서양의 윤리학사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책 중 두 권을 고르라면 우리는 아마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칸트의 ‘도덕형이상학 정초’를 선택할 것이다. 도덕철학의 논쟁은 통상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 사이에서, 아니면 칸트와 공리주의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양의 도덕을 가장 근본적으로 비판한 책 중 한 권을 말해보라면 우리는 아마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는 특히 도덕 그 자체의 존재 의미를 따져 묻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이다. 기존의 도덕철학이 ‘도덕적 현상’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보고 ‘도덕의 정당화’를 목표로 삼는 반면에, 니체는 ‘선과 악의 도덕’이 어떤 역사적·심리적 조건 속에서(어떤 권력관계 속에서) 탄생했는지를 드러내고, 이 과정 속에서 ‘도덕이라는 가치’가 진정 가치가 있는지를 묻는다. 마침내 니체는 기존의 선과 악의 도덕은 우리의 삶에 유익하기 보다는 해로운 것임을 논증한 후, 새로운 유형의 ‘가치판단 방식’을 창안할 것을 주문한다. 니체는 도덕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코드 중 가장 강력한 것이라고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도덕비판이 그의 평생의 작업이었다. 바로 ‘도덕의 계보’(1887년)는 그러한 니체의 도덕비판의 완결판인 셈이다.

새로운 시각을 담은 책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이 책도 매우 생소한 개념과 내용(예컨대 주인도덕과 노예도덕, 양심의 가책, 금욕주의적 이상)을 담고 있어서 한국어로 옮기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국내에 나온 ‘도덕의 계보’ 한국어 번역본은 총 4종이다. ‘도덕의 계보’의 일역본(리소오샤판과 이와나미서점판)을 중역한 박준택 역(휘문출판사 刊, 1969 외), 번역본에 대한 정보를 밝히고 있지 않은 정진웅 역(광학사 刊, 1974 외), ‘도덕의 계보’의 영역본(윌터 카우프만 역)을 중역한 김태현 역(청하 刊, 1982), 그리고 ‘도덕의 계보’의 독어본을 번역한 김정현 역(책세상 刊, 2002)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도덕의 계보’의 ‘독일어 원전’인 ‘Zur Genealogie der Moral’을 직접 번역한 책은 김정현의 ‘도덕의 계보’ 뿐이다. 그리 많지 않은 번역본이 나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네 개의 번역본 모두를 비평하고자 한다.

우선 원전에 대한 번역의 정확성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도덕의 계보’가 밝히려는 핵심 내용 중 하나는 ‘좋음과 나쁨’과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서로 다른 뿌리에서 나왔고 서로 대립되는 세계관과 행위방식을 낳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번역할 때 이 대립이 오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현 역 이외의 다른 세 개의 번역들은 이 부분을 대강 얼버무리고 있다. 예컨대, “Dies ‘schlecht’ vornehmen Ursprungs und jenes ‘böse’ aus dem Braukessel des ungesätigsten Hasses”(Zur Genealogie der Moral, Kritische Studienausgabe[이하 KSA로 약칭한다] 5권, DTV/de Gruyter, 3판, 1993, 274쪽)에서 박준택은 “귀족적인 기원의 이 나쁨(schlecht)과 한없는 증오의 술독에서 생겨난 저 나쁨(böse)과를 대비한다면”(박준택 역, 44쪽)으로 옮겼다. 그러나 여기서 ‘나쁨(böse)’은 ‘나쁨(schlecht)’과 대립되는 차원에서 ‘악함’으로 옮겨져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정진웅도 “귀족적인 기원을 가진 이러한 ‘나쁨(schlecht)’의 개념과 증오의 술병 속에서 생겨난 ‘나쁨(böse)’의 개념을 비교해 보자”(정진웅 역, 43쪽)라고 쓰고 있고, 김태현도 “귀족적 기원의 이 나쁜[劣]과 한없는 증오의 도가니 속에서 생겨난 저 나쁜[劣]을 대비해보면”(김태현 역, 47쪽)이라고 옮기면서 똑같은 오역을 하고 있다.

그 반면에 김정현은 “이 고귀한 기원을 지닌 ‘나쁨’과 끝없는 증오의 도가니에서 나온 저 ‘악함böse’을 비교해보자”(김정현 역, 371쪽)라고 옮김으로써 그 대립되는 뜻을 정확히 살리고 있다. 여기서는 김정현의 역만이 원전에 충실한 정확한 번역이다.

아주 치명적인 오역의 사례를 하나 더 들어보자. 원문은 “die Menschheit als Masse dem Gedeihen einer einzelnen stärkeren Species Mensch geopfert - das wäre ein Fortschritt”(KSA 5, 315쪽)이다. 박준택은 “집단으로서의 인류가, 개개의 뛰어난 억센 인종의 번영을 위해서 희생된다는 것 - 이것이야말로 진보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박준택 역, 85쪽), 정진웅은 “몇몇 탁월하고 강인한 종족의 번영을 위해서 집단으로서의 인류가 희생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보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정진웅 역, 87쪽), 그리고 김태현은 “대다수의 집단으로서의 인류가 하나의 보다 강한 인종의 번영을 위해서 희생된다는 것 - 이것이야말로 진보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김태현 역, 86쪽)라고 옮기고 있는데, 이 세 개의 번역은 모두 동일한 오역을 범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한 김정현의 번역은 “집단으로서의 인류가 개개의 더 강한 인간 종족의 번영을 위해 희생된다는 것 - 이것도 진보일 것이다”(김정현 역, 423쪽)인데, 이것이 정확한 번역이다. 여기서 니체의 주장은 다수가 소수를 위해 희생되는 것만이 진보라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소수를 위해 희생되는 것도 여러 진보 중 하나의 진보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위의 세 개의 번역은 마치 니체가 소수를 위한 다수의 희생을 찬양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다. 독일어 원전을 보았다면 이런 오역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간략히 살펴 본대로, 네 개의 번역본 중 김정현의 번역본만이 원문에 충실한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독성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예컨대 원문이 “Moral als Folge, als Symptom, als Maske, als Tartüfferie,als Krankheit, als Missverständniss; aber auch Moral als Ursache, als Heilmittel, als Stimulans, als Hemmung, als Gift”(KSA 5, 253쪽)일 때 이것은 박준택의 번역처럼 “결과로서의, 징조로서의, 가면으로서의, 위선으로서의, 질병으로서의, 오해로서의 도덕. 또 한편 원인으로서의, 치료약으로서의, 자극제로서의, 억제제로서의, 독약으로서의 도덕”(박준택 역, 21쪽)으로 친절하게 번역되는 것이 좋다. 하지만 김정현은 이 부분을 “결과와 증후, 가면과 위선의, 질병과 오해로서의 도덕, 그러나 또한 원인과 치료제 자극제와 억제제, 독으로서의 도덕”(김정현 역, 345쪽)으로 옮겼는데,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김정현의 번역본은 불편하게 읽히는 곳이 적지 않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Eine Rechtsordnung souverain und allgemein gedacht, nicht als Mittel im Kampf von Macht-Complexen, sondern als Mittel gegen allen Kampf überhaupt, etwa gemäss der Communisten-Schablone Dühring’s, dass jeder Wille jeden Willen als gleich zu nehmen habe, wäre ein lebensfeindliches Prinzip, eine Zerstörerin und Auflöserin des Menschen, ein Attentat auf die Zukunft des Menschen, ein Zeichen von Ermündung, ein Schleichweg zum Nichts”(KSA 5, 313쪽)에 대해 김정현은 “하나의 법 질서를 절대 지상의 것으로 일반적인 것으로 생각해본다면, 즉 각각의 의지는 각각의 의지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뒤링의 공산주의자적 전범에 따라, 이를 힘의 복합체의 투쟁에 사용되는 수단이 아니라, 모든 투쟁 일반을 방지하는 수단으로 생각해본다면, 이는 삶에 적대적인 윈리가 될 것이며 인간을 파괴하는 자이자 해체하는 자가 될 것이고, 인간의 미래를 암살하려는 기도, 피로의 징후, 허무에 이르는 사잇길이 될 것이다”(김정현 역, 420쪽)라고 옮기고 있다. 그 뜻이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나 김태현의 역은 이 부분을 잘 풀어 옮겼기 때문에 매끄럽게 읽힌다. “법 질서라는 것이, 권력복합체들 사이의 투쟁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투쟁을 예방하는 수단으로서 지상적이며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제각기의 의지는 제각기 동등한 것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뒤이링의 공산주의적 문구를 아마 모방한 것이 될 것이며, 삶에 적대적인 하나의 원리에 불과할 것이며 인간의 파괴자, 해체자일 것이며, 그리고 인간의 미래를 암살하려는 기도이며, 권태의 한 징조이며 허무에의 한 은밀한 샛길이 될 것이다”(김태현 역, 84쪽). 물론 이 부분에 대한 김태현의 역은 박준택(박준택 역, 83쪽)과 정진웅(정진웅 역, 84쪽 이하)의 역과 거의 유사하다. 결국 가독성에 측면에서 볼 때는 김정현의 번역이 이전의 번역들보다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 없다.

번역의 일관성의 측면에서도 김정현의 역은 간혹 실수를 하고 있다. 예컨대 제2논문 2절에서 ‘Sittlichkeit der Sitte’를 ‘풍습의 도덕’으로 번역했다가 바로 그 다음 문장에서는 ‘풍속의 윤리’로 번역했다가 다시 그 아래 문장에서는 ‘풍습의 윤리’라고 번역했다(김정현 역, 397쪽). 같은 단어일지라도 문맥에 따라 필요할 경우 달리 번역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왜 그래야만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아볼 수 없다.

한국에 나와 있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 4종을 비교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김정현 역이 독일어 원전을 토대로 한, 니체 철학의 핵심을 가장 명확하게 살려낸, 가장 원문에 충실한 정확한 번역본이기는 하지만 다른 세 개의 번역본 보다 편안하게 잘 읽히는 번역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흥미로운 것은 박준택의 번역본이 ‘도덕의 계보’의 최초의 번역본이어서인지 정진웅과 김태현의 번역본에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는 점이다. 우리는 세 개의 번역본의 적지 않은 곳에서 매우 비슷한 문체와 표현뿐만 아니라 동일한 오역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재미있는 현상은 김태현의 번역본은 영어본을 중역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읽히기 때문인지 아직도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상엽 / 울산대 · 서양현대철학

필자는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허무주의와 극복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니체철학의 키워드’ 등의 저서와 ‘문화철학이란 무엇인가’ 등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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