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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고
[에세이]'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고
  • 손병우 충남대
  • 승인 2006.11.24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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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가 아닌 '소통과 스밈' / 손병우 충남대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세 개 또는 네 개의 층위에서 의미를 발생시킨다.

먼저 관객에게서 나타나는 첫 반응은 ‘울음’이다. 영화 내내 객석 이곳저곳에서는 눈물을 찍어내거나 심지어는 흐느끼는 소리도 들린다. 영화가 끝나도 관객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하도 울어 기운도 빠지고, 환한 불빛 아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이기도 쑥스러워서 그럴 게다.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은 곧이어 사형제 폐지론자가 된다.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그가 충분히 반성했다면 용서해줄 수 있지 않은가. 언제 사형 집행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하루하루 속에서 정신적 고통을 충분히 겪었다면 이미 처벌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느냐는 취지이다.

사회 고발 프로그램인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바로 이런 사형수들의 고통과 사형제의 비인간성에 대해 상세하게 취재하여 방송한 적이 있지만 그때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 영화는 같은 주제를 관객들 눈앞에 구체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주의 환기 효과가 크게 나타난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한 사형제 폐지론의 기반은 허약하다. 영화속 인물인 윤수는 살인마라기보다 우발적 살인자에 가깝고, 선배의 범행까지 뒤집어 쓴 억울한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영화배우 강동원의 외모를 하고 있다. 이런 인물이 지금 눈앞에서 반성하고, 눈물짓고, 겁먹은 모습을 보이는데 누구라서 가혹하게 그를 처형할 마음이 들겠는가. 그래서 사형은 잔인한 제도이고, 공권력에 의한 살인이라는 논점이 쉽게 떠오른다.

바로 그 점이 함정이고 한계이다. 오히려 숀 펜이 연기한 ‘데드 맨 워킹’처럼 개인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사형시켜선 안 되는 성찰이 있어야 비로소 사형제에 대한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더 핵심적인 층위는 사형제 폐지가 아니라 소통과 ‘스밈’이다. 불평등 구조가 낳은 윤수는 사회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가족 안에서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었지만 엄마에 의해 소통의 자유마저 차단된 유정은 그 뒤 누구와도 속을 터놓지 않는다. (모니카 고모와 검사 오빠 등과의 관계로 보아서 유정이 보여주는 자기 파괴적 공격성이 현실적인가에 대해선 이의가 있지만 하여튼 그런 설정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윤수와 유정은 여러 차례의 대화를 통해 서로 스며든다. 상대의 상처를 이해하고 그것으로 서로 치유된다.

이 부분에서 이 영화는 ‘파리 텍사스’의 한 장면을 재활용한다. 핍쇼걸이 되어있는 아내 나스타샤 킨스키와 강박증 환자인 남편 해리 딘 스탠튼은 핍쇼장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눈다. 이때 유리벽에 서로의 얼굴이 얼비쳐 겹쳐지는데 이는 소통 불가 상황을 그로테스크하게 상징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는 이 장면을 소통과 스밈의 순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전치시킨다. 유정과 윤수는 면회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비로소 서로의 환부를 상대에게 드러내고, 얼비친 상대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고립된 존재였던 두 사람이 서로 온기를 나누며 스며드는 모습을 보여준 명장면이다. 아나톨 프랑스의 소설 ‘무희 타이스’가 스밈의 역설을 이야기했다면, ‘우행시’는 소통과 스밈이 어떻게 선순환의 시작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제 마지막 장면. 유정은 윤수의 사형 집행을 막으려는 강렬한 바램에 엄마에 대한 그간의 원망과 저주를 용서로 승화시킨다. 이 장면에서 어떤 관객은 배우 이나영을 용서하기로 했다고 농담을 할 만큼 그녀의 연기는 빛을 발한다. 그리고 관객들의 울음이 절정에 달한다.

대체 이 영화를 보고 관객들은 어째서 그렇게 우는 것일까. 울음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지만 또한 가장 깊은 곳에서 올라온 징후로 보이기도 한다.

2006년 가을, 한국 영화관객들이 보여준 울음, 그것은 신뢰가 사라진 곳에서 그 초라한 개인 사이의 소통이 어쩌면 구원의 시작일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개인은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우는 영화를 한 편쯤 더 보면 정답이 보일 것 같다.     

손병우 / 충남대·문화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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