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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 표현 인문학 논쟁(김영민·이진우 교수에 답한다)
쟁점 : 표현 인문학 논쟁(김영민·이진우 교수에 답한다)
  • 정대현 이화여대
  • 승인 2001.08.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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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9 14:22:12

정대현 / 이화여대·철학과

‘표현인문학’(생각의 나무 刊)의 공동저자 중 한 사람인 정대현 이화여대 교수가 우리 신문 지난호(182호, 6월19일자)에 실린 김영민 교수의 서평과 이진우교수의 반론에 대한 반박글을 보내왔다. 우리 신문에서는 세 교수의 논박을 ‘표현인문학논쟁’이라 명명하고, 이후 본격적인 논쟁의 자리를 마련할 계획이다. 이 논쟁이 인문학논의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룰 수 없는 꿈을 서투른 문장력으로 그려 표현인문학을 논하다니!” 이것은 이진우 교수와 김영민 교수가 ‘표현인문학’을 향해 날린 비판의 화살(교수신문 182호, 2000년 6월19일자)이다. 그들은 이 책에 대해 정중하지만 신랄하게 여러 가지 점들을 비판하고 많은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두 학자가 각기 가장 중요하게 제기한다고 생각되는 한가지씩의 문제들에 주목하여 이 주제의 토론에 참여하고자 한다.
김영민 교수는 이 책이 표현적일 것을 지향하면서도 비표현적으로 씌어져 있다고 개탄한다. 공동저자들(박이문, 유종호, 김치수, 정덕애, 이규성, 최성만)의 명쾌한 생각과 글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비표현적으로 됐을 수 있다. 이진우 교수는 내용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인문학의 목표로서의 成己成物(나를 이루고 만물을 이루는 것은 맞물려 있다)은 “꿀 수 없는 꿈”이 아닌가하는 염려이다. 비판정신 같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목표 함양에도 어려움이 있다면 그 우려는 더욱 근거 있을 것이다. 만일 ‘조야한 문체’나 ‘황당한 꿈’이라는 두 학자의 비판이 온전하게 정당하다면 이 책의 개연성은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반론을 필요로 한다.

표현인문학의 세가지 명제

먼저 ‘표현인문학’(생각의 나무刊)의 내용은 세 명제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은 성기성물적 존재이다. 이것은 “나를 아는 것과 만물을 아는 것은 맞물려있다(知己知物)”는 지성주의 전통의 인간론과 대조된다. 둘째, 현대인의 인간 조건은 표현이라는 적극적 자유의 범주이다. 전통적 인문학이 고전 읽기를 통해 이해 또는 관념상의 자유확장을 추구한 방식과 구별된다. 셋째, 모든 사람은 자기 표현을 통하여 만물 성취와 맞물려 있는 자기 성취를 할 수 있다. 특정한 소수만 표현 생산자이고 그 이외에는 표현의 소비자였던 시대와 대비된다. 어떠한 인문학도 결국 특정한 인간론의 구현 노력이라면, 표현인문학은 상이한 인간론에 근거한 다른 인문학과 대조되는 것이다.

건조한 합리성, 상위적 글쓰기 결과

김영민 교수의 문체 비판은 형식적으로 보이는 피상적 논의가 아니라 언어의 본질에 닿아 있는 심층적 논의로 구성되어있다. 김교수는 언어 어휘들을 기의와 기표로 구분하는 기호학적 전통을 따른다. 기의적 어휘란 “안(安)”처럼 “평안이란 한 집안에 정확하게 하나의 여자가 존재할 때 남자나 여자가 갖는 심리적 상태”와 같은 박제된 의미의 개념이고, 기표적 어휘는 “안녕하십니까?”에서처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인사 할 때와 같은 수행성의 어휘, 철자나 소리의 운동 자체, 고유한 의미와 독립해 자율적으로 다른 무엇을 말하는 어휘이다. 김교수는 우리가 제안한 ‘표현인문학’이 개념적 설명, 인식중심주의 등 기의적 표현들로 나열된 합리적 체계일 뿐, “개성과 문체, 울림과 결”을 돋보이게 하는 기표가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김영민 교수의 기의성 비판은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 반박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인문학으로서의 글쓰기”와 “인문학에 대한 글”이라는 김교수 자신이 제시하는 구분에서 시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그 자체로 충만한 “자동사적 언어”이고 따라서 사르트르가 말하는 “시적 언어”, 바르트가 말하는 “문학 언어”에 해당한다. 정지용이나 프루스트처럼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후자는 인문학에 관한 산문 언어 일종이다. 편의를 위해, 전자를 대상적 글쓰기라 하고 후자를 상위적 글쓰기라 부르겠다. 김교수는 지난 10년 간 대상적 글쓰기만을 했다고 밝힘으로써 상위적 글쓰기를 피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교수는 그의 논의를 지지하기 위해서 상위적 글쓰기가 불필요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러한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 “건조한 합리성의 글이다”와 같은 것 이외의 이유라야 한다. 건조한 합리성은 상위적 글쓰기의 결과적 성질이기 때문이다.
기의성 비판에 대한 둘째 반박은 기표와 기의의 구분의 성격에 기초한다. 김교수의 기의성 비판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기표와 기의의 구분이 어휘나 사용에 따라 이루어지는 배타적 구분이라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은 과도한 제약이다. “문이 닫혀 있습니다”라는 표현은 사실적 기의를 가질 수 있지만 동시에 답답하다라는 심리적 기의를 나타낼 수도 있다. 이 표현은 “문을 열어 주시오”라는 기표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다른 화자에 의해 사용될 때 “뒷문으로 들어오시오”라는 기표로도 사용될 수 있다. 그렇다면 ‘표현인문학’은 인문학에 대한 상위적 글쓰기로서 기의적이지만 또한 하나의 제안을 수행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기표적인 것이다.

成己成物, ‘사건’ 아닌 변화의 ‘과정’
이진우 교수는 성기성물이 표현인문학의 목표로서 지나친 꿈이 아닌가하고 반문하면서 사람다움을 향한 비판적 사유가 그 자리에 구체적으로 들어와야 하지 않는가 하고 요청한다. ‘표현인문학’은 사람다움의 표현의 모색 노력을 요구할 뿐, “인간성의 완성”을 인문학의 필요조건으로나 충분조건으로 요청하지 않는다. 이 필요조건은 불가능하고 그 충분조건은 공허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교수는 성기성물을 인간성의 완성조건으로 파악하고 인문학의 목표로서 이 조건의 과잉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순차적으로 해석할 때 보통 사람에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인 것처럼 이를 구조적으로 해석할 때에도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이교수는 성기성물을 이와 똑같은 구조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진우 교수의 과잉 조건 비판은 두 가지 관찰에 의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성기성물은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다. 사건이란 특정한 성질이 구체적 개별자에게서 특정한 시간에 구현되는 것이다. 사건은 특수한 시간 공간의 질서 안에서 단일하게 발생한다. 그러나 과정은 어떤 사태가 시간과 공간의 지속성 안에서 변화의 단계를 겪는다. 그러므로 과정에서는 원자적 사건들의 나열이 아니고 사건들이 있어도 이들이 유기적 구조 안에서 연대되어있는 것이다. 한국의 남북 통일이 사건이 아니라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성기성물은 나의 인생이 끝나는 날 도달하리라고 꿈꾸는 그러한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 된다.

비판, 인문학 고유 몫 아니다

성기성물이 도달할 수 없는 꿈으로 보였다면, 비판정신은 인문학의 구체적인 현실적 대안으로 매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비판정신”은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첫째, 비판정신을 인문학의 배타적 성질로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연성이 없다. 왜냐하면 비판논리는 인간사유의 편재적 구조이기 때문이다. 비판논리란 부정의 부정인 까닭이다. 거짓의 제거는 실험과학의 논리이고, 고통의 제거는 사회공학의 구조이며, 맞지 않는 해석의 제거는 인문학의 사유방식이다. 둘째, 비판정신은 “억압, 부정, 왜곡에 대해 활발하게 고발해야 한다”라는 원리에 의하여 일관된 처신을 하는 태도이다. 비판정신에 대한 첫째 해석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둘째는 당위 명제로 수용할 수 있지만 인문학의 규정적 성질로는 공허하다. 왜냐하면 이 명제를 거부할 사람은 어떤 당파에서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명제는 의지박약 여부의 기준이거나 의지박약일 수 있는 지성인들에게 던져지는 환기의 명제이다. 의지박약의 성격 논의와 인문학의 논리 논의는 구분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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