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동아시아, 인문한국의 비전'
김경호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
국가·사회 난제 해결에 앞장서고 있는 인문사회 연구의 대표적인 성과 사례를 소개한다. 기존 인문사회 학문 분야의 벽을 넘어선 새로운 문제의식과 융합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혁신 연구의 결과다. 인문사회통합성과확산센터(센터장 노영희 건국대 교수)는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이 지원하는 인문한국플러스사업(HK/HK+)과 융합연구지원사업의 연구성과 우수성, 파급효과 및 활용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6명의 심사위원이 우수성과 20곳을 선정했다.
‘열린 동아시아’는 근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져 온
서구 중심주의, 근대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융복합 인문학으로 현대 사회에 대안을 제시한다.
조선 정조 때 간행된 ‘오륜행실도’에는 자기 귀를 자르면서 웃고 있는 여자, 남편의 유해를 짊어지고 가다 다른 남자에게 팔이 잡혔다며 팔을 도끼로 자르는 여자의 모습이 담겨 있다.
중국 명·청나라 시기에는 고인이 된 어머니나 할머니가 남성 관료의 옷을 입고 있는 초상화를 그려 가문을 높이는 장치로 사용했다. 모두 미인도를 소비하는 남성 문인들이 ‘창조’해 낸 여성의 모습이다. 고연희 성균관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등 11명의 연구진은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책 『동아시아 미술, 젠더로 읽다』를 펴냈다.
이번 연구 성과는 한국연구재단 인문한국플러스(HK+)지원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의 아젠다 「열린 동아시아, 인문한국의 비전」 중 ‘열린 지식과 표상’ 연구의 일환이다. 동아시아학술원의 아젠다 연구는 지난해 인문사회통합성과확산센터가 뽑은 우수성과로 선정됐다.
서구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열린 동아시아’로
유교의 관점으로 젠더를 바라보는 게 낯설지만, 이것이 바로 동아시아학에서 추구하는 ‘열린 동아시아’ 관점이다. ‘열린 동아시아’는 국가 간 경계를 허물고 그 사이를 넘나드는 열린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근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져 온 서구 중심주의, 근대 시각에서 벗어나 융복합 인문학으로 현대 사회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찾는다.
배항섭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비교와 연동으로 본 19세기 동아시아』에서 “근대 세계는 서구가 전근대와 비서구 세계를 정복하면서 형성됐다. 진화론적 역사관과 보편적 역사는 비서구인의 인식까지 지배해 버렸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문제를 바라볼 때 ‘근대’ 너머, ‘서구’ 너머를 상상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동아시아에 대한 정의도 나라별로 달라
동아시아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이지만 낯선 개념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동아시아에 대한 정의가 나라별로 다르다. 한국은 한·중·일에 동남아시아 지역을 포함한 의미로 사용하지만, 일본은 여기서 나아가 호주·인도 등을 포함한 더 큰 범위의 동아시아를 주장한다. 중국은 그 자신은 동아시아에 포함하지 않고 주변국을 동아시아라고 인식한다. 사실 각 국가 내부의 정의도 학자마다 엇갈리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한·중·일은 한자문화권·유교문화권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근대화를 시작한 역사가 있다. 한국은 식민지를 겪었고, 중국은 반식민지, 일본은 식민지를 겪지 않고 근대를 맞았다.
이런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으로 지리적 범주와 국가 간 최소한의 합의된 의견도 모으지 못한 상황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동아시아를 연구하는 일을 게을리할 수 없다는 게 동아시아학술원의 입장이다.
김경호 동아시아학술원 원장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날로 영향력을 강화하는 미국과 중국의 정치적·군사적 대립이 격화하고 있다”며 “이런 국제질서 속에서 동아시아 국가들은 상호 협력과 연대가 가능한 지역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 반드시 고민해 봐야 한다”라고 동아시아 연구의 의의를 밝혔다.
불평등 심각할수록 환경문제 해결도 난관
동아시아학술원은 이번 연구에서 △사회적 관계성 △난(亂)과 민주주의 △열린 지식과 표상이라는 3대 핵심 연구영역을 설정했다.
연구진은 ‘사회적 관계성’ 연구에서 기후 위기로 대변되는 환경 문제를 조망한다. 배항섭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한국 근대사 이해의 글로벌한 전환과 식민주의 비판」에서 사회적 불평등 문제가 심각한 나라일수록 많은 이산화탄소 배출량 등 환경 문제와 불평등이 결부돼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기후 변화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국가 내부뿐만 아니라 국가를 넘어선 전 지구적인 연대와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며, 한 나라의 작동 체제로 기능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덧붙인다.
에릭 홉스봄의 말을 인용해 “국가의 영토 안에서만 작동할 수 있는 민주주의 시스템이 세계화와 초국적 기업에 의해 야기되는 지구적 환경 문제 등 새로운 도전을 해결하는 데 희망적이지 않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라고 밝힌다.
지배층 타락을 바로잡고자 했던 민중의 ‘난’
‘난(亂)과 민주주의’는 혁명·운동·시위로 번역된 ‘난’의 의미를 현시대에 맞게 재의미화한다.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 ‘난’은 지배계층이 법과 도덕을 지키지 않는 무질서한 상태를 의미했고, 그것에 대항해 피지배계층이 상황을 바로잡고자 일어난 것도 ‘난’이었다. 피지배계층은 ‘난’을 통해서 비단 사람만이 아닌 자연까지 바로잡고자 했다. 자연재해와 재난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민란은 식민·분단 시기를 거치면서 반란·폭동으로 의미가 축소됐다.
이처럼 근대 서구의 이론으로 포착되지 않는 동아시아 ‘난’의 개념을 역사적·사상사적 맥락 속에서 재구성하는 게 이 연구의 핵심이다.
연구는 19세기 들어 활발해진 한·중·일 세 나라의 민중운동에 주목했는데 세 나라 가운데 태평천국 운동이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 압도적으로 폭력적이었다고 밝혔다. 동학농민혁명은 왕의 덕치를 요구하며 탐관오리에 대한 징계 요구라는 기반 위에 움직였지만, 태평천국 운동은 왕을 교체하고 새로운 왕정 수립을 목표로 해 더 적대적이고 잔학했다는 점을 비교사의 관점으로 분석했다.
“한국 인문학 발전 위한 ‘융복합 인문학’ 구현”
궁극적으로 세계 유수의 한국학·동아시아학 기관을 잇는 허브 역할을 목표로 하는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일본 도쿄대와 교토대, 중국사회과학원 고대사연구소, 호남사범대와 정례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해 동아시아학의 국제적 확산을 도모하고 있다.
연구책임자인 김경호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원장은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루트리지(Routledge)의 출판물인 『Routledge of Handbook of Early Chinese History』에 비서구·비중국학계의 학자로서는 유일하게 집필자로 위촉돼 ‘최근 출토문헌 시각에서 본 진한 법률체계의 연구’를 서술했다.
이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카포스카리대, 헝가리 국가기록원 등과도 새롭게 업무협약을 체결해 협동 연구 네트워크를 확대했다. 국내외 동아시아학 신진 연구자를 위해 매년 개최하는 국제신진학술대회도 올해 5회를 맞아 ‘동아시아 물질문화의 표상’이라는 주제로 진행했다.
이밖에 HK+사업을 진행하면서 동아시아학술원 소속 고문헌 특화 도서관인 ‘존경각’을 지식정보센터로 전환, 국내·외의 연구 기초자료를 수집하고 체계화하면서 연구 학술 지원의 기반을 마련하는 베이스캠프로 활용하고 있다. 동아시아학술원 HK+연구소는 연구 인력 23명(HK 교수 15명, HK 연구교수 3명, 일반연구원 5명)으로 구성돼 있다.
김경호 원장은 “동아시아학술원의 목표는 한국 인문학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융복합 인문학’을 구현하는 데 있다. 한국과 인접 지역을 문명사적·역사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동아시아학을 통해 세계 학계와 활발한 교류와 협력을 계속 이어 나가겠다”라고 밝혔다.
임효진 기자 editor@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