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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러볼이 있는 집
미러볼이 있는 집
  • 최승우
  • 승인 2024.03.18 14: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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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연 지음|(주)도서출판 강|288쪽

이정연의 소설에 등장하는 공간은 늘 특이하다. 장편소설 『천장이 높은 식당』(한겨레, 2020)에서의 식당이 ‘경단녀’ 영양사가 마주한 높은 유리천장으로 그려졌다면, 『미러볼이 있는 집』에 등장하는 아홉 가지의 공간은 대다수가 노동자인 인물들이 처한 여러 가지 환경들로 변주된다. 생산이 이루어지는 직업의 현장은 하나의 계약된 터전으로서 우리가 겪는 삶의 조건을 장악한다. 일터에는 덩그러니 장소와 일거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먹는 것과 입는 것, 함께 말하는 사람, 머무는 시간, 몸에 자주 닿는 사물이 노동자가 경험하는 특이한 시공간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힘과 감정이 오고 가는 그 일터에서 우리의 존엄을 오롯이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타인에 의해 통제된 자리, 다시 말해 우리의 존재 이전에 선행되어 있던 자리인 일자리에 구겨지듯 들어설 때 정신의 한 모서리는 접히기 마련이다. 그렇게 때로 우리는 임금을 받기 위해 폭력과 계약한다. 이정연의 소설 속 공간은 바로 그 폭력을 가시화하기 위해 정교하게 연출된다.

작가의 등단작인 「2405 택시」에서 제시되는 일터를 살펴보자. 현서를 키우는 싱글맘인 ‘나’에게 허락된 일자리에는 번듯한 빌딩도, 사무용 책걸상도 없다. 한 평 미만의 밀폐된 운전석에서 택시 기사인 ‘나’는 ‘유연한’ 노동환경을 이용해 돌봄의 공백을 채우려 안간힘을 쓴다. 어린이집 등원 시간을 맞추기 위해 출근과 함께 아이를 카시트에 동여매고, 젖은 기저귀와 비스킷 냄새가 고요하게 휘도는 새벽의 택시 안에서 ‘나’는 표표히 도시를 배회한다.

짙게 선팅된 차창 밖에서는 전혀 감각할 수 없는 생활의 긴박함이 차 안에서 복작거릴 때, 그 노동의 묵직함은 오로지 택시를 운전하는 ‘나’의 몫이다. 가사노동과 돌봄노동, 임금노동을 단번에 해결하려는 밀폐된 2405번 택시 안은, 그 누구도 혼자서는 해내기 어려운 과업이 한 인간에게 부여된 싱글맘의 복잡한 가정사를 상징한다.

「앞자리에 앉은 사람」은 내달리는 열차에 앉아 육아하는 여성이 전담하는 돌봄노동의 연속을 남성의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화자인 준승은 최 교수의 장례식장에 가는 열차 안에서 우연히 전 여자 친구 유이를 마주치는데, 공교롭게도 이들은 자신들의 자녀와 함께다. 게임과 과자로 딸 윤서를 달래며 스멀스멀 유이에게 접근하는 준승은 그녀에게서 첫사랑의 추억과 흔적을 찾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그럴수록 그는 묘하게 추해진다.

유이에 따르면 준승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불현듯 스무 살의 유이를 떠올리며 자신의 무지를 감각할 때 준승은 과거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복수를 당하며 자기 자신의 오만함을 대면하게 된다. 준승의 앞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유이가 아니라 유이의 아들이 될 때 “유이에게 아이의 이름을 한 번도 묻지 않은” 준승은 자신의 무지를 다시금 자각한다.

반대로 유이의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준승이 될 때 그는 유이와 그녀의 과거가 보내오는 혹독한 심문을 견뎌내야만 할 것이다. 상행과 하행의 목적이 완전히 뒤바뀌는 것처럼, 돌아오는 열차에서 준승은 유이를 관음할 기회조차 허락받지 못한다.

공간을 휘도는 분위기를 감각해 우리의 상황과 연결해 보이는 작가의 시선은 「문이 없는 방」으로 연결된다. 소설에서 ‘나’와 남편은 입양한 아들인 은오의 문제 행동으로 갈등을 겪는다. 학교폭력의 진상을 밝히는 과정이 소설의 주요 골자이지만, 살아 있는 생물에 대한 공감 능력을 잃어버려 문제를 일으키는 은오의 행동은 학교뿐만 아니라 가정 내부의 갈등까지 증폭시킨다.

“우리 애들”과 “내 새끼들”이라는 말로 생물학적 혈연인 두 딸과 은오를 노골적으로 갈라 세우고, 통보하듯 파양을 요구하며 집을 떠나버린 남편 앞에서 은오의 양육과 책임은 온전히 ‘나’에게로 전가된다.

상상할 수 없이 두꺼운 벽 안에서 가장 느린 속도로 위태로움을 겪는 여성들의 자리는 어쩌면 타인에게는 묵묵히 제시간을 견디는 평온함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평온함의 표정 속에서 가장 아프게 곪아가는 사람은 여성 자신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일 수도 있다. 작가는 여성에게 드리운 그늘이 어디까지 길게 늘어질 것인가를 따라가며, 그곳에 힘없이 숨은 아이들의 모습도 함께 조명한다.

방앗간을 하는 부모의 부주의 아래 기계에 손가락이 절단된 「햇빛 조리개」의 재민과 남동생, 빛이 들어오지 않는 작은 집에서 이따금 들르는 방문 교사에게 돌봄을 일임받는 「한낮의 산책」의 윤재는 지금 우리의 주변에서 신음하는 이웃의 얼굴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들의 얼굴을 뭉뚱그리지 않으며, 하나하나 섬세한 결을 발라 시선의 가중치를 공평하게 선사한다.

「붕어싸만코」는 가장 오래도록 아픔의 풍경을 관찰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화자인 현제는 ‘자신을 봄’이라는 주제로 에세이를 쓰는 회사의 행사에 참여하며 느리고 깊은 호흡으로 자신의 유년 시절을 돌아본다. “글 안에서 자신의 내면을 오롯이 성찰해보라는 가이드라인”에는 사원들의 개인성을 밑바닥까지 검열하려는 회사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현제는 불현듯 시원하고 달큰한 붕어싸만코에 얽힌 기억을 소환해낸다.

영원한 혈연도 유대도 어쩌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이정연의 시선은 희망을 섣불리 과장하거나 부풀리지 않는다. 어쩌면 희망의 온기는 그 자체로 남아 있을 때 가장 값지고, 그 온기를 식지 않게 두는 것 또한 누군가에겐 평생의 과업이 될 수 있다. 「이별 여행」은 바로 이런 점에서 연대의 이름이 얼마나 쉽게 말해질 수 없는지를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소설에서 정완은 억울한 정치 모함으로 곤경에 빠지고, 회사에서 처리해준 휴가로 비혼 여행을 떠나게 된다. ‘비혼’과 ‘여성’이라는 표지만으로도 한 개인의 정체성이 손쉽게 판단되고, 그와 같은 선입견이 정치적 입장으로 판가름되는 요즘이지만, 작가는 한 개인에게 향하는 잣대가 그토록 단순할 수는 없음을 이야기한다.

직장 내 성희롱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너만 아는 농담」 또한 조직 문화 속에서 표류하는 한 여성을 조명한다. 채경과 결혼해 아이를 낳아 기르는 ‘나’는 그녀를 둘러싼 성적인 스캔들에 괴로워하지만, 이내 그 이야기들이 남자들 사이에서 근거 없이 떠돌던 농담과 가십거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명백한 사회적 차별과 정치적인 위해임에도 불구하고, 직장의 남성들은 채경을 두고 자신들이 벌인 폭력을 “고작”이라는 말로 일갈한다.

남성화된 직장은 일터에서 여성이 겪는 성적 문제들을 사소하고 사적인 차원에 머무르게 하고, 여성이 직장에서 자율성과 존엄을 보장받기 어렵게 한다.

여성과 아픈 노인, 돌봄에서 소외된 아이들을 소설에 품으려는 작가의 시선은 표제작인 「미러볼이 있는 집」에 집중적으로 모여든다. 월세를 낼 돈이 없어 노인과의 홈 셰어링 프로그램에 지원한 여성 청년 시연, 낡은 집 한 채를 가졌으나 젊은이들에게 눈 뜨고 코를 베이는 아픈 할머니 순자 씨, 버팀목 없이 술과 마약 속에서 방황하는 승오와 그 방랑의 미래를 비추는 듯한 최 노인은 모두 이 소설의 개성 강한 인물들이다. 소설에서 시연은 순자 씨를 돌보는 척하며 집을 점점 점령해나가고, 승오와 합세하여 집의 내부에 불법 영업소인 멀티방을 차린다.

이 과정에서 “노인과 대학생의 행복한 동거”라는 정책은 세대 간의 갈등을 그야말로 주먹구구식으로 해결하려는 피상적인 접근법임이 드러나고, 노인 소외와 청년의 가난은 그 어떤 부분도 나아지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미러볼이 있는 집」의 제목은 단지 이층에 미러볼이 설치된 채 점령당하고 있는 순자 씨의 부동산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욕망이 충돌하며 기이한 형태로 개조된 이 집은 여러 세대와 계층이 경험하는 소외로 구부러진 사회의 구조 자체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방비를 줄이기 위해 해가 난 자리로 승오와 순자 씨를 옮기는 시연의 모습에서 이기적인 욕망뿐만 아니라 타인을 향한 연민이 함께 발견되는 장면은 바로 집의 모순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미러볼은 반짝이지만 태양처럼 자력으로 발광하지 못하는 차가운 물질이고, 다가오는 빛을 반사해 파편적인 빛을 뿌린다. 여러 조각의 거울을 이어 붙인 미러볼은 빛을 선택적으로 나눠주고 명확한 명암을 만들어낸다. 순자 씨의 이층집 안에서 온기를 뺏고 빼앗기는 힘의 싸움이 계속되는 것처럼, 순자 씨의 집 밖에서 들어오는 햇살 또한 미러볼처럼 편애적이다.

“원뿔 모양의 기다란 조명” 같은 그 햇살은 바람에도 쉽게 어그러지고, 잔뜩 웅크린 몸만 담을 수 있을 만큼 조각나 있다. “볕은 잘 들지만, 온기는 잘 품지 못하는 집”은 바로 이 쪼개진 빛의 편파성을 그대로 현시하기에, 다툼은 예정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미러볼이 어두운 곳을 밝게 비추는 동시에 어두움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불균형한 사회의 공식은 이토록 공공연하게 양지와 그늘을 생산하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소설의 공간과 사회의 구조를 유비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그늘진 공간을 조각조각 이어 붙인 이정연의 시선은 거울처럼 명징하게 불의를 비추면서도 빛이 떠나간 자리의 온기를 잊지 않는다. 싸늘한 햇빛처럼 고독을 머금은 문장들이 연신 독자에게 손을 내미는 것처럼 읽히는 이유일 것이다.

추천의 말

이정연의 소설 속 인물들은 불안정한 세계에 살고 있다. 그들은 아직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거나 누군가에게 자리를 빼앗겼거나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자리를 지켜내야 한다. 집이 필요한 청년은 내일 밤 잘 곳을 걱정하고, 학습지 교사는 줄어드는 학생 수에 일할 곳을 잃게 될까 두려워한다.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도 문득 마주한 균열에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진짜 제자리인지 혼란스러워한다. 자리의 상실은 불안을 낳고, 불안을 떨쳐내려 발버둥 치다가 원치 않았던 선택지를 손에 쥐게 된다.

때로는 저 대신 누군가를 밀어내야만 하는 상황마저 생긴다. 그러나 그들은 진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한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버텨내려 한다. 그런 그들의 의지가 우리로 하여금 다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을까. 절대로 위협받지 않을 견고한 자리란 존재할까. 그 답을 찾기 위해 독자는 오랫동안 이정연의 소설 안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_조진주(소설가)

작가 소개 이정연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동국대에서 정보통신공학을, 연세대에서 언론홍보학을 공부했다. 2017년 단편소설 「2405 택시」로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0년 우수출판콘텐츠에 선정되어 장편소설 『천장이 높은 식당』을 출간했다. 2022년 장편소설 『속도의 안내자』로 제10회 수림문학상을 수상했다. 12년 동안 회사에서 일했고, 그 뒤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차례

2405 택시
앞자리에 앉은 사람
햇빛 조리개
문이 없는 방
미러볼이 있는 집
한낮의 산책
너만 아는 농담
붕어싸만코
이별 여행

해설  교만한 요새의 여성과 아이들 | 전청림
작가의 말

최승우 기자 kantman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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