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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기술을 인문학에 접목하면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을까
디지털 기술을 인문학에 접목하면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을까
  • 우동현
  • 승인 2024.03.13 0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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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역사학의 물결① 디지털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우동현 카이스트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조교수

인문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디지털 인문학’(digital humanities, DH)이란 말이 익숙한 시대이다. <교수신문>의 독자들 가운데 DH에 거는 기대가 남다른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물론 DH가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DH는 인공지능 시대의 진정으로 새로운 융합 학문인가, 아니면 기존 인문학의 패러디인가? 이번 연재는 바로 이 알쏭달쏭한 DH의 현주소와 과거를 디지털 역사학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연재 순서]
① 디지털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② 디지털 역사학 역사
③ 디지털 역사학의 성과 1 미국
④ 디지털 역사학의 성과 2 유럽
⑤ 디지털 역사학의 성과 3 동아시아
⑥ 디지털 역사학의 성과 4 국내
⑦ 디지털 인문학의 최대 난제와 돌파구
⑧ 디지털 역사학의 가능성과 전망

‘디지털 인문학’ 연구자들에게는 거대한 의심이 제기된다. 
가장 큰 의심은 ‘디지털 인문학’ 활동이 
기존 인문학 활동과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으로 표출된다. 
이는 냉소적이나 정당한 문제 제기이다.

‘디지털 인문학’(digital humanities, DH)에 대한 기대는 이 용어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부터 계속 커졌다. 학자들은 DH의 효시가 2008~2009년 캘리포니아대학 로스엔젤레스(UCLA)의 한 세미나에서 발표한 선언문이라는 데 동의한다. 미국 학계의 탁월한 문학자 두 명이 쓴 『디지털 인문학 메니페스토 2.0』(Digital Humanities Manifesto 2.0) 발표된 이후, 세계 각지의 학인들은 그 취지에 공감하며 각국에서 DH를 정착·발전시켰다.

디지털 기술로 인문학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국내에서는 2010년대의 빅데이터, 4차 산업혁명, 디지털 전환, 2016년의 알파고 쇼크 등을 거치며 DH에 대한 기대감이 증폭됐다. 디지털 기술을 인문학에 접목하면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을까?

18세기 미주와 유럽 학인들의 서면 교류를 시각화한 '문필 공화국 그리기' 사이트 화면이다.

안타깝게도, 2024년 현재 그러한 질문에 명쾌한 답을 주면서 DH라는 분야를 정의할 만한 성과물은 나오지 않았다. 물론 18세기 미주와 유럽 학인들의 서면 교류를 시각화한 ‘문필 공화국 그리기(Mapping the Republic of Letters)’ 같은 작업물은 이전에는 상상만 가능했던 성취이다. 이처럼 전산화된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개별 연구자가 혼자, 단시간 내에 만들기 어려운 DH 성과가 꾸준히 제출되었다.

일부 DH 옹호자들은 디지털 기술로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형태의 독창적인 지식을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직 과감한 주장일 뿐이다. 한편 데이터 과학, 서지학, 언어학 등 전산 기술의 접목에 유리한 학문을 수행하는 이들은 각자의 기법을 인문학 데이터에 적용해 DH 작업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결과를 산출했다. 그중 회자 되는 것은 드물다.

디지털 인문학 현주소 시급히 진단 필요

카이스트케임브리지대학을 포함해 국내외 유수 대학에서 DH가 학위·전공 과정으로 제공되는 상황을 고려할 때, DH의 현주소를 시급히 진단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다. 가장 큰 오해는 디지털 기술의 위치에 관한 것이다. DH 옹호자들은 프로그래밍의 문법을 학습하고 코드를 쓸 수 있는 능력의 배양을 선결 조건으로 본다. 반면 인문학자들은 문학·사학·철학 각 분야의 고유한 실천을 먼저 익히길 바란다. 어느 한쪽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DH의 시작과 관련된 논의에서부터 지식의 주도권을 둘러싼 싸움이 벌어진다.

DH 연구자들에게는 거대한 의심이 제기된다. 가장 큰 의심은 DH 활동이 기존 인문학 활동과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으로 표출된다. 이는 냉소적이나 정당한 문제 제기이다. 또 DH를 위해서는 분석 대상인 데이터(주로 텍스트)가 전산화 돼야 하고 컴퓨터가 읽을 수 있는 형태로 가공돼야 한다. 데이터 전산화와 전처리 활동은 DH의 핵심이지만, 아쉽게도 아직 정당한 학문 활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세상에 나온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DH는 여전히 신생 학문이고, 재정적 지원은 그리 넉넉하지 않다. 학계 바깥의 청자들, 예컨대 정부나 기업 등 지원 기관들이 DH에 거는 기대도 학계의 기대와는 사뭇 다르다. DH는 빛 좋은 개살구에 빠질 위험에 항상 노출돼 있다.

챗GPT 4로 생성한 ‘디지털 인문학’(digital humanities)을 상징하는 그림이다.

정작 현실에선 협업이 쉽지 않다

연구자 입장에서의 투자수익률(ROI) 문제야말로 DH의 진전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DH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기술과 인문학, 양자의 고유 지식을 깊게 알아야 한다. 물론 이러한 주문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어느 누가 보상이 두 배가 아닌 일에 기꺼이 노력을 두 배로 들이겠는가? 

DH의 여러 덕목 중 하나는 협업이지만, 정작 현실에서 협업은 쉽지 않다. ROI 문제가 다시 첨예해진다. 최소 5년이 걸리는 인문학 박사과정에서 디지털 기술자와의 협력을 통해 만든 좋은 연구 결과물은 드물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과연 박사학위 소지자의 취직을 보장할까? 그렇다고 공저 논문이 단독 집필 논문보다 공로를 많이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다. DH에 대한 유인은 과연 무엇일까?

기존 인문학은 경시하면서 왜 ‘디지털 인문학’을 강조하는가

한 가지 의의는, DH를 둘러싼 논의가 학계의 보상 구조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DH를 제대로 키워 세계적인 성과물을 만들려면 DH 작업물, 협업, 데이터 전산화 및 가공의 각 활동에 대한 분명한 유인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설령 그런 유인이 제공되더라도, 이것을 과연 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까? 기존 인문학은 경시하면서 왜 DH에만 유인책을 제공하느냐는 비판에 대한 대답도 같이 준비해야 한다.

무엇이 좋은 인문학 연구인가라는 오래된 고민을 생각할 때, 결국 DH 논의도 무척 오래된 문제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무엇이 좋은 DH 연구인가? 이 질문에서 시작해 학계가 두루 인정하는 결과물이 나오고, 인정받는 연구자들이 뭉치고, 재정 지원이 더해지고, 역량 있는 후속 세대가 참여한다면 DH라는 학문 분야는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연재에서는 필자의 전공인 역사학에 초점을 맞춰 DH의 제 면모를 살펴본다. 양자가 많은 지점을 공유할뿐더러, 문학이나 철학 분야에서 전개되는 DH 논의를 모두 따라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디지털 역사학의 역사와 현주소, 장애물과 돌파구를 살피고, 필자의 연구를 바탕으로 DH의 가능성과 전망을 논할 것이다.

우동현 카이스트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조교수
UCLA에서 과학기술사(북한-소련 관계사)로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국사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The Historical Journal』에 한국인 최초로 논문이 게재됐다. 2023년 8월부터 한국역사연구회에서 디지털역사학연구반을 설립해 운영 중이다. 연구실 주소는 https://sites.google.com/view/then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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