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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시절
어려운 시절
  • 최승우
  • 승인 2024.02.13 14: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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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지음│장남수 옮김│창비│448쪽

획일적인 산업사회의 이념에 맞서 
자유로운 상상력의 가치와 개개인의 존엄을 옹호한 디킨스의 수작

몰입감 있는 전개와 특유의 재기 넘치는 묘사로 오랫동안 사랑받은 찰스 디킨스의 장편소설 『어려운 시절』이 창비세계문학 95번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가진 자의 허위의식과 갖지 못한 사람들 고유의 생명력을 밀도 있게 그려낸 이 작품은 물질만능의 사회에서 공허감과 허전함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커다란 울림을 선사한다.

디킨스 전문 연구자인 울산대 장남수 교수는 영미문학연구회와의 공조를 통해 이룬 명징하고도 섬세한 번역으로 대중성과 예술성을 고루 갖춘 작품의 매력을 고스란히 펼쳐 보인다. 특히 작품의 세세한 표현에 담긴 의미까지 정밀하게 짚어낸 역자의 해설은 디킨스 작품세계의 본령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출간 이후 충실한 고전연구의 성과로서 이 책이 주목받은 이유다.

날카롭고 거침없는 세태 비판과 풍자

작품의 무대인 영국의 공업도시 코크타운은 공장과 증기기관의 도시이자, 노동자들의 도시, 수치화할 수 있는 효용만이 절대적인 이른바 공리주의 이념이 지배하는 도시다. 소설은 공리주의를 대변하는 인물인 국회의원 그래드그라인드가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상상을 억압하는 그의 교육철학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의 딸 루이자와 아들 톰 역시 아버지의 엄격한 원칙에 따라 모범적인 학생으로 길러지지만, 이들의 인생은 그래드그라인드가 꿈꾸는 이상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전개된다. 상상과 애정을 억압당한 채 자란 루이자는 스무살 연상의 자본가 바운더비와 애정 없는 결혼을 하고, 톰은 방탕한 생활에 빠져 도박과 강도에 연루된다. 이처럼 그래드그라인드로 대변되는 공리주의 이념은 개인의 타고난 양심과 자연스러운 감정을 무참히 짓밟고 인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획일적인 이념에 스러지지 않는 민중 개개인의 존엄

이야기의 다른 한편에는 산업문명의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는 노동자계급의 비극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인 스티븐 블랙풀이 있다. 성실한 노동자인 그는 노동자총연맹에 가입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동료 노동자들로부터 외면받고, 공장주인 바운더비로부터는 불합리한 해고를 당한다. 결국 코크타운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 그는 나아가 톰 대신 은행 도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누명까지 뒤집어쓴다.

그럼에도 그는 동료 노동자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사람들이 이해와 연대 속에서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디킨스는 그를 통해 물질적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노동자 개개인의 존엄을 옹호한다. “엔진에는 신비가 없지만 일손들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도 헤아릴 수 없는 신비가 존재한다”(112면)라는 표현에서처럼 노동자계급에 대한 디킨스의 애정 어린 시선은 소설 곳곳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상상력과 연대의 가치

디킨스의 이러한 산업사회 비판이 소설에서 가장 극적으로 형상화되는 것은 코크타운의 공장과 대비되는 곡마단의 존재를 통해서이다. 곡마단은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민담과 민요 등의 의미를 부각하고, ‘사실’의 세계와 대비되는 ‘상상’의 세계를 대변하며, ‘노동’의 원리와 배치되는 ‘놀이’의 가치를 웅변한다. 곡마단의 단원들은 학식은 보잘것없지만 ‘놀랄 만한 부드러움과 천진함’(63면)을, ‘서로 돕고 동정하려는 지칠 줄 모르는 열성’(63면)을 지닌 이들이다.

이들은 소설의 처음과 끝에 등장해 서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맹목적인 이윤 추구와 대비되는 공동체적 가치를 드러낸다. 특히 곡마단 출신의 정 많은 소녀 시시 주프는 ‘사실’과 ‘이성’의 억압 속에서도 따뜻한 본성을 잃지 않고 여성 등장인물들 간의 연대를 주도하는 등 작품의 극적인 맥락 속에서 도드라진 영향력을 발휘한다.

19세기 자본주의의 이념으로서의 공리주의가 포섭하지 못하는 삶의 다양성과 민중적 덕목을 옹호한 디킨스의 문제의식의 강렬함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더구나 그의 장기이기도 한 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와 생생한 묘사는 그가 당대에 획득한 대중적 인기를 오늘날에도 쉽게 공감할 수 있게 한다. 『어려운 시절』은 디킨스의 소설이 고전 중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까닭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고전의 현재적 가치를 되새길 기회가 될 것이다. 

그들 모두는 대단히 방탕한 척, 세상일에 통달한 척했고, 사복 차림일 때도 그다지 단정해 보이지는 않았다. 집 안은 조금도 정돈돼 있지 않았으며 학식은 다 합해봐야 어떤 주제든 초라한 글자 하나만 나올 뿐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게는 놀랄 만한 부드러움과 천진함이 있었고, 어떤 종류든 약삭빠른 일을 하기에는 특별한 부적합성이 있었으며, 서로서로 돕고 동정하려는 지칠 줄 모르는 열성이 있었다. 이것은 이 세상 어떤 계층의 사람들이 지닌 일상적인 덕목만큼이나 종종 존경받을 만하고 언제나 관대하게 해석될 만한 것이었다. 63면

“해난사고에 대한 통계자료가 있다고 했어요. (맥초컴차일드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일정 기간동안 십만명의 선원이 장거리 항해를 떠났는데 그중 오백명만이 익사했거나 불에 타 죽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몇 퍼센트가 죽은 거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아가씨, 제가 말하기를,” 이때 시시는 자기의 크나큰 실수를 크게 뉘우치며 고백하는 것처럼 심하게 흐느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시시?”
“죽은 사람의 친척들과 친구들에게는—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 거예요, 아가씨. 저는 영영 제대로 배우지 못할 것 같아요.”95면

걱정 많은 선량한 사람들아, 기술이 자연을 망각에 맡길까 두려워 말라. 조물주의 작품과 인간의 작품을 어디에든 나란히 놓고 보면 전자가 비록 아주 보잘것없는 일손의 무리라 해도 그 비교에 의해 존엄함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 엔진에는 신비가 없지만 일손들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도 헤아릴 수 없는 신비가 존재한다, 영원히. 111면

“나는 아주 불행해. 그리고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했을 것들은 완전히 파괴되었어. 나는 아직까지도 분별이 없고 네가 생각하는 만큼 배웠기는커녕 가장 단순한 사실부터 새로이 배워야만 해. 지금 내가 조금도 지니지 못한 평화와 만족과 명예 등 온갖 좋은 것들로 이끄는 인도자를 지금보다 더 비참하게 원할 수는 없을 거야. 그래도 불쾌하지 않니?”
“예!”
당당한 애정의 순결함과 예전부터 지니고 있던 헌신적인 정신이 넘쳐흐르는 가운데, 한때 버림받았던 이 소녀는 상대방의 암흑을 비추는 아름다운 빛처럼 빛났다. 335면

“그러나 행동할 때와 마찬가지로 판단을 내릴 때도 우리는 참고 또 참아야 하는 법이오. 고통과 괴로움을 맛보며 밤하늘을 보다가—별빛이 나를 비춰주는 가운데—나 자신이 세상에서 허약한 존재로 지냈던 때보다는 세상사람들이 좀더 사이좋게 지내고 상대방을 더욱 잘 이해하면 좋겠다고 훨씬 분명히 깨달았고, 죽어가면서 그것을 위해 기도했소.”397면

옮긴이의 말

『어려운 시절』에서 드러나는 디킨스의 생각은, 대상의 총체적 연결이나 수치로 계량화할 수 없는 가치에 적대적이게 마련인 이런 식의 계산법으로는—그것이 그 나름의 관찰과 계산에 근거해 각 부분체계의 합리성을 아무리 달성한다 해도—실질적인 행복과 진정한 합리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산술과 추상의 정신에 기초한 그래드그라인드의 원칙은 크게 보아 근대적 산업기술과 자본제 생산양식의 핵심원리에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많은 개혁이 이루어진 지금에까지 그래드그라인드와 같은 이들이 겉모습만 달리한 채 여전히 번창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난롯불이나 코크타운의 굴뚝을 보며 인생에 대한 공허감과 허전함을 곱씹는 루이자의 모습은, 어찌 생각하면 그래드그라인드의 세계에서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있는 현대인의 모습일지 모른다. 장남수

지은이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70)

대중성과 예술성을 두루 갖춘 19세기 영국의 대문호이다. 1812년 영국 포츠머스 근교 랜드포트에서 해군 경리국 직원 존 디킨스의 여덟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열두살에 부친이 채무자 감옥에 수감되는 바람에 구두약 공장에서 혹독한 노동을 체험하는데, 이 경험은 후일 『막내 도릿』 등 사회개혁과 노동문제를 다룬 산문, 소설 등에 반영된다. 1833년 『먼슬리 매거진』에 「포플러 산책로의 만찬」을 게재하며 등단, ‘보즈’라는 필명으로 연재한 단편을 묶어 1836년 『보즈의 스케치』를 첫 출간한다. 이듬해 『피크윅 문서』가 크게 주목받고, 연이어 『올리버 트위스트』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작가로서의 위상을 다진다. 이후 『니콜라스 니클비』 『골동품 가게』 등 사회모순과 삶의 애환을 풍자와 유머, 사실적 묘사로 그려낸 작품들을 발표하고, 1843년에는 첫 ‘크리스마스 소설인 『크리스마스 캐럴』로 기록적인 성공을 거둔다. 『데이비드 코퍼필드』 『블리크 하우스』 『어려운 시절』 등 후기작으로 갈수록 사회 각계각층을 폭넓게 다루며 더욱 비판적인 태도와 신랄한 풍자를 선보인다. 잡지 발간, 복지사업, 낭송 공연 등 다방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와중에 『두 도시 이야기』 『막대한 유산』 등 묵직한 장편소설을 잇달아 발표하고, 사회문제에도 꾸준한 관심을 기울였다. 1870년 대작 『에드윈 드루드의 미스터리』 집필 도중 사망,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옮긴이 장남수

서울대 영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울산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 『디킨즈와 산업사회 비판』, 공역서 『문학이론입문』 등이 있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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